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을 읽고 큰 감명을 받긴 했지만

막상 표현하자니 애매한 소설이 때때로 있다.

적당히 좋은 소설을 읽었을 때보단

훌륭한 작품을 읽었을 때 그런 경우가 더 많다.

너무 뛰어나고도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보니

어설프게나마 글로 적자니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나타내주지 못하는 거 같아 찜찜하다,

그렇다고 나 혼자만 읽고 넘어가자니

훌륭한 작품을 나만 읽는 게 아쉽기도 하고

그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격렬한 감정이 잊혀질까  두렵기도 해

감상을 적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만 보내게 된다.

차라리 이럴 땐 그냥 ’읽어 봐라.’라고 짧게 말하는 게

수천 자의 말로 포장하는 것보다 낫다.

그래도 리뷰니 몇 자 적어보자면
감히 완벽하다는 말을 쓸 수 있는 소설 이다.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심리 스릴러라고 할까. 

담담하면서도 절제된 문체가 깊은 여운을 준다.

쉬이 읽히면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은 흔치 않은데

<편집된 죽음>은 예외다. 

고작 200p 밖에 안 되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줄거리를 간략히 말하자면 

’한 편집업자가 어떤 소설가에게 복수를 한다.’정도가 되겠다. 

자칫 흔해보일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독특한 복수 방법과 
매력적인 화자가 소설을 풍성하게 만든다. 

얇은 책치고 비싼 게 짜증났던 거 빼곤 무척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누구에게든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다.

벌써 4번째 공포 문학 단편선이 나오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처음 1편을 낼때만 해도 얼마나 팔릴지 의문이었던 단편집인데 이제는 4편이 나올 정도로 성장했다. 그만큼 공포 소설을 원하던 독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번 단편집은 썩 수준 높은 편은 아니나 격이 떨어지는 작품은 없다. 읽었을 때 웬만큼 재미를 보장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게 이번 단편집의 장점 중 하나다. 문제는 인상 깊은 작품이 없다는 건데 그래도 두 편 정도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첫 출근>은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이다. 초반부터 독자를 확 잡아끌고 속도감도 상당하다. 독특하면서도 암담한 현실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이 점이 좋았다. 쓸데없는 데 지면을 낭비하지 않으며 하나의 이야기에만 집중을 한다. 결말까지도 힘 있게 이끌어나간 좋은 작품이다.  

 <도둑놈의갈고리>은 특별한 이야기는 아닌데 화자의 말투가 매력적이었다.  

 <플루토의 후예>는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한 작가답게 글은 안정적이고 읽? 단지 암시하는 선에서 끝내서 빈약하게 느껴진다. 결말에 힘을 좀 더 주었으면 좋았으리라 본다.  

 <폭주> - 세기말, 정신나간 중딩들의 폭주  

 <불귀(不歸> -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결말이다. 급작스런 시어머니의 변신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 - 설정도 매력적이고 이야기도 충실하다. 공포소설의 정석에 가까운 글이다. 한마디로 재미있다.  

 <더블(Double)> - 뻔하다. 뻔해.  

 <배심원> - <첫 출근>과 함께 이번 단편집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인터넷 마녀사냥이라는 사회 문제를 뛰어난 필치로 그려내었다. 읽고 나서 독자를 한번쯤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글이다. 문제의식이 함유된 탁월한 작품이다.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 - 좀비물은 흔하지 않나? 결말도 억지 감동을 자아내려는 것 같아 진부했다.  

 <배수관은 알고 있다> - 소재가 특이한 편이다. 배수관을 통해 이웃집의 다툼을 듣는다. 그걸 듣고 주인공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글에서 눈에 띄는 점은 주인공의 심리 묘사다. 심리 묘사만큼은 단편집에 수록된 10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낫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다보면 주인공의 고독과 쓸쓸함을 절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 소설을 쓰는 건 사기야. 경험이 밑바탕 되지 않은 소설은 허황된 말장난에 불과하지.”

  내 친구 소설가 박 모가 입버릇처럼 중얼대던 말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묻고는 했다.

 

 “그럼 자네는? 자네는 어떻게 소설을 쓰길래 그런 얘기를 하나?”

 

 내가 냉소적으로 대답하는 건 당연했다. 그가 주로 쓰는 소설은 범죄를 다루는 추리 소설이었지만 그는 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작은 쓰레기도 아무데나 버리지 않았고 사소한 교통법규조차 어기지 않았다.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않는 주장을 누가 받아들일까. 하지만 그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글쎄.......”

 대신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으며 저 먼 하늘만 계속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의 의미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알 수 없었고 종내는 할 말이 없어서 어물쩡 넘어가려는 속셈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내 추측이 틀렸음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세달 전 박 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그의 병명은 급성 **** 였다. 나는 그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그의 부모조차 그가 병을 앓았다는 걸 몰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망 없음을 알게 되자 억지로 병마와 싸우며 지지부진하게 생명을 연장시키기보다는 남은 삶이나마 즐겁게 살다가려 했던 것 같다. 허나 전혀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던 만큼 남겨진 사람들의 충격은 컸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며 술 마시던 친구가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술로 지새우던 나를 세상으로 돌려보낸 건 내게 전해진 한 권의 공책이었다. 그건 박 모가 직접 쓴 공책이었다. 그는 죽기 전 개인 금고에 공책을 보관해 놓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그가 죽은 뒤 소유주가 나로 바뀌어 내게 전달된 것이다. 그의 부모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왜 내가 이 공책을 받게 되었을까? 한 가닥 의문이 떠올랐지만 공책을 보고 나자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차마 부모님에겐 이 공책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공책엔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박 모의 필체로 적혀있었다.

 -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나? ‘상상만으로 쓰는 소설은 사기다.’ 물론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했던 말이니까. 그럴 때면 자네는 묻곤 했지. 나는 어떠냐고. 나는 어떻기에 그런 소리를 하냐고. 나는 그때마다 대답하고 싶었네. 나는 경험 없이 소설을 쓴 적이 없다. 내 모든 소설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을 게 뻔했네. 자네는 내가 철두철미하게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사실 그건 내가 저지른 더 큰 범죄가 들통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어. 상당수의 살인범들이 살인이 아닌 다른 죄목, 이를 테면 절도, 음주운전, 성폭행 따위로 잡혀왔다가 살인이 드러나게 된다네.

 

 아직까지도 자넨 내 말이 믿어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죽어서까지 장난을 치는 사람은 없다네. 늦게나마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되니 가슴이 다 후련하구먼. 내가 얼마나 이 애기를 하고 싶었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거야. 내가 처음 소설을 쓴 때를 기억하나? 7년 전이었지. 나는 소설을 완성하자마자 자네에게 가져갔네. 다른 덜 친한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보여주기는 부끄러웠지만 십년 넘게 사귀어온 자네라면 공정하게 평가하면서도 내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지. 물론 내 예상은 옳았고 자네의 평가는 큰 도움을 주어 소설을 출판할 수 있었지. -

 새벽 3시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 부탁이 있다며 우리 집으로 달려와 소설을 읽어달라고 했던 일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때 나온 소설이 <빈 집 탐험가>였다. 집도 가족도 없는 한 청년이 궁핍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빈 집 털이를 하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우연히 머무르면서 생긴 일을 다룬 소설이었다. 빈 집에 주인이 돌아오면서 청년과 집주인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두 인물 간의 긴장감이 대단하여 무척 재밌게 읽었었다. 결국 집주인은 도망가려던 청년에게 살해되는데 내심 집주인에게 정이 들었기에 참 안타까웠다.

 - <빈 집전전하며 도둑질을 하는 청년은 바로 나 자신이지. 진정으로 좋은 소설을 쓰려면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은 예전부터 갖고 있었네. 그래서 실천을 한번 해봤어. 오래된 일이라 기억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7년 전 명창동에서 일어난 절도 사건은 모두 내가 저지른 일이라네. 다만 소설 속에선 12건의 절도를 저질렀던 반면 나는 7건만 저질렀지. -

 

 거기까지 읽고 난 즉시 신문 기사를 찾아보았다. 박 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살인을 저질렀단 얘기다. 그가 사람을 죽였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절도는 비교적 흔한 범죄였기에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2시간가량이 지난 후에야 짧막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연이어 일어난 절도사건과 이를 해결 못하는 경찰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더 뒤져봤지만 범인을 잡았단 기사는 찾지 못했다.

 - 소설의 토대가 된 건 마당이 넓은 단독주택이었네. 며칠 간 불이 켜지지 않고 인적이 없어 팔려고 내놓은 집이라 짐작했지. 수많은 집을 관찰해왔기에 내 판단에 나름 자신이 있었거든. 헌데 알고 보니 집주인이 장기간 여행을 떠난 거였어. 나는 달아나고 싶었지만 집주인이 있는 곳을 지나치지 않고는 도망갈 수 없었지. 하는 수 없이 숨어서 며칠을 보내며 기회만 엿봤어. 그러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서 위험을 무릎 쓰고 도망쳤네. 얼굴에 비닐 봉투 한 장만 쓰고서. 다만 소설과는 다르게 집주인을 죽이진 않았어. 단지 집주인이 따라올 수 없도록 강하게 밀치고 달아났을 뿐이네. 그 뒤 집에 돌아와 쓴 게 <빈 집 탐험가>라네. -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안심이 됐다. 절도도 범죄긴 하지만 살인에 비할 건 아니지 않은가.

 

 - 첫 작품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그게 꼭 좋지만은 않았어. 다음 작품도 좋은 성과를 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지. 하루 종일 키보드를 잡고 씨름했지만 소용없었어. 나온 글들은 죄다 쓰레기였지. 현실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데다가 재미마저 없었어. 글을 쓴 나조차 끝까지 읽기 싫은 글을 누가 읽으려 하겠나? 그러다 깨달았네. 저번에 쓴 글이 좋았던 건 경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고 지금 쓴 글들이 개판인 건 경험이 없기 때문이란 걸. 그래서 난 여행을 떠났네. 여행에서 얻는 경험이 글에 도움을 주리란 생각이었어. 내 예상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지. 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책을 또 썼네. 수많은 사람들에게 극찬을 받은 <히치하이커>가 그때 탄생한 거지. -

 5년 전쯤이었다. 박 모는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가 3개월 만에 나타났다. 그는 전국 방방 곳곳을 배낭 여행했다고 했다. 때론 걷고 때론 남의 차를 얻어 타면서.

 - 소백산 언저리를 지날 때였네. 하루 종일 걸어서 지친 나는 읍내까지 갈 힘이 없었어. 서울과는 달리 버스가 잘 다니지도 않았지. 선택지는 정해져있었네. 히치하이킹을 하든가 길바닥에서 자든가 하는 수밖에. 이전엔 차를 얻어 타 본 적이 없어 겁이 나긴 했지만 용기를 내 시도해 보았네. 다섯 대가 날 보고도 그냥 지나쳤어. 분명히 손을 흔들었는데도 모른 척 지나가더군. 당시엔 화가 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은 현명하게 행동한 거였어.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어. 트럭이 하나 다가오더군. 뒤에 화물이라도 실려 있는지 크기가 꽤 컸어. 나는 별 기대 없이 팔을 흔들었어. 이미 5번이나 실망을 맛 본 터라 더 이상 실망할 여지도 없었지. 그런데 트럭이 멈춰 섰어. 나는 재빨리 다가가 말했지.

 

 ‘저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지리를 잘 몰라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하루 종일 걸어서 힘이 없네요. 가까운 읍내까지만 데려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운전사는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였는데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어.

 

 ‘타시오. 시내까지는 안 가지만 근처에 내려줄 테니.’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지. 나는 활짝 웃으며 트럭에 올라탔어. 그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트럭을 몰던 사내만 알 거야.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전형적인 화물트럭인 게 확실했어.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와 피곤할 때 누워 잘 수 있게 개조한 의자가 그 증거였지. 나는 트럭에 타자 물었어. 집으로 가는 중이냐고. 운송 중이면 고속도로로 다니지 산길로는 가지 않을 테니까.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어. 장시간 운전을 해서 피곤하다더군. 원래대로면 4일이 걸릴 일인데 잠을 거른 덕에 이틀로 줄였다면서. 그는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차를 몰았는데 담배 냄새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네. 하지만 얻어 탄 주제에 불평을 할 수는 없었지. 창문이라도 열었으면 좋으련만 에어컨 바람 빠져나간다며 창문도 열지 못하게 했어.

 

  한번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짜증이 밀려왔지. 고마웠던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어. 금방 도착할 줄 알았던 읍내까지 가는 길은 멀기만 했고 시간은 더디게만 갔어.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저 인간만 없다면. 저 인간 대신 내가 운전을 하고 간다면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깜짝 놀랐어. 내 속엔 나 자신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살의가 숨겨져 있었어. 아무 잘못도 없고 오히려 선의를 베풀었던 사람을 단지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죽이다니, 상상 만해도 정말 짜릿하더군.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리는데 직접 실천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 순간 담배는 구실에 불과했단 걸 깨달았어. 나는 그저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던 거야. 그 전까진 갖가지 제약, 이를테면 양심이라든가 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날 막아섰지만 이번엔 달랐어. 충동에 휩쓸린 내겐 거리낄 게 없었지. 게다가 나와 트럭 운전사는 오늘 처음 본 사이니 전혀 접점이 없었어.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날 찾을 수도 없었지. 선의를 배신한 나에게 분노를 터뜨릴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까. 죽어가면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이나 궁금했어.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은 오히려 날 흥분시켰지.

 

 보통은 원한이 있어야만 살인을 할 거야. 하지만 난 달랐어. 죽일 이유가 없는데 오직 죽이기 위해서만 죽인다니 그만큼 비합리적이고도 명확한 살인 동기가 있을까. 순수한 욕구에 의한 살인. 그게 그날 밤 내가 하려는 일의 정체였어.

 자네도 알다시피 평소의 난 매우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어. 하지만 일단 살인 충동에 매료되자 더는 멈출 수가 없었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어. 운전사는 나보다 크고 체격도 좋았어. 집구석에 앉아 소설만 쓰던 내가 감당하긴 벅찼지. 정면으로는 승산이 없었어.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은 정해져 있었지. 난 유인책을 썼네. 볼 일이 정말 급해서 참을 수 없다 했지. 그는 조금만 참으라 했지만 큰길로 나갔다간 목격자가 나올 게 뻔한데 그럴 수야 있나. 결국 그는 차를 세웠네. 나는 일을 보는 척 했고 답답했는지 그도 차에서 나와 담배를 피더군. 난 기회가 왔단 걸 알았네. 풀밭에서 주먹만한 돌덩어리를 하나 주워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네.

 

 그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고개를 돌리려했지만 내 손놀림이 더 빨랐네. 난 연거푸 뒤통수를 내리쳤고 그는 머리통이 박살난 채 쓰러졌어. 비록 체격은 그가 나보다 컸지만 내 행동을 예상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 그의 시체를 보자 비상한 쾌감이 치솟더군.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그가 일찍 죽어서 더 죽일 수 없다는 게 못내 아쉽더군. 그렇다고 시체를 때리진 않았어. 이미 죽인 고깃덩이를 치는 것과 살아있는 사람을 치는 느낌은 분명히 다르거든. 단지 다음엔 천천히 죽이자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내 성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발딱 서있었고 사그라들 줄을 몰랐어. 난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자위를 했다네. 흥분이 절정에 다다랐을 쯤에야 깨달았지. 내 정액이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걸. 여기서마저 끝내버리고 싶은 욕망과 잠깐만 참자고 이따가 해결하자는 이성이 격렬하게 싸웠네. 결국엔 이성이 이겼네. 다음번엔 비닐봉지라도 준비를 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바지를 올렸지.

  비록 흥분은 했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어. 조금 진정이 되자 시체가 눈에 들어오더군. 마음 같아선 시체를 놔두고 싶었지만 빨리 시체가 발견된다면 누군가 수상한 여행자(나)를 보았다고 신고할 지도 몰라. 살인을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시체는걸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나를 의심할 이유는 없네. 시체가 늦게 발견되게 한다면 내가 잡힐 이유는 하나도 없는 셈이지. 다행히 트럭에 삽이 하나 있었네. 나는 트럭에 왜 삽이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지. 혹시 저 사람은 히치하이커만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살인마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 소설 <히치하이커>의 영감을 얻게 된 거네. -

 <히치하이커>는 히치하이커만 노리는 연쇄 살인마가 우연히 또 다른 살인마를 차에 태우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살인마 간의 심리 대결과 잔혹한 살해 장면,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어우러져 나는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도 좋아한 작품이었다. 소설은 물론 영화로도 크게 히트를 했다. 그런데 그게 실제 살인을 바탕으로 쓰였다니 나는 도저히 박 모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시체를 묻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어.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다행이었지 까딱하면 도중에 잡힐 뻔 했어. 그때 나는 계획되지 않은 살인을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네. 한바탕 삽질을 하고 나니 온 몸에서 땀이 났지만 에어컨을 쐴 수도 없었어. 땀이 차에 묻을까 두려웠거든. 땀까지 말리고 나니 새벽 네 시가 다됐더군. 나는 차를 몰아 읍내 골목에 차를 버린 뒤 다음 읍내까지 걸어갔네. 시체가 발견되면 여기부터 조사할 게 뻔한 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지. 쓰러질 거 같았지만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자위를 했네. 이대로 잠들었다간 짜릿한 느낌을 모조리 잊어버릴 것만 같았거든. 그 다음은 자네가 아는 대로네. 나는 서울로 돌아와 소설을 썼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글이 나왔고 당당히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지.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oo 일보에 난 2002년 7월 7일 자 신문, 2003년 5월 26일 자 신문, 2003년 8월 15일 자 신문을 찾아보게나. -

  

 가장 빠른 날짜의 신문은 연 이은 트럭 운전사들의 실종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03년 5월 자 신문은 실종된 운전수가 시체로 발견됐으며 다른 운전사들도 살해됐을 거란 내용이었다. 마지막 신문은 경찰의 거듭된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찾을 수 없다고 경찰의 무기력함을 비판했다. 박 모가 말한 살인 사건은 실존했다. 나는 박 모가 종종 사라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몰랐다면 좋았을만한 이유였다.

 - 경험이 밑바탕이 된 소설이야말로 제대로 된 소설이란 걸 난 절실히 깨우쳤네. 영감이 떨어질 때면 나는 범죄를 저질렀네. 각각의 범죄마다 색다른 맛이 있었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살인이 최고의 쾌락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도 않아. 매일 같이 샥스핀을 먹어봐야 맛이 있겠나. 시일을 두고 다른 음식을 맛 본 뒤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법이지. 살인이 물려갈 때쯤 내가 저지른 건 방화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모습과 활활 타오르는 건물을 지켜보고 있으니 창작욕이 끓어오르더군. -

 나는 거기까지 읽고 공책을 덮었다. 친구가 행한 잔혹한 범죄 행각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허나 계속해서 내용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그만큼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나는 이 공책을 세상에 공개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친구의 범죄 사실을 숨겨줄 건가 아니면 세상에 미결 사건들의 진실을 알릴 건가. 우정과 양심의 대결이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박 모는 분명히 내가 공개하지 않을 거라 믿고 내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범죄 사실을 숨기는 건 죄악이다. 누군가 박 모가 저지른 죄 때문에 억울하게 잡혀 들어갈 지도 모르며 이미 잡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누구와 상의를 할 수도 없었기에 내 가슴은 하루하루 타들어갔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이 모든 사실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나는 공책에 적힌 내용이 진실임을 증명해줄 신문과 자료들을 찾았다. 그리곤 그것들과 공책을 한데 묶어서 출판했다. 내 예상대로 책은 출판되자마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유명 추리 소설가의 숨겨진 얼굴. 그의 잔혹한 범죄사. 연일 언론들은 박 모를 언급했고 그를 비난했다. 내게도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나는 끝끝내 거절했다. 사람들은 나를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포장해주었다. 간혹 우정을 배신했다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옳았으니까. 나도 적게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죽은 자를 벌할 수는 없었으나 미결 사건들은 해결되었다. 그 많은 사건들을 놓친 경찰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잠깐 나왔으나 흉악한 범죄자가 사라졌단 안도감이 더 컸다. 사람들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세상은 예전보다 평화로워졌다. 박 모의 책은 내 책이 나온 이후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실제 범죄자가 쓴 책이 어떤 건지 궁금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책을 읽어봤기 때문도 아니다. 난 공책의 마지막 장을 일부러 빼버렸다.

 - 여기까지 읽은 소감이 어떤가. 내 자네가 나를 비난할 때마다 직접 경험하고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생각하곤 했지. 하지만 그러기엔 용기도 없고 죄를 짓는다니 양심이 찔려서 말이야. 하는 수없이 대안으로 생각해 낸 게 현실의 사건을 바탕으로 쓰는 거였네. 대게는 미제 사건이었지. 해결된 사건을 바탕으로 쓰려니 상상력에 지장을 줘서 말이야.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쓴 덕에 이렇게 소설을 하나 더 쓸 수 있었으니 참 좋았네. 재밌게 읽었나? 궁금하지만 알 수 없으니 답답하구먼. 내 죽기 전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게나. 아, 그리고 이 공책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자네만 간직해 주게나. 혹시라도 사람들이 날 범죄자로 착각하면 큰일이지 않나. 하하하. -

 나는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도 그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몰랐다. 모든 게 소설이었다는 걸 깨달은 난 정신이 멍했다. 그??으로만 만나왔고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친구인 나조차도 속을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잘 속지 않을까.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나는 큰돈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그의 결백을 밝혀줄 유일한 단서는 태워버렸다. 그는 내 덕분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경험한 것만을 쓴 소설가가 되었다.

 언젠가 내가 한 거짓말이 들통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누가 알까. 이미 둘은 완전히 섞여 분간할 수 없게 돼버렸는데. 기실 지금에 와선 나조차도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다. 정말로 마지막 장이 존재하긴 했던 걸까. 절친했던 친구가 범죄자였단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내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는 아닐까. 나는 묻고 싶지만 이제는 물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