경제신문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책 소개가 이와 같았다. 

"스펙쌓기로 청춘을 낭비하지 않으면서도 취업에 성공하는 비결!
가장 중요한 취업의 열쇠는 슈퍼스펙이 아니다.
뽑는 사람은 알지만 뽑히는 사람은 몰랐던 취업의 진실."

개인적으로 그리 뛰어난 스펙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기에
책 소개에 그만 혹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책들이 과장 광고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한번쯤 더 속아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난 어찌 먹고살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을 무척 많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 책을 찬찬히 살펴보곤 책을 살지 말지 정하려했지만
큰 기대는 안 했다. 워낙 뻥을 치는 책들이 많았고 나도 한 두번 속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책을 읽어보니 한장 한장이 진국이었다. 

취업을 바라는 취업준비생들이 애타게 찾고 있던 내용들이 가득했다. 

저자는 LG 디스플레이 인사팀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는데
요지는 이와 같다.

"요새 취업준비생들이 취업을 못하는 이유는 삶의 방향을 정하지 않고, 다만 스펙을
위해서만 공부하기 때문이다. 스펙은 누구나 쌓기 쉽지만 차별화 되지는 못한다. 
기업들은 구직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지원서를 받는다. 하지만 스펙에 나와 있는 건
’어떤’사람인지가 아니라 점수뿐이다. 스펙에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자기소개서를 통해서라도 채워야하는데 자기 소개서또한 천편일률적이다. 아무도 진정한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간단한 방안을 제시한다.

"우선 세가지를 확실히 밝혀라
1.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2. 이런 이유로 지원했습니다.
3. 입사한다면 이렇게 일하고 싶습니다."

무척 간단해 보이지만 공교롭게도 사람들은 이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알기 전에 영어 공부를 하고, 학점을 따고, 의미없는 봉사활동을 하기 바쁘다.
그러니 무수한 활동이 쌓여도 자기 소개서 하나 제대로 못 쓰는 것이다. 무슨 목표가 있어서 회사에 들어가려하는 게 아니라 다만 조건이 좋고, 남들이 바라는 직장이어서 들어가려한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1번 항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1번이 해결되면 2,3번은 저절로 풀린다고 말한다. 


자기 분석, 자신을 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하는 일은 달리 말하면 삶의 철학을 찾는 일이다.
가장 실용적이며 가장 현실적인 책에서 ’삶의 철학’을 논하는 걸 보니 무척이나 아이러니했다.

최근 삶의 방향을 고민하느라 시간을 많이 쓰고 있었는데, 가장 실용적인 책에서조차 
삶을 응시하길 권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이
낭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기에.

아무튼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달달이 취업용 면접서를 읽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자신할 수 있다.

명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때 최근 읽은 책 중 상당수는 좋은 책이었지만

명작은 아니었다. 

허나 도널드 E. 웨스트 레이크의 ’도끼’는 다르다. 

정말 명작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소설이다. 

’도끼’는 실직을 당한 40대 후반의 남자가 취직을 하기위해

경쟁자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어찌보면 조금은 황당할 수도 있는 얘기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도 안된다가 처음 내가 보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감으로써 
독자들의 예상을 깨버린다. 

오히려 너무도 현실적이기에 소름이 끼칠정도랄까.

주인공의 절박한 심정이 간결하고도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작가가 실지 오랫동안 실업 상태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소설은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처음엔 허황되게 보였던, ’취직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어느새 현실이 되어있다. 

’실업은 곧 살인이다.’ 

도끼는 비록 10년 전에 쓰였지만 전달하는 메세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구직을 준비하는 취업자들이나, 실업자들, 앞으로 실직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들은

도끼를 읽어보는 게 좋겠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리라고 본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화를 고려하고 있다는데

꼭 영화화 되어서 책도 재간되고, 좋은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정태원씨는 참 책을 잘 고르는 것 같다.

 

“오늘 아침 경기도 이천 35번국도 부근에서 30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번 역시 ‘히치하이커’ 살인마의 소행으로 보이며 경찰은 수사에 총력을........”

 라디오를 꺼버렸다. 어차피 수법이야 뻔하니 더 들을 것도 없다. 놈이다. 놈. 벌써 다섯 명 째다. 무척이나 빠르고 거침없이 살인을 계속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 첫 시체가 발견된 건 3개월 전이다. 트럭 운전을 하던 40대 남성이었다. 시체는 일단 교살된 후 차와 함께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덕분에 경찰은 따끈따끈한 시체를 맞이했다. 그들은 재빨리 주변을 포위했지만 소용없었다. 교통체증만 일으킬 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찰은 연쇄 살인이란 걸 몰랐다. 연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났다. 놈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교살된 시체와 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달라진 건 피해자의 나이, 직업뿐이었다. 이번에도 경찰은 놈을 잡지 못했다. 현장엔 남겨진 단서도 거의 없었다. 조사 결과 운전자들이 혼자서 운전을 했단 사실이 밝혀졌고 경찰은 이를 토대로 범인이 우연히 차를 탔다가 살인을 한 걸로 추정했다. 그 결과 ‘히치하이커’ 살인마란 이름이 붙었다.

 놈은 대체 어떻게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걸까. 차를 근처에 주차해 두었다가 살인을 저지른 후 차를 타고 도망가는 걸까. 아니면 은신처를 만들어둔 뒤 먹이들을 은신처 부근으로 유인한 뒤 숨어버리는 걸까. 분명히 독특한 방법이 있겠지만 나로선 알 도리가 없다. 하긴 알아봤자 뭐하겠냐. 놈과 만날 리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데. 마음 같아선 놈을 죽이거나 확 감방에 집어넣어버리고 싶지만 쳇, 헛된 망상이다.

 난 여러모로 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도 그를 싫어하겠지만 난 조금 이유가 다르다. 사람들의 감정이 혐오와 공포라면 내 감정은 증오에 가깝다. 놈 때문에 난 먹잇감을 잃어버렸다. 놈은 내 목구멍을 콱 막아버렸다. 예전엔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차에 태워준다고 하면 고맙다고만 하지 의심하지 않는다. 난 그런 여행자들만을 노렸다. 하지만 놈이 나타난 이후로 여행자들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가끔 보이더라도 3,4명씩 짝을 지어 다닌다. 걸어 다니다 혹시라도 놈을 만날까 두려웠던 거다. 놈이 차를 탄 운전자만을 노린다는 건 확실했지만 사람들은 놈과 마주친다는 상상만으로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도로변은 텅 비어있다. 예전엔 한 시간만 길을 왔다갔다하다보면 사람들이 알아서 손짓을 했고 그 중 맘에 드는 사람을 골라 태울 수 있었다. 허나 이젠 네 시간 가까이 돌아다녔는데도 길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제기랄, 이게 다 놈 때문이다. 놈 때문에 난 유희를 즐길 기회를 잃어버렸다. 피와 살을 잘근 잘근 잘라 혓바닥으로 핥을 때 느끼는 상쾌함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위아래 입술에 뜨뜨미지근한 피와 시큼한 땀이 닿을 때마다 난 황홀해진다. 쫄깃쫄깃한 살에 달라붙어있는 단단하면서도 허약한 뼈를 써는 맛 또한 일품이다. 뼈와 톱이 만나서 내는 스악스악 소리는 순식간에 날 흥분시켜 끝내는 정액을 토해내게 만든다. 이때의 쾌감은 단순히 여자와 섹스 하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한번 경험하고 나면 내가 왜 살인을 멈출 수 없는지 이해할 거다.

 주기적으로 사냥을 해야 난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살인의 쾌감은 강렬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길어야 3개월 정도다.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사람을 죽여야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게 3개월 전이니 놈이 나타난 시기와 비슷하다.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날 때만해도 난 놈을 신경 쓰지 않았다. 허나 세 번째,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나고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 사람들은 점점 도로에서 사라져갔다. 사냥을 하려해도 사냥감을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며칠 내로 돌아버릴 거다. 앞뒤 가리지 않고 아무나 납치해서 죽인 뒤 꼼짝없이 경찰에 붙잡힐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폭주하기 전에 누구라도 좋으니 죽여야 했다. 보통 때라면 손쉬운 먹잇감을 골랐겠지만 이번엔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

 수법을 바꾸는 것도 생각해 봤다. 도보 여행자들만을 노리지 말고 도시로 들어가 볼까?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그건 너무 위험했다. 목격자가 나올 확률이 큰데다가 도시에선 낡은 트럭은 매력이 없다. 도시에서 인기 있는 건 고급 승용차나 스포츠카다. 트럭에 얼씨구나 하고 타줄 사람은 히치하이커들 뿐이다. 대개의 여행자들은 남들에게 어디쯤 있는지 일일이 알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이 사라지더라도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하며 실종을 알게 되는 건 한참 뒤다. 나와 그들은 초면이니 내가 용의선상에 들어갈 이유도 없다. 시체만 잘 처리하면 잡힐 위험은 없는 셈이다. 2년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내 방법은 안전했다. 괜히 미숙한 수법을 썼다가 잡힐 바엔 조금만 참는 게 낫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에 비해 놈은 너무 막나가고 있다. 잡힐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나라면 시체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았을 거다. 차도 인적이 드문 곳에 주차해두어 시체와의 연관성을 없앴을 거다. 그랬다면 경찰들은 내가 어떤 방식을 썼는지 알 수 없을 테고 날 잡을 꿈도 못 꿨겠지. 하지만 놈은 자기가 잡히기를 원하는 것 마냥 모든 걸 드러내고 있다. 참 어리석은 행동이다. 내가 죽인 시체 중 여태까지 발견된 건 고작 2구뿐이다. 7구 중 2구니 죽이는 즉시 족족 발견되는 놈과는 차원이 다르다. 2구 또한 수사를 혼란시키기 위해 일부러 얕게 묻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살인을 시작하기 전 책을 하나 읽었다. 전직 FBI 수사관인 마이클 맥코넬??살인범들을 잡아온 과정, 수사 기법, 살인범의 심리와 특징 따위가 고스란히 적혀있다. 내겐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이었다. 살인범들은 처음엔 거주지 부근에서 살인을 시작해 점차 먼 곳으로 가 살인을 한다. 또한 처음 살인을 할 땐 미숙하기에 자기도 모르게 흔적을 남긴다. 좋은 책 덕에 난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먹잇감을 고를 때도 가능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골랐고 시체도 먼 곳에다 숨겼다.

  

 내 직업은 이런 일을 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화물 운송을 하며 전국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다보니 누구보다도 지리에 밝았고 차를 몰고 어디를 가도 의심받지 않았다. 한미한 동네여도 물건은 오가기 마련이니까. 첫 시체는 마산에 두 번째 시체는 창원에 묻었다. 경찰은 경남 일대를 집중적으로 수사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인천이다. 경찰은 헛다리만 짚고 있는 셈이다.

 난 주로 여자만을 죽였다. 나이는 크게 상관치 않았다. 젊을수록 좋았지만 늙은 여자도 나름 매력적이었다. 시험 삼아 남자를 한 번 죽여본 적도 있었는데 제압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다지 재밌지도 않았다. 남자는 죽일만한 생물이 아니란 걸 곧 깨달았다. 그에 반해 놈은 남자만을 죽이고 있다. 감히 낯선 여행자를 태울 여자는 없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남자는 죽이기가 쉽지 않을 텐데....... 놈은 적어도 힘만은 강한 게 분명하다.

 남자만? 얼핏 라디오에서 듣기론 이번엔 여자를 죽였다고 한 것 같다. 표적을 바꾼 걸까? 어떤 정신 나간 년이 요즘 같은 때에 모르는 남자를 태우는 걸까. 죽어도 싼 년이다. 그런데 정말 놈의 소행이긴 할 걸까? 살인을 하는 자의 개성에 따라 누굴, 어떻게, 어디서 죽이냐가 달라진다. 요컨대 살인에도 취향은 있는 셈이다. 보통 취향은 잘 바뀌지 않는다. 나 또한 잠시 외도를 한 적이 있긴 하지만 큰 틀은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놈이 잠깐 대상을 바꿨나? 아니면 다른 놈의 짓? 어쩌면 모방범이거나 살인을 숨기기 위해 놈의 소행인 것 마냥 꾸몄을 수도 있다. 궁금했다. 아까 라디오를 끄지 말 걸 그랬다. 난 다시 라디오를 켰다.

 아쉽게도 광고가 나오는 중이었다. 살인 사건은 큰일이니 광고 후 다시 얘기할 게 틀림없다. 차를 돌려 평소 안 가던 길로 가보았다. 지금까지는 너무 큰 길 위주로만 다녔다. 딴 길에는 여행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낮지만 만에 하나란 게 있다. 살짝 기대를 가지고 창밖을 바라봤다. 없다 해도 큰 실망은 하지 않을 정도의 평범한 기대였다. 그 때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멀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윤곽이 뚜렷해졌다.

 히치하이커다! 가벼운 옷차림과 등에 멘 배낭 그리고 차를 향해 흔드는 손. 누가봐도 명백한 증거였다. 난 내심 쾌재를 불렀다. 긴 기다림이 드디어 보상을 받았다. 다른 운전자가 채가기 전에 재빨리 태워야했다. 내 앞엔 차가 세 대나 더 있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그 사람을 태우지 않았다. 히치하이커는 남자였다. 한 20대 후반 쯤으로 보였다. 오래도록 기다렸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슬쩍 보기에도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는데 보통 때라면 쉽게 차를 얻어 탔을 거다. 난 잠시 고민했다. 체격도 좋고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라면 한동안 사냥감을 전혀 못 만날 확률이 컸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어디까지 갑니까?”

 “계천까지 갑니다. 태워주시면 좋겠네요. 하루 종일 걸었더니 너무 힘들어서요.”

 “타슈. 중간에 내려줄테니.”

 

 난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곧이어 차에 올라탔다.

 “고맙습니다. 휴, 왜 이리 세상인심이 각박해졌는지 모르겠어요. 차 한번 얻어 타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세상이 어지러울 때라 그렇죠. 뭐.”

 “걷기도 하고 차도 얻어 타면서 전국 일주를 하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난 김에 시도해봤는데 이리 고생할 줄은 예상도 못했습니다.”

 “안 좋을 때를 골랐수.”

 “저도 후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다신 못할 거 같아서요.”

 “젊어서 고생은 좋지.”

 물론 네가 아니라 내게. 곧 있을 사냥을 생각하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왜 갑자기 웃으시죠?”

 “아니. 길동무가 생기니 기뻐서요. 트럭 운전을 오래하다 보면 심심하거든. 그래서 여행자들을 태우곤 합니다. 회사에선 금지시키지만 시키는 데로만 할 수 있나.”

 “그렇군요. 저도 여러 번 트럭에 타 봐서 압니다.”

 남자는 다 안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런 웃음이었다. 순간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으나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직업이 뭐요? 학생인가? 학생치곤 나이가 많은데.”

 딱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단지 차가 엉뚱한 데로 가는 걸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 시험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며칠 전 운 좋게도 시험에 합격했죠.”

 “공무원?”

 

 요즘은 열에 두 서넛은 공무원 시험을 친다. 다섯 번째 죽인 여자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여자는 연거푸 시험에서 떨어지자 답답한 마음에 여행을 왔다고 했다. 난 여자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주고 위로해주는 척하면서 사냥하기 좋은 장소로 유인했다. 생긴 건 그다지 예쁘지 않았지만 비명소리가 끝내주는 여자였다. 다시 들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그 날 이후 난 녹음기를 가지고 다닌다. 아직까진 그녀만큼 만족스런 목소리를 못 찾았다.

 “뭐 비슷합니다. 마침 임용되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여행을 떠난 거죠.”

 임용이라. 아마도 예비 선생인가 보다.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야겠다. 취직을 앞두고 사라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샅샅이 찾을 것이다. 경찰에 금방 실종 신고가 들어갈 확률도 매우 높다. 하지만 이제 와서 사냥감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떻게 찾은 먹잇감인데.

 “한가하군. 부러워. 나는 매일 매일 일에 치여 사느라 쉴 틈도 없어요.”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저도 얼마 전까지는 백수였습니다.”

 “출발은 어디서부터 했소?”

 “서울입니다.”

 “며칠 됐겠네요."

 "열흘째예요. 거의 대부분 걸었습니다.”

 “그런 것 치곤 옷이 깨끗하네요. 요샌 반나절만 걸어도 먼지투성이가 되는데.”

 여행을 하다보면 옷이 금방 더러워진다. 그리고 지금은 저녁때다. 하루 종일 걸은 여행자의 옷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깔끔했다.

 “자주 갈아입으니까요. 땀이 많이 나다보니.”

 

  남자의 배낭을 슬쩍 쳐다보았는데 크지 않았다. 전국 일주를 하는 여행자의 가방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갈아입을 셔츠, 바지, 팬티, 양말만 넣어도 한 보따리가 된다. 매일 같이 빨래를 할 수 없으니 최소한 3,4벌씩은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남자의 배낭은 초등학생용 책가방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로 작은 것이었다.

 “가방이 작군. 여기 옷들이 다 들어있으시오?”

 “짐은 숙소에 맡겨놓고 나왔죠. 오늘은 계천에 있는 화동사까지 갔다가 밤중에 돌아올 예정이었기에 최대한 가볍게 하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제때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제서야 납득이 갔다. 괜히 쓸데없는 의심을 품었다. 오랜만에 사냥을 하다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모양이다. 그때 남자가 갑자기 말했다.

 “라디오 좀 꺼주시겠습니까? 너무 시끄러워서요.”

 솔직히 난 남자와 대화를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지 고민하느라 라디오를 켜놓았단 사실조차 잊어 먹었다. 남자가 언급을 하고나서야 라디오 생각이 났다. 구태여 남자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 기껏 잡은 먹이가 엉뚱한 생각을 품으면 곤란했다. 난 순순히 라디오 쪽으로 손을 뻗었다. 라디오에선 히치하이커 살인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 상황을 통제해 좌지우지하는데 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시욕이 크며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 사람들에게서 쉽게 호감을.............”

 조금 흥미가 가긴 했지만 나중에 들어도 될 일이다. 일단은 사냥부터 마무리 짓자. 계천으로 가려면 64번 국도를 타야한다. 하지만 난 65번 국도로 갈 계획이다. 그 쪽엔 인적이 드물어 사냥하기에도 적당하고 입산 금지된 산도 많다. 적어도 이 부근에선 사냥과 뒤처리를 하기에 최적의 공간인 셈이다.

 “계천엔 처음 가는 거요?”

 “네, TV로는 몇 번 봤지만 실제로는 처음 가 봐요.”

 아주 좋았다. 초행길인 이상 의심받을 염려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었다. 길이 험해 도착하기 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한 시간 정도는 더 가야했다.

 트럭 안엔 적막이 흘렀다. 사내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침묵을 깨고 싶지만 할 말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혹여 날 의심이라도 한다면 큰일인데. 그래, 그걸 물어보자. 남자들 간의 대화론 그게 딱이다.

 “사귀는 사람은 있소? 반지는 없는 걸로 보이지만.”

 사내의 손을 슬쩍 쳐다보았다. 손가락이 굵고 거칠다.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없습니다. 헤어진 지 꽤 됐어요.”

 

 사내는 말을 하며 동시에 손에 있던 걸 떨어뜨렸다. 툭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네모난 모양의 물건이었다. 얼핏 봐도 일반 명함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죄송하지만 주워주시겠습니까?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깜빡 떨어뜨렸네요. 제 쪽에서 줍기엔 약간 머네요.”

 순순히 그것을 주워서 그에게 주려다 호기심이 동했다. 해서 슬쩍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헉!”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뒤늦게 입을 다물었지만 소용없었다. 그것은 경찰 신분증이었다. 사진과 이름, 소속, 경찰청의 인증이 있는.

 

 “보셨군요? 부담 가지실까봐 얘기하지 않으려 했는데.”

 “경찰증을 직접 본 건 처음이라 좀 놀랐네요. 아까 말한 시험이란 게 경찰관 시험입니까?”

 말을 하며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날 의심하고 있진 않을까?

 “네, 시험에 합격하고 나니 신분증이 나오더군요. 여러 차례 응시한 끝에 겨우 붙은 거라서 신분증을 보니 정말 기뻐서 항상 가지고 다닌답니다. 경찰이 됐다는 걸 실감한다고나 할까요.”

 다행히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임용이라고 하기에 선생님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사내는 살짝 웃었다. 어쩐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지금 난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셈이다. 그토록 피하고자 애써왔던 경찰을 태우게 되다니. 재수가 이보다 없을 순 없다. 지금 잡힌다면 다시는 사냥을 할 수 없게 되고 난 정말로 미쳐버릴 거다. 생각만 해도 죽을 맛이었다.

 “많이 놀라셨나요? 표정이 안 좋네요.”

 “아닙니다. 살짝 긴장해서요.”

 살짝 정도가 아니다. 솔직히 심장이 폭발할 지경이다. 지금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톡 건드리기만 해도 난 폭주해 버릴 거다. 모든 사실을 말해버리거나 아무에게나 칼을 쑤셔버리겠지. 아니, 그건 안 된다. 하아, 진정하자. 진정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 다시 숨을 고르자. 천천히. 좋아 좋아. 조금 흥분이 가라앉는다. 눈동자를 돌려 남자를 보니 남자는 유심히 날 바라보고 있다. 설마?

 “땀이 많이 나네요. 어디 아프십니까?”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억지로 나왔더니 좀 어지럽네요.”

 “너무 무리하면 안 좋죠.”

 다행히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경찰이란 말만 듣고 괜히 내가 지레 짐작해 내 무덤을 팠다. 저 경찰은 단지 우연히 내 차에 올라탄 것에 불과하다. 내가 살인을 했단 증거는 아무데도 없지 않은가. 모든 증거는 완벽하게 제거했다. 설령 심증은 있을 수 있어도 물증은 없다. 난 그 흔한 기념품조차 챙기지 않았다. 내 스스로 자백하기 전엔 날 잡을 방법은 없다. 몸이 식기 시작한다. 그러자 방금 내가 저지른 실수가 떠올랐다. 남자는 좀 전까지는 아무 의심도 안 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혼자서 발작을 했기에 괜한 의심을 샀고 이제부턴 날 유심히 지켜볼 거다. 주의해야 한다. 지금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몇 배로 긴장해야하지만 그걸 드러내선 안 된다. 절대로.

 조심만 하면 남자는 내 정체를 모른 채 차에서 내릴 거다. 얌전히 계천에 내려주고 다른 사냥감을 찾자. 아니 오늘은 그만 둘까? 그때 사냥을 하려고 엉뚱한 방향으로 왔다는 걸 떠올렸다. 계천으로 가려면 U턴을 해야 한다. 갑자기 U턴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신이 없어서 길을 잘못 들었다하고 돌아갈까, 이대로 쭉 가다가 크게 한 바퀴 돌아서 가야하나. 전자가 시간은 적게 걸리지만 이미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건 위험했다. 고심 끝에 난 후자를 택했다. 남자는 이곳에 처음 와 봤다. 두어 시간쯤 더 걸려도 모를 것이다.

 결론을 내리니 마음이 편했다. 앞으로 40분 정도 가면 아까 가려고 했던 사냥터의 입구가 나온다. 오늘은 그곳에 갈 운명이 아닌가 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출근은 언제부터 합니까?”

 “날짜는 정확히 안 나왔지만 3개월 내에 발령이 난다더군요.”

 “딱 적당하군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아요.”

 “전 당장 내일이라도 출근하고 싶지만 그럴 일은 없겠죠. 통상적으로 빨라도 1개월은 기다린다니. 어서 살인범을 잡는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살인범? 나를 말하는 걸까?

 “아무쪼록 열심히 하시길 빌겠습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소용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순간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단 걸 깨달았다. 보통 경찰들의 눈썰미와 통찰력은 일반인의 것보다 수배, 수십 배는 뛰어나다. 예비 경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거다. 이미 저 자는 내 정체를 얼마쯤은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저 자를 차에서 내린다고 안전하단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안심하길 기다렸다가 잡으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제기랄.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되지? 죽이자니 뒤탈이 많이 남을 것 같았다. 웬만큼 무술을 익혔을 테니 상대하기도 어려울 거다. 하지만 그냥 보냈다가 차번호라도 적히면 꼼짝없이 붙잡히고 만다. 비록 오늘은 무사히 달아난다 해도 이 좁은 나라에서 가봐야 어딜 가겠는가. 몇 달 내로 아니 내가 다음 사냥을 할쯤엔 경찰들은 내 목을 조르고 있을 거다. 사냥을 포기하면 잡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을 죽이는 맛에 중독된 내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미치겠는데 앞으로 한 달 두 달, 삼 년 사년을 견디라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긴장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위가 쓰렸다. 가만히 있자니 다시금 너무 불안해 억지로라도 말을 꺼냈다.

 

 “군대는 어딜 갔다 왔나요? 육군? 해병대? ROTC?"

 "육군입니다. 평범하죠.”

 입으로는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딴 데 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놈을 죽이는 수밖에. 며칠 뒤에라도 내가 의심스러워져 조사를 하기 시작하면 위험했다.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요새의 수사 방식은 지나치게 과학적이어서 숨도 못 쉴 정도다. 내 뒤처리가 완벽했단 보장은 없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정식 경찰은 아니니 총은 없고 뒤에서 따라오는 차도 없다. 적어도 놈은 혼자였다. 이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일행이 있었다면 놈을 처리할 생각은 꿈도 못 꿨을 거다.

 운전을 하면서 놈을 처리할 순 없으니 차는 어딘가에 세워야했다. 여자야 힘으로 제압하면 되지만 남자는 다르다. 힘 대 힘으로 겨루면 승산이 높지도 않고 도망갈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난 주로 방심했을 때를 노렸다. 하지만 놈은 경찰이다. 약해빠진 인간들과는 달리 방심 따윈 안 할 거다. 경찰! 이 이름의 무게가 오늘에서야 생생하게 느껴진다.

 방법을 찾기 위해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했다. 머릿속에 온갖 망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때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다. 납득이 안 가는 게 있다. 의문이 하나 생기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난 왜 저 자가 경찰이란 걸 확신하지? 경찰 신분증을 봤기 때문에? 하지만 경찰이 되지도 않았는데 신분증부터 주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은 첫 출근을 하고 며칠은 지나야 신분증이 나와야 정상이다. 빨라봐야 출근 당일에 받겠지. 그런데 미리 주다니 아무리 공권력이라곤 하지만 이상했다. 나의 상식으론 정부 기관은 행동이 느리다. 언제 출근할지도 모르는 이에게 신분증을 줄 리가 없다. 돌이켜보니 신분증엔 소속도 써 있었다. 출근 날짜도 모르는데 소속부터 정해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까는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평정을 되찾고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그렇긴 하지만 이건 내 추측일 뿐이다. 저 자가 진짜 예비 경찰일 가능성도 있다. 다시 한 번 경찰증을 확인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잠시 고민하다 주사위를 던졌다.

 “경찰증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아깐 제대로 못 봤는데 대한민국 경찰이 어떤 신분증을 들고 다니는지 궁금해서요.”

 “안 됩니다.”

 딱 잘라 거절하는 말투였다. 단호한 거절.

 “잠깐만 보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보여드리기 싫어서가 아니라 잘못 건드리면 망가질 수도 있어서요. 출입증으로 쓰이는 물건이라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이번만큼은 속아주자.

 

 “그렇다면 할 수 없죠.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뭐죠? 얘기하세요.”

 “개인적으로 범죄 수사물을 즐겨봐서요. 드라마에선 뇌파를 이용해 수사를 하던데 설명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아직은 잘 모르겠군요. 공부한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서요. 현장에 나가기 시작하면 배울 수 있겠죠.”

 푸핫. 국내에 뇌파 분석 장치가 도입된 지 5년이 넘었는데? 내가 읽은 ‘살인의 증거’엔 웬만한 수사기법은 다 나와 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그건 기초 중의 기초다. 뇌파 분석 장치는 거짓말 탐지기 이상으로 효과적인 기계다. 뇌는 조작할 수 없으니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 고로 뇌파 분석 장치는 경찰이 쓸 수 있는 기계 중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찰 시험에 합격한 자가 그걸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번 대화로 저 자가 경찰이 아니란 건 확실히 드러났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경찰을 사칭하고 다니는 걸까? 아무도 히치하이킹을 하지 않으려 할 때 사칭까지 해가며 히치하이킹을 한 이유가 뭘까? 설마?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다. 내 옆에 있는 자가 바로 히치하이커 살인마다. 그는 경찰인 척 속이고 사람들을 죽여 왔다. 아마도 사람들은 쉽사리 그의 말에 속았을 거다. 그를 믿고 따랐겠지. 사람들은 권위와 강압에 약하니까.

 

 경찰증을 위조하긴 했지만 경찰 내부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니 예비 경찰인 척 행동했을 거다. 어설프게 아는 척할 바엔 아예 ‘지금은 모른다.’고 하는 게 낫다. 나처럼 의심 많고 범죄 수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속아 넘어갔을 거다. 그가 유유히 도주했던 비결도 여기에 있겠지. 같은 경찰을 의심할 까닭이 있겠는가? 소속과 성명만 확실하다면.

 

 하지만 의문이 하나 남는다. 오늘 아침 사냥을 한 번 했을 텐데 오늘 또 사냥을 한단 말인가? 그의 살인 주기가 짧아지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일주일, 아니 삼사일은 갈 거다. 굳이 오늘 또 살인을 할 이유는 없다. 그러다 문득 오늘 죽은 건 여자란 사실이 떠올랐다. 역시 오늘은 모방범의 소행이었다. 어리석은 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위장을 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놈은 아직 내가 놈의 정체를 알아냈단 걸 모른다. 승산은 내게 있다. 운전대를 잡고 있단 점은 조금 불리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단 점에서 이전의 먹잇감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놈을 믿고 완전히 방심했을 거다. 그러니 쉽사리 살해당했을 테고. 하지만 그들이 초식동물이라면 난 육식동물이었다. 또한 놈보다 훨씬 똑똑하며 영리하다. 놈은 그저 날 트럭 운전수 정도로만 보겠지만 그게 큰 오산이었단 걸 곧 알게 될 거다. 난 놈의 눈치를 보며 계속 운전했다. 혹시라도 날 습격할 낌새가 보이면 바로 차를 세운 뒤 저항할 계획이다.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했다. 그걸 들키는 순간 내 패는 드러나고 만다.

 “경찰은 처음 태워봅니다. 옆에 경찰이 있다니 든든하네요.”

 “아직 완전히 경찰이 된 것도 아닌 걸요.”

 “그래도 안심이 되네요.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요즘 흉흉한 소문이 돌지 않습니까?

  지금 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널 믿고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 난 너를 의심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너는 날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과연 놈은 예상대로 태연히 대답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히치하이커 살인마 말씀이시군요. 저도 어서 빨리 놈을 잡았으면 좋겠네요.”

 흐흐, 낯짝하나 바꾸지 않고 잘도 거짓말을 하는군. 하긴 그 정도는 돼야 내 적수가 될 자격이 있지. 놈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다 의문이 들었다. 굳이 죽일 필요 있나? 경찰에 넘기고 사라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정체를 알고 있긴 하지만 놈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내가 당할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승산이 높은 방법을 택하는 게 낫다. 놈이 저지른 살인은 온 세상이 다 알지만 내 살인에 대해선 모른다. 날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난 연쇄살인범을 잡은 영웅이 될 테고 사람들은 날 찬양하겠지. 하지만 놈이 살인을 저질렀단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야 놈의 말과 행동을 보고 놈의 정체를 알아챘지만 증거로서 가치는 없다. 실질적인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하다. 놈을 경찰서로 끌고 간 뒤 경찰이 조사하도록 할 수도 있지만 멍청한 경찰들이 증거가 없다며 놈을 풀어줄지도 모른다. 풀려난 뒤 놈은 더욱 더 활개 치면서 내 먹잇감들을 빼앗아갈 거고 사냥을 못한 난 결국 파멸하고 말 거다. 가능성은 반반. 허나 겨우 50% 확률에 내 목숨을 걸긴 싫었다.

 역시 죽이는 수밖에 없나. 결심을 하자 마음이 편했다. 놈의 체구가 탄탄한 편이긴 하지만 나도 그럭저럭 쓸만하다. 웬만한 남자와 정면으로 붙어선 지지 않는다. 보통 상황이라면 내 옆의 사내를 제압할 확률은 50%다. 허나 연장이 있으면 얘기가 다르게 돌아간다. 쓸만한 무기를 하나 쥐는 것만으로도 승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못해도 7 대 3, 잘하면 8 대 2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차 안엔 연장이 없었다. 혹시라도 불심검문을 받을까 연장은 몇 몇 장소에 숨겨두었다. 바로 내가 사냥터로 준비한 그 장소에 연장이 있다. 그곳은 여러 번 답사를 해 익숙한 데다 길이 좁아 차를 세워놓으면 빠져나가기도 힘들다. 그야말로 사냥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사냥터까지만 놈을 데려가면 내 승리는 확실했다. 의심받지 않고 놈을 유인해야만 했다. 놈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다면 먼저 공격을 할 테고 운전 중인 나로선 불리했다. 놈의 습격에 대비하는 한편, 놈을 속여야했다. 한꺼번에 두 가지 문제를 다루어야했지만 자신 있었다. 내가 놈의 정체를 알고 있단 걸 놈은 모른다. 내가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을지 놈은 꿈에도 생각 못할 거다.

 계속해서 놈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어떤 말로 놈을 꾈지 궁리했다. 사냥터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왔을 때 놈이 말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우리 식사나 하고 갈까요.”

 “난 괜찮소.”

 “제가 배가 너무 고파서요. 마침 요 앞에 식당이 있네요.”

 ‘두부전골, 김치찌개 전문’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음.......”

 “차도 얻어 탔겠다. 식사는 제가 살 테니 같이 가시죠.”

 시간을 보니 저녁때가 다 됐다. 의식하지 않을 땐 몰랐는데 밥 얘기를 듣고 나니 출출했다. 어차피 사냥을 하려면 힘이 많이 드니 이쯤에서 밥을 먹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불현듯 놈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이내 의심을 접었다. 식당엔 손님이 한 두 사람쯤은 있게 마련이다. 목격자가 있는데 자기 무덤을 파진 않겠지. 설마, 식당 주인과 짜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내가 추리한 바로 놈은 혼자서 행동해왔다. 공범이 있었다면 쉽사리 차에 얻어 타지도 못했을 거고 도망치지도 못했겠지. 배신의 위험을 무릎 쓰면서까지 공범을 만들 이유는 없다. 설령 공범이 있다 해도 대로변의 식당 안에서 소란을 피울 만큼 대범하진 않을 거다. 이곳은 지나가는 사람 중 누구라도 맘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날 습격할 계획은 아닐 거다.

 “좋아요. 그럼 비싼 걸 시켜야겠네요.”

 “전 가난한 여행자랍니다. 하하.”

 놈과 나는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향했다.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에 놈이 앞장서게 했다. 식당은 그리 크지 않았다. 식??님이 세 명 앉아 있었다.

 “뭐 드실래요?”

 메뉴가 많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다 결정했다.

 “난 김치찌개.”

 “저도 같은 걸로 먹어야겠네요. 아줌마 여기 김치찌개 둘이요.”

 놈과 마주하니 묘하게 긴장된다. 뭐라도 얘기를 꺼내고 싶은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놈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날카롭다. 부드러운 얼굴 속에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진 않지만 놈의 눈빛은 맹수의 것이다. 나도 비슷한 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놈이 내 정체를 눈치 채진 않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난 놈이 히치하이커 살인마란 걸 알기에 맹수의 눈 같다 생각했다. 아무 것도 몰랐다면 호감 가는 청년이네 하고 넘어갔을 거다. 놈이 보기에 나는 평범한 트럭운전수겠지. 먼저 시선을 돌리면 지는 것 같아 계속 놈을 쳐다봤다. 확실히 호감이 가는 얼굴이다. 두 번, 세 번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던 건 외모 덕분이겠지. 빨리 음식이 나와 지루한 공방을 끝냈으면 했다.

 “아줌마 여기 음식 언제 나옵니까?”

 난 주방을 향해 외쳤다. 그랬더니 놈은 뭔가가 생각났는지 벌떡 일어섰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손이 더러워서요.”

 “그러세요.”

 화장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의심스러웠다. 내가 안 보는 곳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놈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갔다. 놈은 소변을 보고 있었다. 괜한 의심을 했다. 나도 따라서 소변을 보려 지퍼를 내렸다. 물줄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놈은 소변을 다 보았는지 옷매무새를 만졌다. 그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놈은 자유롭고 난 소변을 보느라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놈이 마음먹고 날 습격하려면 이만한 장소도 없다. 문만 잠그면 화장실은 밀폐공간이 되어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상대는 오줌을 누느라 손발이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배설을 하다보면 자연히 긴장이 풀어져 방심하게 된다. 고개를 돌리니 놈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서둘러 오줌을 끊으려 했지만 몇 시간 만에 싸는 오줌이라 잘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 끊은 뒤 몸을 돌려 지퍼를 올렸다. 급하게 잠그느라 소변이 바지와 손에 튀고 말았다.

 “뭐가 그리 급하세요? 뒤에서 누가 치기라도 할까 봐요?”

 놈은 피식 웃더니 유유히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친다? 놈은 이미 내가 눈치 챘단 걸 눈치 챈 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눈치 챘다면 지금만큼 좋은 기회도 없는데 왜 날 내버려둔 걸까. 여기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 생각해서? 확실히 식당 주인과 손님을 합하면 목격자가 4~5명은 나올 수 있다. 아니, 아니 그렇다면 애초에 식당은 왜 온 걸까. 만약에 내가 살해당한다면 탐문 수사를 할 게 뻔하고 놈과 내가 같이 있었다는 걸 증언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잡히지 않기 위해선 목격자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헌데 놈은 스스로 목격자를 만들고 있다. 여태까지는 생각없이 살인을 저질렀는데 운 좋게 안 잡힌 걸까? 아니면 잡히고 싶어서 제멋대로 날 뛰는 걸까?

 어쩌면 난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놈은 ‘히치하이커’ 살인마가 아닐 수도 있다. 놈은 실제로 예비 경찰이지만 경찰을 만나는 걸 두려워한 내가 경찰이 아니라고 내 맘대로 상상해버린 거다. 내가 경찰인 것도 아닌데 경찰증을 미리 주는지 안 주는지 어떻게 알까, 소속도 미리 정해져있지 말란 법도 없다. 나야 책을 열심히 읽어 xxx란 수사 기법이 있는 줄 알지만 실제 경찰 시험엔 그런 게 안 나올 수도 있다. 뒤에서 친다는 얘기도 장난삼아 한 것이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놈의 정체가 뭔지 불확실해졌다. 내가 알 수 있는 거라곤 놈이 내 앞에 있으며 놈을 놓아줘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놈이 경찰이라면 잡히지 않기 위해서, 놈이 히치하이커 살인마라면 내 사냥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놈을 죽여야 했다.

 화장실에 간 사이 식사가 나온 모양이다. 놈은 아직 수저를 들지 않았다.

 “먼저 먹지 그랬소?”

 “같이 밥 먹으러 온 건데 혼자서 먹을 수 있나요.”

 말없이 밥과 찌개를 떠먹었다. 놈과 나 사이엔 음식 씹는 소리만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이래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놈을 죽이긴 해야 되지만 놈의 정체가 뭐냐에 따라서 방침을 달라진다. 경찰이라면 적어도 차 안에선 안심할 수 있다. 내 정체를 아직까지 눈치 채지 못했을 확률이 컸고 설령 눈치 챘더라도 차안에서 날 공격해 서로를 위태롭게 하진 않을 거다. 최악의 경우에도 감옥에 갈 뿐이지 죽지는 않는다. 허나 놈이 히치하이커 살인마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언제든 운전 중에 날 습격할 수 있고 놈에게 당하면 죽는다. 놈의 정체를 확실히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 질문을 해보자. 놈의 대답을 잘 판단해보면 놈이 경찰인지 살인마인지 알 수 있다.

 “요즘 세상 참 흉흉하죠? 어서 빨리 살인범이 잡혔으면 좋겠어요.”

 “동감입니다. 악의를 호의로 갚는 인간들은 사라져야죠.”

 “실은 아까 그쪽을 태울까 말까 고민했답니다. 안 좋은 소문을 많이 들어서요. 아닌 거 같긴 하지만 혹시 그쪽이 그거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말을 하며 놈을 슬쩍 쳐다봤다. 놈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대답한다.

 “그거라뇨? 아, 히치하이커 살인마요?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잠깐 의심했던 것뿐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다들 여행을 꺼려하는 시기에 혼자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죠. 저 같아도 의심했을 겁니다.”

 “경찰증이 있잖습니까.”

 내가 왜 놈을 변호해주는 거지? 입장이 뒤바뀌었다.

 “글쎄요. 경찰증정도야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죠. 돈만 있으면 불가능한 게 없는 세상 아닙니까.”

 “설마?”

 “하하하, 농담입니다. 살짝 긴장하신 거 같은데요?”

 “하하하.”

 웃고 있긴 했지만 완전히 당했다. 내가 찌르려던 곳을 먼저 찌를 줄이야. 허나 아직 수는 남아있다.

 “그 연쇄살인범 말입니다. 참 비겁하고 멍청한 놈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담담하게 물었지만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놈은 입으로 가져가려던 숟가락을 슬쩍 내려놓곤 내 얘기에 집중했다.

 “제가 볼 때 놈은 무척이나 폭력적인 인간이지만 용기가 없어요. 누군가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으니 운전자를 기습해 죽이는 거죠. 시체엔 반항한 흔적이 없고 목이 졸린 자국만 있었다지요. 분명히 운전자가 마음을 놓은 틈을 타 뒤통수를 쳤을 겁니다. 겁 많고 소심한 놈이지요. 누군가 정면으로 째려보기만 해도 무서워 오줌이나 질질 쌀 겁니다.”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제 의견은 다릅니다. 놈은 대범하고 머리가 좋습니다. 공공연하게 시체를 버려 자신의 행적을 노출시켰는데도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죠. 비록 무차별하게 범행을 하긴 해도 범행 중이나 범행 후의 행동은 철저히 계산적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 시체를 숨길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시체를 아무데나 버렸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볼 때 놈은 머리가 나쁠 뿐입니다. 여태까지는 운이 좋아서 안 잡혔을 뿐이죠.”

 “어떤 가능성이든 0은 아니니까요.”

 좀 더 놈을 자극할 필요가 있다. 난 평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을 얘기했다.

 “놈은 관심이 필요할 뿐입니다. 시체를 아무데나 버리는 건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봐줬으면 하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지요. 무식하며 정해 살인을 하다니 잘못 자라도 한참 잘못 자랐죠.”

 “나름 설득력 있는 의견이네요. 제 선배 중 하나가 경찰청에서 근무하는데 어떻게 연결해드릴까요? 선배도 흥미로워 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경찰에 말할 정도로 대단한 얘기는 아니니까요.”

 “그래요? 저도 하루 빨리 범인을 잡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한 얘기입니다. 부담스러우시면 할 수 없죠.”

 놈은 숟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침착하고도 태연한 모습이다. 어디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표정, 몸짓, 목소리 모두 얘기를 꺼내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살인범이 아니었나? 이쯤 도발했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정상이다. 허나 놈은 그대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밥을 먹는다. 역시 놈은 경찰이었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놈이 살인범인데도 내 도발을 참은 거라면 놈은 정말 무서운 인간이다. 지극히 냉정하여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 한마디로 괴물이다. 괴물을 보통 인간이 이길 순 없다. 난 기껏해야 초식동물만 잡아온 작은 짐승이다. 진정한 맹수를 만나면 당해낼 수 없다.

 도망갈까? 놈이 밥을 먹는 틈을 타 달아나버리면 놈도 날 따라오진 못한다. 그럼 난 안전해진다. 근데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일까. 잘 생각해보자. 머리가 좋다 해서 싸움에 능한 건 아니다. 실제 싸움은 육체의 능력과 경험, 그리고 순간적인 판단력, 도구, 지형의 유불리에 따라 갈린다. 육체적 능력은 엇비슷하고 사냥터로만 유인해낼 수 있으면 도구와 지형은 내가 앞선다. 지레 겁먹어서 도망갈 필요가 없는 셈이다. 괜한 걱정을 하느라 쓸데없는데 정신을 소비했다.

 무엇보다도 놈을 놓아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난 지금 사람을 찢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놈을 놓아준 뒤 다음 사냥감을 찾을 때까지 내가 제정신이란 보장은 없다. 이미 저녁때다. 오늘 내로 다른 사냥감을 못 찾을 확률이 컸다. 오늘이 지나면 난 맛이 가 버릴 거다. 폭주해서 아무나 죽이다 붙잡힐 바엔 차라리 놈과 정면 승부를 하는 게 낫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선 놈을 유인, 유인해야한다. 놈이 과연 속아 넘어가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놈이 말을 걸어왔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죠?”

 내 정신은 다른 데 가 있었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얼핏 듣기론 계천까지는 차로 30분이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헌데 30분 넘게 차를 타고 온 것 같아서요. 막힌 데도 없었는데요.”

 젠장. 당황하면 안 된다. 대답을, 대답을 생각해 내자.

 “그게 말이죠.”

 막상 입에서 나온 건 얼버무리는 말 뿐이었다.

 “에, 그러니까.”

 잠시 머뭇거리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설픈 대답을 했다.

 “길을 착각했습니다.”

 놈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내 말을 믿는 건가?

 “길이 비슷하다보니 종종 착각을 해서요. 하지만 지름길을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면 다른 길로 가는 것과 비슷하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놈의 눈치를 살폈다.

 “지름길이라니 어떤 길이죠?”

 다행히 내 말이 자연스러웠나 보다.

 “산 속을 지나는 길이라 험하긴 한데 빠르긴 굉장히 빠릅니다.”

 “좋아요. 그럼 그 길로 갑시다.”

 성공이다. 놈은 자기 무덤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놈을 사냥터로 유인하기만 한다면 내 승리는 명백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놈을 옆에 태우고 가려니 긴장 된다. 아직까지도 놈의 정체는 확실치 않다. 놈이 경찰이라면 안심하련만 이래서야 놈이 언제 날 공격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조금만 있으면 끝난다. 잠깐만 참자.

  15분 정도 차를 몰고 가니 산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나왔다. 원래는 입산금지 구역이다.

 “잠시만요.”

 길을 막아선 팻말을 치우곤 안으로 들어갔다. 불법 출입시 벌금 30만원이라 적혀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 20분만 더 가면 된다. 여긴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기에 사냥터로 적합하다. 세 번이나 여기에 왔건만 단 한사람도 만난 적 없다. 차한대만이 가까스로 다닐 정도로 길이 좁아서 산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고선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슬슬 사냥터에 가까워져갔다. 난 길이 오른쪽으로??어가기 힘들었다. 억지로 가려면 갈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골짜기로 차가 떨어진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 다른 한편으론 주위에 잡목이 많아 연장을 숨겨두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다. 이제 사냥을 할 시간이다.

 “차가 이상하군요. 내려서 살펴봐야겠어요.”

 일부러 차가 멈춘 척 능청스럽게 연기한 뒤 차에서 내렸다. 혹시나 따라오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놈은 차에서 기다렸다. 연장은 풀숲에다 숨겨뒀다. 준비해 둔 장갑을 끼고 연장을 꺼냈다. 길이 80cm에 날이 바짝 선 도끼와 60cm에 7kg무게의 쇳덩어리가 달린 망치였다. 조금만 있으면 쇳덩어리를 놈의 정수리에 박아줄 수 있다.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통쾌하다.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기에 부피가 작은 물건 하나 둘 정도는 넣어도 티가 안 난다. 망치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차로 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놈의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들켰군. 이젠 상관없지만.”

 난 나직이 내뱉었다.

 “그걸 가지고 뭘 할 생각입니까?”

 “보면 모르나?”

 도끼를 놈을 향해 슬쩍 들어올렸다. 놈과 나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다.

 “움직이지 마십쇼.”

 허나 나로선 놈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놈은 빈손이고 난 무기를 갖고 있다. 차가 길을 막고 있어 도망가기도 어려운데다 돌이 바닥 여기저기에 박.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넌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역시 당신이 히치하이커 살인마였군요.”

 “뭐? 그랬나? 네가 아니었군.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넌 죽을 테니까.”

 놈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헌데 놈은 도망가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저항을 하는 게 정상인데 놈은 마치 내가 죽여주길 원하는 것 마냥 가만히 있다. 나로서도 저항하지 않는 쪽이 편하지만 그건 좀 심심하지 않은가. 한 걸음, 한 걸음. 또 다시 한 걸음......... 찰칵. 어?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렸다.

 놈은 어느새 ㄱ자 물체를 들고 있었다.

 “총!”

 “그렇습니다.”

 “예비 경찰이 총을 받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가짜야.”

 “전 진짜 경찰입니다. 예비 경찰이라고 한 건 거짓말이었어요.”

 시팔, 그랬나.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생각했어. 총만 없었어도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텐데.

 “언제부터 날 의심했지?”

 “처음부터는 아니었어요. 경찰증을 보고 지나치게 놀란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못 보던 반응은 아니었거든요.”

 “나 말고도 화들짝 놀란 사람이 있었나보군.”

 “그럼요, 사람들은 경찰에 대해 맹목적인 환상을 갖고 있거든요.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한 건 식당에서에요. 제 눈을 계속 볼 필요도 없는데 억지로 뚫어져라 쳐다보는데다 화장실에선 오줌을 싸다가 급하게 지퍼를 올리더군요. 무언가 캥기는 게 있는 사람의 행동이었어요. 이상하단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당신이 엉뚱한 데로 가자고 제안하더군요. 그때 확신했죠.”

 

 결국 내 무덤을 내가 판 셈이로군.

 “운이 좋았습니다. 잠복 수사 중이긴 했지만 정말로 히치하이커 살인마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으니까요. 예상과 달리 트럭을 얻어 타는 게 아니라 직접 몰고 다닌다는 게 의외지만.”

“날 잡아들일 증거가 없을 텐데.”

 놈이 오해하고 있는 걸 굳이 고쳐줄 필요는 없다. 적어도 내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 의심받고 있는 게 아니니 빠져나갈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대로가 오히려 좋았다.

 “아뇨. 당신은 없앴다고 생각했겠지만 증거는 항상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정 안 되더라도 절 살해하려한 혐의만은 적용할 수 있겠죠. 납치에 살인미수. 족히 10년은 살 겁니다.”

 10년. 이것도 히치하이커 살인마의 죄를 뒤집어쓰지 않을 때의 얘기다. 최상의 경우라도 10년은 썩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영원히 감옥에서 썩어야한다. 너무 길다. 지나치게 길다. 나갈 때쯤엔 폭삭 늙어버린 후겠지. 나갈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고.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놈을 죽이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놈은 총을 들고 있다. 한 발만 맞더라도 승산이 없어진다. 총을 무시하고 달려가기엔 너무 먼 거리다.

 “총은 진짠가? 네 총이 진짜인 걸 어떻게 믿지?”

 “시험해 보고 싶습니까? 하지만 손해를 보는 건 당신입니다. 반항하는 범인을 총으로 쏴 죽였다. 흔한 얘기죠.”

 젠장, 놈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총이 가짜여도 놈이 불리할 건 없고 총이 진짜면 난 끝장이다. 운이 좋아서 총을 맞고 살아나더라도 체포되는 건 피할 수 없겠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머리를 굴려보자. 아 씨발 흥분하니 머리가 안 돌아간다. 방법을 찾아보자. 무슨 수가 분명히 있을 거다. 이대로 항복해버렸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손에 있는 건 바닥에 내려놓고 손들어. 양 손이 잘 보이도록.”

 망설였다. 무기를 놓는 순간 이길 가능성은 0%가 된다.

 “빨리 안 해?”

 계속 내가 가만히 있자 놈이 재촉했다. 당황해선 안 되는데 머리가 어지럽다. 손발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한다.

 “셋 샐 때까지 안 버리면 쏟다.”

 결정해야 한다. 빨리.

 “하나.”

 빌어먹을 새끼.

 “둘.”

 항복할까. 썅. 안 돼. 항복만은 안 돼.

 “둘 반.”

 어? 이상하다. 셋을 바로 세지 않는 이유가 뭐지?

 “둘 반에 반.”

 설마? 그래. 이제 알았다. 놈은 총을 쏠 수 없는 거다. 총을 쓸 수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쐈겠지. 하다못해 하늘에다가만 쏴도 날 겁주기엔 충분할 테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지. 총이 가짜기 때문! 푸하하. 웃음이 나올 거 같다. 한바탕 놈을 비웃어 주고 싶지만 아직은 위험하다. 모든 건 내 추측일 뿐이니까.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정도 승산이라면 한 번 도박을 해볼 만하지.

 “나도 목숨을 뺏고 싶긴 않다. 당장 무기를 버려.”

 “네 놈은 수작은 다 눈치 챘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눈빛이 좀 전보다 날카로워져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듯한 기분이다. 놈은 날 향해 총을 겨누었다. 가짜란 걸 알고 있긴 하지만 몸이 떨린다. 진정하자. 진정해. 쫄 필요 없다. 하지만 놈이 입을 열며

 “셋.”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바닥으로 굴렸다.

 “탕!”

 총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놈의 총은 진짜였다. 총신에서 연기가 새어나온다. 총격을 듣고 나니 몸이 얼어 움직일 수 없었다. 급하게 피하느라 들고 있던 도끼도 던져버렸고 온 몸은 흙투성이가 돼버렸다.

 “이제 알겠지? 이만 순순히 투항해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공할 무기의 위력을 직접 보고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막상 잡힌다고 생각하니 죽을 맛이다. 사냥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감옥에서 썩고 또 썩어야한다.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고문이었다. 내게도 총이 있었다면 쉽사리 당하진 않았을 텐데. 순수하게 겨뤘다면 절대 놈에게 지지 않았다. 제기랄. 이대로 끝인가? 침착하게 잘 생각해보자. 어느 때보다도 냉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 기회는 있다.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총을 당해낼 방법은 없다. 하지만 거리가 가깝다면? 아주 작은 확률이긴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다.

 “일단 뒤돌아. 손 든 채로.”

 놈은 내게 망치가 있단 사실은 모른다. 도끼는 이미 버렸으니 내게 다른 무기가 있단 생각은 못하겠지. 놈이 수갑을 채우려 다가오는 때가 마지막 기회다. 한 팔에 수갑을 채우는 순간만큼은 놈이 무얼 하고 놈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거리도 가까우니 놈을 공격하기도 용이하다. 일단 팔꿈치로 가격한 뒤 재빨리 망치를 꺼내 친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단 몇 초 만에 앞으로 내 인생이 결정된다. 이대로 붙잡혀 개같이 감옥에서 사느니 최후의 도박을 해보자. 재수 없으면 죽겠지만 감옥에서 썩는 것보단 낫다. 

 놈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비록 볼 순 없지만 놈이 어디쯤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놈의 손이 내 팔에 닿는 순간이 공격할 시점이다. 심장이 벌컥벌컥 뛴다. 하아, 하아. 사냥을 할 때보다 몇 십 배는 긴장이 된다. 떨리긴 하지만 스릴이 넘친다. 이게 바로 아드레날린인가? 놈이 거의 다 온 거 같다. 좋아. 어서 내 팔에 수갑을 채워다오. 널 끝장내 주마.

 “컥!”

 숨이 막힌다. 이게 뭐지?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무언가 내 목을 강하게 조른다. 어지럽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 너는…….”

 “그래, 네가 생각한 대로야.”

 목에 감긴 무언가를 풀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더 강하게 죄어올 뿐이다. 살려 달라 애원하고 싶었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긴 내가 사냥터로 정한 데였거든. 산 입구에 들어섰을 때부터 눈치 챘지. 놀랐나? 나라고 매번 같은 방법만 쓰란 법은 없지.”

 바지 주머니에 장도리를 넣어둔 게 생각났다. 손을 뻗어 장도리를 꺼내려했다. 허나 그것마저도 저지당했다.

 “그럼 잘 가게, 친구. 다른 데서 만났으면 우린 좋은 협력자가 됐을 지도 몰라.”

 눈앞이 캄캄하다. 발버둥 치며 목을 조르고 있는 무언가를 풀려했지만 소용없다. 의식이 흐려진다. 죽어가면서 난 깨달았다. 놈은 경찰도 살인범도 아니었다. 둘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