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들은건 시간이 좀 됐지만 여전히 잘은 모른다. 우리 문화권의 내용이라면 조금은 더 접하기가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해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지식은 어디선가 스치듯 들은 이름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가볍게 넘기기엔 생각보다 쉽게 메디치라는 성이 보인다. 역사에서, 종교에서, 미술과 같은 예술이나 인물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곤 한다. 그만큼 대단한 집안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서야 나오나 싶은 느낌도 있지만 이제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싶어지는 책이다. 메디치 가문의 수많은 사람중에 업적이 뛰어나거나 의미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이나 이야기는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문 전체를 조명하는 책은 이제껏 못봤다. 이 책은 그래서 쓰여지기도 했다. 이 가문의 어느 누구가 아니라 가문 자체를 중심에 두고 일원과 가문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들을 후원했던 가문이며 당시 유럽의 정치, 종교, 경제, 문화 및 예술등 다양한 분야에 관여하고 이름을 남긴 가문이다. 그런 가문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시각으로 메디치 가문 13세대의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알고있던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쓰였다고는 하지만 1910년 미국 출신의 작가가 쓴 이 글의 문장까지 쉽지는 않다. 아마 다른 전문분야의 책이었다면 기겁을 했을것 같다. 가문 전체를 다루고 있어 분량도 엄청나다. 하지만 역사이고 유명한 이야기이며 선망을 담은 관심대상이어서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재력을 먼저 일으키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도 발을 디디며 결국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집안의 이야기는 아무리 딱딱하게 쓰여도 읽을 수 밖에 없다. 몰랐던 사람들, 몰랐던 내막, 이제 겨우 이해되는 당시의 상황등 메디치 가문을 이해한다는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와닿았기때문에 재미와는 담쌓은 문장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나는 읽는동안 이 가문의 전체 그림을 상상하고 감탄이 늘어갈수록 자꾸만 경주 최부자 집안이 생각났다. 물론 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차이점도 여러가지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이 인정받게 한 요인중의 일부는 공통되기도 했다. 시민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편에 설줄 알았고 집안의 부를 기꺼이 나누었다는 점이다. 두 집안의 마지막도 모든 재산을 사회와 시민을 위해 써버렸다는점은 참 비슷하다. 최씨 집안의 경우는 좀 마음아프지만.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보니 만일 최씨집안이 정치에도 관여했다면 우리 역사가 또 어떠했을까 상상해보게됐다. 한동안은 이 집안들 생각에 빠져지낼것 같다.

  정민 작가라는 이름을 보고 바로 보고싶어진 책이다. 한자를 잘 모르지만 알고는 싶은 마음이 있어 어떻게 하면 한자를 조금 더 재미있게 익힐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떠오른것이 한시였다. 중학생일때 국사선생님께서 대학생이던 시절 한자만 가득한 책을 몇달이고 붙잡으며 해석하다보니 눈이 조금 트였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기억이 힌트가 됐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건 여기까지였다. 현실적으로 한시를 한자공부를 위한 교재로 삼기엔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다 한시를 쉽게 풀어쓴 책을 보게됐고 그 책 한권으로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가끔 돌에 무언가 새겨진걸 보기도 하지만 정식으로 그런 글이 책으로까지 나올줄은 몰랐다. 제목만 보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작가가 남긴 글을 보니 간단하게 보이는 이 책도 쉽게 나온건 아니라는걸 알았다. 여기 실린 글은 <학산당인보>라는 책의 내용인데 명나라 말엽 장호라는 사람이 옛글에서 좋은 글귀를 추려 당대의 대표적인 전각가들에게 새기게 해서 엮었다고 한다. 이덕무는 글귀에 매력을 느껴 풀이글을 따로 베껴 소책자로 만든 후 박제가에게 서문을 부탁했고 정민 작가는 이 글이 흥미로워 자신도 여백에 조금씩 메모를 남겼는데 그것이 모여 지금 내 손에 있는 책이 되었다.

  언뜻 보기에 책은 매우 단조롭게 구성되어있다. 돌에 새겨진 문양이 있고 다음으로 원래의 글이 있다. 이 한자를 해석한 글귀가 나오고 마지막에 좀 더 풀이한듯한 글귀가 있다. 한 줄 정도의 여백을 두고 나누어진 글귀들중에 마지막이 바로 정민 작가가 여백에 메모해두었다던 그 글이다. 처음 책을 훑어볼때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구성을 알고 보니 조금 다른 느낌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알아보기 힘든 새겨진 글귀는 다소 멍하게 보고 해석을 읽은 다음 작가의 메모를 보면서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동의할때는 동의하는대로, 반박하고 싶을때는 반박하는 이유를 적어두고 싶어진 것이다. 이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재미있어 읽는동안 즐거웠다.

  책에 소개된 박제가의 서문을 보면 시작부터 다소 예리하다. 오늘날 총명하지 못한 자는 옛사람의 책을 무덤덤하게 보는것이 문제라며 옛사람은 결코 범상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천하의 기이한 문장인줄을 모른다고 했다. 옛사람의 말이 이 글귀와 다르지 않은것이 없음을 모른다고 했다. 자신이 아무리 말해도 책을 무덤덤하지 않게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것인지 한탄하며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것이 분명하다는 말로 끝맺었다.

  이 서문은 가끔씩 내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너무도 평이하고 뭐라 말할것도 없어보이는 문장을 보고 할말이 없어 잠시 멍하게 있다 다음 글로 넘어가면 반사적으로 박제가의 서문이 떠올랐다. 글을 이런 마음으로 읽을 필요가 없고 좋은 방식도 아니라는걸 알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너무도 좋고 꼭 외우고 다니고 싶은 글귀도 있고 추임새를 들은듯 그냥 기분이 가벼워지는 글귀도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읽는 기쁨이 있었다. 침대 옆에 두고 자기전에 조금씩 읽었는데 참 적절했던것 같다. 좋은 글로 마음을 정리한 후에 잠들 수 있었다. 내년쯤엔 새벽에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미술쪽으로는 타고난 재주가 없어 내심 알기라도 좀 더 잘 알고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때면 그림에 대한 책을 보곤 했었는데 대부분 명화라고 칭송받는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약 5년쯤 전부터 민화에 관심이 생겼다. 어쩌다 민화라는 단어를 접했을 뿐인데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림이 그리 세련되거나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데 눈길이 갔다. 이걸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민화에 관한 책을 탐색하기도 했었다. 제대로 읽은건 이번이 처음인데 왜 그렇게 민화가 눈에 찼는지 조금 짐작이 갔다.

  민화에 관한 두번째 책을 낸 저자는 가장 먼저 민화의 정의에 대해 설명하는데 생소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민화는 서민들의 스토리텔링이 담긴 그림이다. 소재는 빌려왔더라도 표현만큼은 우리의 방식으로 탈바꿈된 지극히 조선다운 그림들이다.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입맛대로 바꾸고 비틀고 풍자하여 그린 그림이기때문에 독자적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그림이 된 것이다. 그런 그림들 속 이야기는 참 다양하지만 누가 보아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바람이 담겨있어서 행복화라고 부르자는 의견도 나왔다던 일화가 흐뭇하게 느껴졌다. 가장 우리답고 자연스러운 그림이라는 설명에서 겨우 알 것 같았다. 다른 명화들을 볼때는 공부하듯 바라봤는데 민화는 화가의 명성이 없는 탓인지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고 봐도 괜찮았다. 법칙이나 예법, 전통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밝음이 의식하기도 전에 와닿았던게 아닐까. 때문에 나는 지금껏 명확한 이유도 모르고 민화를 좋아했던것 같다. 요즘은 다양한 사람들이 민화를 그린다고 한다. 그들은 민화를 그리면서 행복해진다고 말했다는데 이 부분도 이제는 좀 알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제목이 묘하다, 말장난인가 싶었는데 한자를 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백성의 그림은 백성의 이야기다 정도로 풀어야하나. 앞과 뒤의 <화>자의 뜻이 갈린다. 민화의 정의이자 특색을 아주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제목이라는건 분명하다. 책을 읽기전에 그림구경부터 하려고 술술 넘기다가 우리 조상들의 아들염원에 대한 부분을 먼저 읽었었다. 지금은 딸이 더 좋다는 젊은 부부가 늘고있지만 아들 우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 부모님들은 은연중에도 아들부터 챙기는 학습이 되어있어 딸인 나는 몇번이고 불만을 내뱉으며 컸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아들 선호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옛날 그림을 옛것이 아니라 이자리에 없는 지인의 메세지를 접하는듯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때의 민중이나 지금의 민중이나 크게 다르지 않구나, 같은 사람들이구나 라는 실감이 들었다.

  민화가 우리 미술계에서 큰 평가를 못받지만 외국에서는 극찬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나는 미술전공자가 아니어서 박혀져 있는 고정관념도 없다. 전문가의 평가와 무관하게 내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을 되도록 많이 알고싶다는 생각뿐이다. 그저 투박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이 알려진 명작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참 재미있다. 민화의 어떠한 점이 차별화되고 뛰어난 것인지 배운것도 기쁘다. 옛날이야기의 시작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라는 구절이 문자 그대로 표현된 민화가 있다는것도 처음 알았는데 그림보고 소리내어 웃은건 처음이었다. 만민의 그림이라면 좀 더 널리 퍼지고 널리 평가받으며 널리 사랑받아야 하지 않을까. 미술관이 편의점만큼 흔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