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성장과정을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미 <싯다르타>를 통해서 설명한바 있지만 이곳에서 한 차례 간략하게 설명해야 함을 느꼈다. 황석영 작가가 “소설은 그 사람이 산 만큼만 쓰여진다.”라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사람도 자신의 경험한 만큼만 야기하고 작가도 풍부한 상상력보다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부 독일계의 러시아인으로, 젊었을 때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목사였던 헤르만 군데르트의 딸로 인도에서 태어나 당시 영국 선교사였던 아이젠바그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요하네스 헤세와 재혼하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공상을 무척 좋아했다. 라틴어 학교를 마친 헤세는 14세 때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어렵다고 하는 주의 시험을 치르고 명문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눈 뜨기 시작한 그의 자아는 그곳에서의 규칙적인 기숙사 생활 주입식 교육이나 여러 가지 권위주의적 속박에 충돌하고 반항하다가 기숙사를 탈출하기도 하고 신경 쇠약에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하다가 결국 1년도 채 못 되어 퇴학당한다. 그후 들어간 칸슈타르의 고등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서점의 점원 시계 공장 노동자로 전전하게 된다. 19세때 다시 서점의 견습점원이 되면서 겨우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이러한 헤르만 헤세의 생애와 문학은 깊은 연결 고리를 갖게 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트라 역시 어릴 적부터 총명해 모든 사람의 기대주로 성장했다. 교사들이나 교장 선생, 이웃 사람들이나 마을 목사, 학교 친구들 등 모든 사람들은 한스가 영리한 두뇌를 가진 특별한 존재라 생각했다. 이것으로 그의 미래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거나 다름없었다. 슈바벤 지방의 수재에게는 그들의 부모가 부자가 아닌 이상,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의 시험을 치러 신학교로 들어간 뒤 튀빙겐 대학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거나 교사가 되는 길이었다. 한스는 어른들이 설계해 놓은 운명의 틀안에 들어가 몇 주일 후면 ‘주의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누려야 할 푸른 하늘과 자유를 빼앗긴 채 그는 늘 공부에만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도 그것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시기였기에 오로지 시험에 합격해야 겠다는 생각만 있을뿐 점점 야위어가는 몸과 두통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오직 구두장수 플라이크 아저씨만이 이 모든 것을 걱정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리석은 일이다. 한스야! 또 죄악이고, 너 같은 나이에는 나가서 충분히 운동을 하고 적당히 쉬기도 해야 한단다. 무엇 때문에 방학이 있겠니? 방학은 방안에 틀어 박혀서 공부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너는 정말 뼈와 가죽만 남아 있구나.” 다행히 한스는 2등으로 당당히 시험을 합격했지만,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미리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방학기간 동안 중요한 사실을 놓친 채 공부만 했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그랬던 것처럼 한스는 시인 헤르만 하일르너에 의해 잠자고 있던 자아가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점점 모범생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한스보다는 하일르너가 헤르만 헤세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일르너는 공상가에다 시인이었고 천재적인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지만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반항아 기질을 가진 아이였다. 헤세도 어릴 적부터 공상을 무척 좋아했으며 거기다 개구쟁이에다 반항심이 강했다고 한다. 아마도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양면성을 하일르너와 한스라는 인물로 표현하기 위해 두 인물을 가공한 듯싶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수도원 생활 1여년 만에 중도에 하차하게 되는데, 사건의 발단은 계속된 한스의 두통으로 교장 선생님이 마을 의사를 부르게 되는데 병명은 신경쇠약이었다. 의사는 매일 한스에게 바깥에 나가 산보할 것을 권유했기 때문에 할수 없이 매일 식후 한 시간씩 바깥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평소 한스의 공부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던 하일르너와의 교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교장은 산보의 조건으로 하일르너가 동행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이나 금지를 위반하고 일과처럼 된 한스의 산보를 따라갔다. 그러한 사실이 교장 선생님 귀에 들어가게 되는데 험악할 정도로 두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펼치다 결국 하일르너는 감금에다 한스와 같이 외출하지 말라는 엄격한 금족 명령이 내려졌다. 그 사건의 계기로 하일르너는 학교를 탈주하여 며칠 만에 붙잡히게 되는데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된다.

단짝 친구를 잃어버린 한스는 산보에도 불구하고 젊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신경쇠약에다 합병증으로 무도병까지 겹쳐 더 심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학교에서는 집으로 요양 휴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한스가 요양 휴가를 떠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제 정신을 찾게 된 한스는 머릿속은 상처투성이가 된 것 같았다. 이 괴로움과 내버려짐 속에서 병든 소년에게 또 다른 거짓의 위안자가 다가와 차츰 그와 친해져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죽음에의 생각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그 생각이 산보하는 그를 따라다니며 떨어지질 않았다. 조숙한 이 소년은 지금 병을 치유하기 위해 선생님들에게 빼앗긴 유년 시절을 되찾고자 하염없이 숲속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일브론에서 온 구두 장수 조카 딸 에마라는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빠져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쾌활했고 보기 드문 미인에다 여기저기 웃음보따리를 풀어놓고 만나는 사람마다 즐거움을 준 아가씨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저녁 무렵 구두 장수 플라이크 아저씨 집 앞에 서 있었다. 마침 그를 기다린 사람처럼 에마는 집 밖을 빠져나와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에 빠진 한스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하늘이 이처럼 높게, 아름답게, 그립게 푸르른 적은 없었다. 강물도 이처럼 맑고 파란 적이 없었다. 방파제도 이처럼 눈부시게 하얀 물결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어느 것이나 새로 그려진 고운 그림이 투명한 새 유리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밤마다 키스를 나누며 낮에는 설렘으로 감정에 부풀어 올라 샘이 되어 버렸다.

그러 던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마지막 밤에 그녀를 찾아 갔을 때 이미 그녀는 자신이 다음 날 떠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몸을 맡긴 것이라든지 쉴 새 없이 퍼붓던 키스를 떠올려 봤을 때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한스는 억누를 길 없는 고통과 흥분이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의 힘과 뒤얽혀서 애달픈 번뇌로 변하여 버렸다. 이 번뇌의 채찍질을 못 이겨 그는 뜰로 거리로 숲속으로 다시 집으로 헤매고 다녔다. 불쌍한 한스, 젊은 날 한번쯤 겪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원하는 기계공이 되었지만 스스로 강물에 자신을 놓아주게 된다. 나는 한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는 생각보다는 생을 포기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생의 수레를 끌고 인생길을 오른다. 때론 오르막길도 있을 것이고 울퉁불퉁한 길도 있겠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얼마든지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한스를 만나는 동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혀왔다. 마치 작은 성냥갑 상자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그 안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작은 소년이 감당하기엔 벅찬 명예, 제도, 시험, 성공, 권위, 욕망이라는 짐을 얹어 주었기 때문이다. 플라이크 아저씨의 말대로 그를 죽인 사람들은 그 짐을 실어준 목사,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은 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작은 수레에 얼마든지 꿈과 희망, 사랑과 축복을 실어 주어도 수레 자체만으로 생의 무게는 벅차다. 더 이상 어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의 자유와 하늘을 빼앗지 않기를 바라면서 마침표를 찍어 본다. 

 

벌써 이 책과의 만남이 세 번째이다. 한번은 십대 때, 두 번째는 이십대 때, 그리고 지금은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다시 펼치게 되었다. 어떻게 이 책의 감동을 잊을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하여도 또 다시 제제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살아날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 마음 속 소녀가 죽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 작은 새가 살고 있다고 믿는 제제(주제: 제제의 본래 이름, 요셉의 포르투칼식 발음)는 다섯 살 난 사내아이이다. 보통 아이와는 다르게 상상력도 풍부하고 호기심도 많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다. 더군다나 스스로 글자를 깨우칠 정도로 영특한 아이지만 그의 비해 장난이 너무 심해 어른들은 제제를 보고 ‘꼬마악마’라 불렀다. 특히 제제는 갈보라는 심한 욕을 아무렇지 않게 뱉다가 심하게 입을 얻어맞곤 했는데 아빠가 갈보라는 단어를 썼을 때 아빠 입을 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은 그런 말을 해도 괜찮고 아이들은 나쁘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제 철이 들거냐며 혼나기 일쑤였다. 에드문두 아저씨는 제제는 조숙해서 금세 철이 들거라 말했지만, 난 제제가 철들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다. 철든 다는 게 무엇일까? 단지 상대방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고 어른스러운 행동과 말을 할지 모르지만 제제다움을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제제는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인디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빠는 스코트필드 씨랑 싸워서 일자리를 잃게 되어 집안 형편이 더욱 더 어려워 졌다. 랄라 누나까지 공장에 나가게 되었고 엄마는 시내에 있는 영국인 방직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하고 있었고, 또또까 형(안또니우 : 본래이름) 역시 집안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성당에서 복사(신부를 보조하는 일)를 하게 되었다. 집세가 계속해서 밀리자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글로리아 누나는 망고 나무를 발견하고는 껴안으면서 자신의 나무라고 소리쳤다. 안또니우형도 티마린드나무를 껴안고 누나와 똑같이 외쳤다. 제제는 수북이 자란 풀과 가시가 많은 늙은 오렌지나무 몇 그루와 개울 곁에 있는 조그마한 라임오렌지 나무 한 그루만 남은 것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글로리아 누나가 아직 어리지만 제제와 닮았다며 라임 오렌지나무가 좋겠다고 하자, 속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며 화가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라임 오렌지나무가 제제에게 마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날부터 제제와 라임 오렌지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제제만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가 되었다.

제제는 이번 크리스마스 때 하느님의 착한 아기 예수가 자신의 마음속에 태어나 철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난감이 산더미같이 실은 트럭이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 주기 위해 시내로 아침 8시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착한 글로리아 누나에게 애원해 봤지만 일이 산더미라며 우체부 빠이샹 씨에게 가는 길에 아이들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제제는 동생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루이스의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도 신기고 머리도 기름을 발라 예쁘게 꾸며 주었다. 그런데 우체부 아저씨는 약속과 달리 중간에 늦었다며 가버리는 바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난감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도 슬프고 실망스러워서 제제는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동생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지 못한 미안함에 제제는 자신이 아낀 ‘달빛 망아지’를 선물로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하였다.(크리스마스 : 브라질은 남반구에 있어 계절이 우리와 반대라 크리스마스가 여름이다.) 제제는 그런 온갖 감정이 뒤섞여 북받쳐 올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빠가 가난뱅이라서 진짜 싫어.” 아빠의 눈은 슬픔으로 굉장히 커져 있었다. 제제는 길거리로 달려가 아빠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 실컷 울고 싶었지만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절망에 빠져 들었다. 제제는 그날 하루 구두닦이 통을 들고 다니며 힘들게 번 돈으로 아빠를 위해 담배를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가 아바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그때서야 온종일 그를 괴롭히던 커다란 고통이 모두 폭발하여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또또까 형 말대로 아기 예수는 부자를 좋아하나보다.

제제는 모든 고민을 가장 친한 벗 라임 오렌지나무 밍기뉴에게 털어 놓았다. 밍기뉴는 제제가 슈르르까(애칭)라고 불러주면 늘 좋아했다. 그럴 때는 제제가 자신을 다른 때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문두 아저씨의 말대로 철이 들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있는 작은 새를 하느님께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잎사귀 모양의 크고 잘생긴 흰 구름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자, 가슴이 뭉클해져 벌떡 일어나 셔츠를 열어 메마른 가슴에서 새가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밍기뉴에게 가슴 속 새장이 텅빈 것 같아 슬프다며 눈물을 보였다. 어쩜 이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철이 들면 순수함 마저 잃어버리기 마련인데 철이 들었다 하는 랄라 누나는 한꺼번에 여러 남자를 사귀고, 철이 들었다 하는 또또까 형은 자신이 시비를 걸어 놓고 싸우기 무서워 제제를 대신 내보내고, 우리가 철이 들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사실 제제 마음 하나 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 좀 들어라.”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듣고 살아온 우리의 어린 시절, 새삼 그 말이 이제야 비로소 가장 무섭게 들려왔다. 제제는 비록 악마에서 어른들이 원하는 얌전한 아이가 되어갔지만 제제만의 상상력과 희망을 빼앗긴 잔인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름 끼칠 정도로 싫었다. 단지 관심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한 아이의 표현이었는데, 그래서 쎄실리아 빠임 선생님 앞에서와 뽀르뚜가 앞에서만큼은 다르게 행동했나보다. 제제를 유일하게 천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학교에 여섯 살이라고 속이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쎄실리아 빠임 선생님께 꽃을 드리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마 선생님이 못생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쉬는 시간에 가끔 생크림 빵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는 분은 그 선생님뿐이었다. 늘 선생님 책상 위에 놓은 빈병을 보고 마음 아파하던 제제는 세르지뉴 집 정원에 들어가 꽃 한 송이를 꺾어 선생님 병속에 꽃을 꽂아 놓았다. 선생님은 제제에게 큰 도둑질이 아니더라도 도둑질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자, 제제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인데, 왜 그것이 도둑질이냐고 조리 있게 대꾸한다. 그러고는 선생님 병만 늘 비어 있는 것이 마음 아파서 꽃을 사드리고 싶은데 집이 가난해서 정원도 없고 꽃을 살 돈이 없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평소 제제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선생님은 제제에게 빵 사먹을 돈을 주려고 했지만 사라지고 없었다. 그 이유는 간식을 가져오지 못한 다른 애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같은 반 아이중에 올빼미라는 작은 흑인 여자아이가(도로띨리아)가 있는데 그 애가 깜둥이인 데다가 가난뱅이라서 친구들이 같이 놀려고도 하지 않아 선생님이 주신 돈으로 산 생크림 빵으로 그 애하고 나눠 먹었다고 했다. 제제는 선생님께 가끔 저 대신 그 애한테도 돈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선생님은 제제의 황금 같은 마음씨를 보고 감동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을 한다. “이 병은 결코 비어 있지 않을 거야. 난 이 병을 볼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거야.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거야. 내게 이 꽃을 갖다 준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나의 학생이라고.”

그리고 제제에게 악마라고 부르지 않고 유일하게 천사라고 불러주는 또 한사람 뽀르뚜가와의 첫 만남은 사실 악연이었다. 제제의 장난기 발동으로 매일 7시 10분에 ‘재난과 기아’ 상점 모퉁이에 포르투갈 사람은 담배를 사기 위해 차를 세우는데, 그 차 뒤에 매달릴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는 화가 난 나머지 제제의 한쪽 귀를 잡고 손을 놓고 주먹을 얼굴에 들이밀며 위협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 광경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고 순식간에 자신의 넓적다리 위에 제제를 올려놓고 엉덩이를 세차게 때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난을 치고 도망가다 왼발에 유리 조각이 박히게 되는 데, 식구들에게 맞기 싫어 있는 힘을 다해 꾹 참고 그 다음 날 절뚝거리며 학교를 걸어가고 있는 데 그 웬수가 나타나 경적을 울리며 약을 올리는 것이다. 그는 차에서 내려 자신을 태워 의사에게 데려가 치료도 해주고 맛있는 음료수랑 케이크를 사주고 영화배우 사진이 박힌 사탕도 사주었다. 그 사건으로 밍기뉴가 질투할 정도로 포르투갈 사람은 제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맛있는 것을 사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친절한 말 한 마디와 관심이 제제의 마음을 녹였던 것이다. 제제는 뻔뻔하게도 그와의 많은 나이 장벽에도 불구하고 친구라는 이유로 그를 뽀르뚜가(포르투갈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아주 친한 사이에서만 쓰인다)라고 불렀다. 제제는 자신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랑을 가르쳐 준 그의 곁을 절대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니까요.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아요. 그리고 내 가슴속에 행복의 태양이 빛나는 것 같아요.”

나를 가장 마음 아프게 했던 부분은 ‘잊을 수 없는 두 차례의 매’ 부분이다. 루이스에게 풍선을 만들어 주기 위해 저녁도 잊은 채 풍선을 만들고 있는데 잔디라 누나는 계속해서 빨리 와서 먹으라고 소리 질렀다. 급기야 제제가 오지 않자, 맹수로 돌변해 미처 완성하지 못한 풍선을 갈가리 찢어 종잇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제제를 집어 던져 버렸다. 또 다시 악마가 제제를 충동질하는 바람에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한방에 터뜨렸다. 그러자 누나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고 안또니오 형까지 거들어 쓰러질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리고 일으켜 세워 또 때렸다. 잔인한 매질로 엉망이 된 몰골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식구들은 제제를 학교에도 보내주지 않았다. 아빠와 단둘이 있게 된 제제는 아빠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아리오발두 아저씨에게서 배운 탱고 노래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를 불렀던 것이다. 아빠는 벌떡 일어나 다시 불러 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서 그런 줄 알고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하며 부르자, 아빠의 손이 그의 뺨을 후렸다. 그리고는 다시 불러 부라고 했다. 사실 제제는 너무 어려 이 노래사가의 뜻도 알지 못한다. 그저 멜로디가 아름다워 따라 부른 것뿐이다. 아바는 또 다시 손을 들고 때리고 또 때리면서 계속 불러 보라고 했다. 아빠는 화가 나서 미친 듯이 허리띠를 풀고 온몸 구석구석을 찾아 때리고 또 때렸다. 맞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데 일어나 엄마에게 자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제제에게 있어 모든 믿음을 사라지게 만드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그는 아빠를 죽여 버렸다.

“걱정 마세요. 죽여 버릴 거니까요.”  

“무슨 소릴 그렇게 해. 네 아빠를 죽이겠다고?”

“예, 죽일 거예요. 이미 시작했어요. 벅 존슨의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 건 아니예요. 제 마음 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뽀르뚜가 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진실이다. 다섯 살 난 아이가 몸을 망가라치바(기차)에 뛰어 들고 싶을 정도로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뽀르뚜가 한 사람 안에서만이 살아 날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무관심과 사랑이다.

그 사랑의 힘이 자신이 몸을 던지려 했던 망가라치바에 의해 뽀르뚜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 충격이란, 독자인 나로써도 공황상태에 빠져 글자들 사이로 허우적거리며 헤매고 다녔다. 망가라치바가 쉬따 골목길에서 마누엘 발라디리스 차를 들이 받아 버린 것이다. 망가라치바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아이가 아빠를 선택할 수 있다면 뽀르뚜가의 아들이 되고 싶다던 제제의 소망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가족들은 이유도 모른 채 얼마 전 또또까 형이 라임 오렌지나무를 시에서 도로 확장 공사로 밀어 버린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그런 줄 알고 거짓말이라며 달래 보았지만, 제제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갔다. 이제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매를 맞아서 생긴 아픔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유리 조각에 질린 곳을 바늘로 꿰맬 때의 느낌도 아니었다.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팔과 머리의 기운이 앗아가고, 베개 위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슈르르까는 그저 꽃 한 송이 피울 줄 모르는 어리고 보잘 것 없는 라임 오렌지나무 였지만 제제가 환상의 세계에 살 때 가장 친한 벗이었다. 이제 밍기뉴도 꿈의 세계를 떠나 현실과 고통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 밍기뉴가 피운 첫 번째 꽃을 보면서 그 애도 이제 철이 들어 어른 나무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 꽃으로 밍기뉴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제가 그랬던 것처럼 밍기뉴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슈르르까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잊혀질 테니까. 아빠는 제제를 위로하기 위해 라임 오렌지나무를 그렇게 빨리 잘리진 않을 거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제제의 이 마지막 말이 너무도 가슴 아파 잊을 수가 없다. “벌써 잘라 갔어요. 아빠, 벌써 일주일도 전에 내 라임 오렌지나무를 잘라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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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작가의 의문처럼 나 역시 동감한바다.

 

알랭 드 보통 책속에는 공감이 들어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의 놀라운 설득력은 <여행의 기술>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제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놀라운 논리를 입수하기 위해 책을 펼쳐 들었다.

떠나고 싶다. 그냥 무작정 어디로든 좋으니 떠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나 홀로 기나긴 여행의 단맛을 느껴보고 싶다. 하지만 막상 그의 말대로 떠나고 나면 지금의 생각이 보장받지 못한 채 또 다른 공허함이 밀려 올 것이다. 어쩌면 데제생트처럼 그림속 파라다이스를 볼때가 가장 행복한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밀려드는 생각은 오직 떠나고 싶다. 데제생트의 말처럼 그 상상 속 여행에서는 우리가 여행함에 있어 고민해야 할 비자, 돈, 준비물 등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행 후 밀려오는 허전함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이 충동이야말로 여행의 참맛인 것 같다. 우리가 여행의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행에 대한 노스탤지어일 것이다. 사실 내 눈으로 본 여행의 장소보다 훗날 그곳을 기억하는 추억의 장소가 보다 찬란히 빛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름다운 기억 속으로 빨라 들어가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강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일상의 권태와 절망이 느껴졌을 때 그러한 현상은 더더욱 심각해지는 법이다. 단지 터무니없이 이상화 된 이미지를 좀 더 현실적인 이미지로 바꿀 수 없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 터무니없는 이미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비하게도 회귀본능이 자극해 여행을 떠올릴 때면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한다. 단 한 번도 도시를 꿈꾸거나 화려한 조명을 상상해 본적이 없다. 드넓은 바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꽃들이 만발한 거리와 우거진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를 자주 떠올리곤 한다. 느치를 닮은 시인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한 찬양처럼 오래 찾아보지는 않았어도 이 아름다운 형상들은 오히려 외로운 방에서 그리고 작고 큰 도시들의 소음 속에서도 자리한 시간에 고요하게 복원된다.

..... <자연은> 우리 내부의 정신을 가르치고,

고요함과 아름다움으로 감명을 주고,

또 높은 사색으로 양육하기에,

험한 말이나 경솔한 판단도, 이기적인 사람들의 조롱도,

친절한 마음이 깃들지 않은 인사도,

또한 일상생활의 온갖 황량한 교재도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축복으로 가득하다는

명랑한 신념을 흩트리지도 못하리라.

<웨일스의 한 골짜기를 기려 쓴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자연을 자주 여행하는 것이 도시의 악을 씻어 내는 데 필수적인 해독제라는 워즈워스의 주장에 동의한 바다. 나이를 먹을수록 도시의 안락함보다는 시골의 한적함이 그리워진다.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 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스의 주장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들은 뚜렷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거리나 저녁 식사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귀를 곤두세운다고 한다. 그들은 먹고 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형성하느니 차라리 고립된 농가에 사는 것이 유리하다고 시인은 고백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떤 장소 자체에 내재한 특질들에 의해 또는 우리 심리의 내부 회로에 의해 결정이 나는 것 같다. 아무리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대한 기억이 아픔이라면 더 이상 그곳은 내게 기쁨이 될수 없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함께 동행하는 이에 의해 장소에 상관없이 여행이 결정되어 버린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행자의 취향과 의도에 따라 나의 계획을 조정하고 포기해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일단 행복한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 사랑, 존경, 표현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고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아무리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나무 오두막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할지라도 즐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 없다.

사실 여행의 참맛은 홀로 찾는 자유이다. 오랫동안 한곳에 서서 몽상에 젖어 헤어나올 수 없다 할지라도 재촉하거나 나무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혼자만의 여행을 즐겨보지 못했다. 이제껏 여행을 하면서도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여행의 참 의미를 듣지 못했다. 우리는 일상을 쪼개고 돈을 들어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그저 여행했다는 자체로 만족하며 살아왔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그러한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 홀로 방안에 앉아 책을 읽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또한 여행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은 보들레르의 말을 외치고 싶다. “어디로 라도! 어디로 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한다면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다!”

에드먼드 버크가 구약에서 가장 숭고한 책이라고 말한 <욥기>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욥이 우스 땅 출신의 부유하고 독실한 한 사람임을 알수 있다. 그에게는 아들 입곱과 딸 셋,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겨릿소 오백 쌍, 나귀 오백 마리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욥은 시험을 받아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게 된다.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마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한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사진 찍기이다. 그의 표현처럼 여행의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줄어든다. 시간이 흘러도 사진 속 기억은 언제라도 우리를 그곳으로 손쉽게 이동해 주기 때문에 일반인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드 보통은 우리에게 손쉬운 방법보다 그곳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으로 재창조 할 것을 요구한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종이에 옮기기 위해서는 구성요소들을 보다 세심하게 관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도 평생 떡갈나무를 많이 보아 왔지만 랭데일 골짜기에서 한 시간 동안 스케치를 해본 뒤에야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재대로 감상하고 기억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단지 풍경을 보고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무의식속으로 흘러가 버리지만, 우리가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득은 어떤 풍경이나 건물에 이끌리는 이유를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스킨은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로 표현하자면 ‘말로 그려야(말 그림)’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충분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분석하는 데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아무래도 셔터를 누르는 무의식 행위와 마찬가지로 풍경을 눈으로 감상하기 보다는 말로 그 아름다움을 담아 보는 것이 우리의 뇌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제시한 가장 흥미로운 여행은 방콕이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