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줄거리를 봤을때는 재밌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 이유만으로도 이 책을 볼 이유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냥 재미만 있다고 하기엔 아쉬운 책이라는게 읽고 난 후의 소감이다. 자연스럽게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 벨린다 스탈링. 처음듣는 이름이었다. 의외로 벨린다 스탈링은 전문 작가라기보다 음악가였다. 가수 겸 작사가였고 남편 역시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자신의 첫번째 앨범을 작업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좀 놀라웠다. 내가 음악가는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앨범 작업을 하면서 소설을 쓴다는게 가능한 일일까. 하나에 집중하기에도 많은 정신력을 쏟아야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거기다 이 책은 그녀의 첫 소설이었다. 두번째 작품을 구상중에 사망했기때문에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너무 짧은 인생이었지만 몇줄의 이력이나 소개글만으로도 벨린다 스탈링은 인상적인 사람으로 남았다.

​

  지금 우리 세상은 그 어느때보다 여성인권운동으로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건 너무 당연한 흐름이다. 사람이 갖는 비합리적인 차별은 신체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에게도 철저하게 적용되어 왔다. 오래전부터 이에 대한 목소리가 있었고 이어져왔다. 이 책도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잘 보여준다. 주인공 도라는 남편이 아파서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되자 살아남기위해 생업에 뛰어든다. 지금이라면 그리 이상할 것 없지만 19세기엔 매우 애석하고 눈총받을 일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데다 거액의 빚까지 떠안은 상태에서도 도라의 남편은 그런 생각을 당당하게 아내에게 주장할 정도이다. 그지경에도 어떻게 저런소리를 내뱉을까 그 마음상태가 궁금할 지경이다. 그리고 그런 근거없는 믿음과 사회적 통념은 한 집안에서의 남녀역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병약한 딸을 위해서도 도저히 제본소 일을 놓을 수 없는 도라는 대미지 제본소를 이끌며 돈을 벌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상황을 마주하고 한층 다양해진 모순과 차별을 경험한다.

​

  두툼한 책에서 짐작하듯 많은 이야기를 담고있는데 남편이 주저앉고 자신이 나서면서 마주한 세계가 가정주부로 살던때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도라는 가정교사였던 어머니와 제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사이에서 자랐기때문에 책을 아주 좋아했다. 이제 자신이 책을 만들어야하는 입장이 되면서 아주 잠잠하게 가라앉혀 놓았던 독서열과 지적 탐구심은 활활 타오른다. 비록 알고싶은것만 골라서 읽을 처지는 아니지만 일을 놓을 수 없는 도라에게 선택권은 없다. 그저 흡수할 뿐이다. 새로운 상황 못지않게 새로운 인물과의 만남도 영향이 커보인다. 바로 흑인노예인 딘의 등장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 자체로 현명한 사람이다. 비록 자유롭지 못하지만 돈을 버는 여성인 도라에게 언제나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대한다. 두사람의 많은 대화는 지금 봐도 마냥 옛날의 것으로 단정지을수만은 없는 것이어서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세상으로 나온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넓어지는데 단지 여자이기때문에 집안에 가둬놓고 그 가치를 집안일과 가족 뒷바라지에 한정짓는게 말이 되나.

​

  소재만 보면 페미니즘의 향기가 보이는듯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인권이야기가 담겨있다. 덕분에 내용이 다소 장황한 느낌도 없지않다. 딘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따로 떼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힘이 좀 약해진 기분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다. 분명 재미있는 책이고 19세기의 영국이 어땠는지 그림으로 그려질만큼 세세한 묘사가 곳곳에서 돋보였다. 전혀 다른 문화권에 있는 내게도 그렇게 와닿을만큼 서술하는게 쉬운일은 아닐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작가가 정말 신경을 많이 썼을거라 짐작하게 된다. 낯설고 어렵기보다 영화를 보듯 머릿속에서 그려가며 집중해서 읽을 수 있게 만든 작가의 힘이 참 감사하다. 그녀가 더 오래살아 더 많은 책을 썼다면 어땠을까 뒤늦게 아쉬워졌다.

  위즈덤하우스에서 비주얼 클래식이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출간하고있다. 이 책은 두번째 책인데 이전 첫 책으로 데미안이 나왔을때보다 더욱 눈길을 끌고있어 비주얼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더없이 적절하게 보였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기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고전을 친숙한 그림체로 새롭게 표현한 책이어서 아이디어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어질 책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있던데 이러다 이 시리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책의 표지에 있는 남자가 도리언 그레이이다. 그 존재만으로 유명 화가였던 바질의 혼을 쏙 빼놓은 남자이고 자신의 초상화에 스스로가 홀딱 취해버린 주인공이다. 그는 화가를 찾아간 자리에서 헨리경을 만나고 그의 언변에 빠져든다. 몹시도 유쾌하고 지성을 빛내며 고귀한척 하지만 그의 말은 내게 그저 궤변이다. 하지만 아직 젊고 어리석으며 순수했던 그레이에게는 달랐다. 바질은 헨리가 그레이를 만나길 원하지 않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레이는 헨리경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레이는 바질의 모델이고 헨리는 바질의 친구이다. 안만날 수가 없었고 누구에게도 공개하거나 줄 마음이 없었던 초상화는 그 모델인 그레이의 손에 들어온다. 자신의 초상화를 통해 자기 외모의 아름다움을 알게된 그레이는 앞으로 늙어가면서 그 미모를 잃을것을 두려워해 자기대신 초상화가 늙어가길 기도한다. 신기하게도 그 기도는 이루어졌고 그레이는 초상화가 변해가는것을 보게된다. 그림은 단순히 늙기만 하는게 아니어서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을 반영했다.

 

  아무리 자기 혼자 보는 그림이라고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신을 못차릴 수 있을까. 옆에서 오랜시간 부지런히 그레이에게 헛소리를 불어넣은 헨리의 탓일까. 무엇을 소신과 가치관으로 삼아야할지 판단하지 못하는 그레이의 아둔한 지성을 탓해야할까. 초상화를 보며 했던 다짐들을 전혀 지키지 못하고 점점 추하고 악하게 변해간 그의 의지력 부실을 탓해야할까. 하나의 이유를 찾아내는게 무의미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반할만큼 아름다웠던 내 모습의 초상화가 추악하게 변해가는것만큼 괴로운 징벌이 얼마나 더 있을까. 내가 나를 속일 수 없는데 괴롭지 않을 수가 있나. 아무리 괴로워도 필사적으로 되돌릴 노력을 하게될것같은데.

 

  책의 앞에 간략히 자리한 서문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간결하고 분명하게 자기의 뜻을 적었다. 그 안에서 세가지 단어를 추려봤다. 아름다움, 도덕, 예술. 내가 아직 그의 의견에 뭐라고 한마디를 더할 깜냥은 못된다. 지식은 물론 살아온 경험도 부족하고 나름대로의 가치 정립도 안됐다. 특히 예술은 도저히 뭐라고 힘있게 말할 수 있는게 없다. 방송에서 일본과 합작으로 기획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봤다. 아이돌이라는 존재와 문화가 양국에서 너무도 달랐다. 같은 아이돌이라 불러도 실체는 더이상 같지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자국에서의 아이돌에게는 팬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역량이 중요시 된다는 말을 하는데 바로 대꾸하고 싶었다. 그럼 가수는 왜 하는데? 한편의 공연 속 이야기에 몰입하고 집중해 관객들이 어디서도 풀지 못한 마음을 풀어내고 털어낼 수 있도록 잘 표현해내는 사람이 예술가 아닌가. 조금 더 나누어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연기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등등이 아니었던가. 이런 대꾸를 하는 사이 오스카 와이들가 쓴 서문이 떠올랐다. 그가 예술과 도덕성은 아무련 관련이 없다고 했던 말을 조금은 알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은 작가처럼 속시원하게 견해를 확고히 할 수 없지만 언제라도 꼭 한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도 이 책을 읽게됐다. 제목만 알고있던 그 유명한 책을. 그냥 그 자체부터가 기쁘고 반가웠다. 너무 유명해서 못봤어도 읽어본듯한 착각이 들기까지 하는 책들이 있다. 특히 동화나 고전에 그런책이 많은데 이 책은 그런 부류가 아닌데도 상황은 같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조차 기억이 안나는데도 제목만큼은 알고있다는건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는 뜻일테니 말이다. 이런책을 못봤다는걸 의식하면 새삼 조바심이 난다. 그리고 이제 읽게되어 다행이다 싶어진다.

 

  이 책은 오래전에 출간됐던 책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의 변화를 거쳐 몇번이나 재출간됐다. 작가 자신도 변해버린 자신에 맞춰 뺄것은 빼고 더할것은 더해 변한 책을 다시 출간할 수 있다는 점을 기뻐한다. 가능하다면 시간이 흐른 후 또다시 그때의 자신에 맞게 수정한 책으로 재출간하고 싶다고 한다. 애초에 학부모들의 요청으로 책이 되어 나온 책이다. 의도적으로 책으로 만들기위해 쓰여진 글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량도 많아지고 책이라는 형태로 나오면서 작가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담지 않을 수 없어졌다. 이것을 늙어가는 자신에 맞춰 계속 출간하고 싶다는건 무슨 마음일까. 어느정도의 애정이 있어야 할까. 욕심도 많고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거의 명언집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그정도로 유명하고 오래된 책이니까. 그런데 읽다보니 기대보다 훨씬 가벼운 내용들이 이어졌다. 내게 그런일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의 이야기들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유명해졌을까 조금 궁금해졌다. 우화집이라고 해야할까 어떤 면에서도 그도 안되는것같다. 삶의 지혜는 대단한데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 생활과 삶 곳곳에 흔하게 널려있다는 가르침을 상기한다면 이정도의 일화와 가벼움이 딱 맞다. 그 자체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고 모두가 잊지 말아야할 진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이 모두 지혜롭고 진리인것은 아니다.

 

  그저 평범하고 부족한 한 사람이 살면서 겪고 느끼고 깨우친 것들이 조각조각 담겨있지만 그것이 모두 동의 가능한것은 아니었고 애초에 전제하는 가치관과 생각이 전혀 다름을 느낀부분도 있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고집스러움도 엿보였다. 그저 로버트 풀검이라는 남자가 살아온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빚어진 가치관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책에 대한 정보가 없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탓에 만족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그것만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