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이정하 선생님을 통해 펼치게 된 앙드레 지드의 <전원 고향악>은 가슴을 울리는 뭔가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어떻게 그것을 말로 풀어내야 할지 중요한 숙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마냥 안절부절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한 베토벤의 6번 교향곡 ‘전원 교향악’은 여자주인공 제르트뤼드가 뇌샤아뗄의 음악회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에서 비롯되었다.
‘그날 연주된 것은 마침 ’전원 고향악‘이었다. 내가 ’마침‘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이 작품만큼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은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회 장을 나온 뒤에도 제르트뤼드는 오랫동안 말없이 황홀경에 잠겨 있었다.
“목사님이 보고 계신 세계는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아름답다니, 애야, 무엇만큼 말이지?”
“그 ‘냇가의 경치’처럼 말예요.”
나는 이내 대답하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이루 형용할수 없는 오묘한 화음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만일 악과 죄가 없다면 있을 수 있을 그러한 세계를 그린 것이라고 나 자신이 반성을 했기 때문이다.
“눈 뜬 사람들은 본다는 행복을 모르고 있단다.”
나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눈이 안 보이는 나는 귀로 듣는 행복을 알고 있어요.”
사실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한 장님 소녀이다. 목사가 처음 그녀를 만나게 된 곳은 노파가 죽어있는 초라한 집 안 구석에서였다. 유일한 보호자였던 귀머거리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세상에 덩그러니 버려진 채로 남겨졌다. 위생은 물론이고,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지적 수준도 최하였다. 목사는 선택에 여지없이 길 잃은 어린양을 보살필 마음으로 집으로 데리고 왔으나, 사실 제르트뤼드는 이내 아멜리의 몫이었다. 아내는 장님 소녀를 보자마자 단숨에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다섯에다 아직 손길이 가장 많이 가는 갓난아이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 궁색한 살림살이와 좁은 집도 한몫 차지하고 나니, 목사의 선행이 곧바로 아멜리 어깨에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얹어 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르트뤼드라는 이름은 목사의 딸 샤를로뜨가 지어준 이름으로 당사자조차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고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문명의 혜택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는 거의 짐승에 가까웠다. 그때 마침 바르 트라베르에 있는 의사 친구가 왕진을 해주어 목사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해준다. “자네는 단단한 토대도 쌓기 전에 건축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 거야. 보게나, 이 넋 속에선 모든 게 혼돈돼있어. 최초의 뼈대조차 돼있지 않은 상태라고. 우선 먼저 몇 개의 촉각이나 미각을 각기 하나로 뭉쳐두고 거기에 꼬리표라도 붙이듯이 하나의 소리, 하나의 말을 연결시키는 거야. 자네는 그것을 질릴 정도로 거듭 되풀이해 들려주고, 그런 다음 그 아이에게도 되풀이 말하게끔 힘써주는 걸세. 다만 절대로 오랫동안 계속하지는 말라고.” 제르트뤼드의 교육은 처음 산을 오르듯 힘겨웠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의 지성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목사는 아이들에게 이토록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르트뤼드를 통해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 깊은 잠속에서 깨어난 잠자는 숲속의 공주 제르트뤼드는 지성뿐 아니라 외적인 미도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외부 세계에 정신이 팔려 숱한 악한 생각 때문에 가장 좋은 주의력을 빼앗기고 있는 대개의 처녀들의 비하면 그녀는 이미 많은 지혜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세상을 갓 알아간 백지같은 그녀의 마음은 행복 투성이었다. 우리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 새소리, 물소리, 노랫소리, 바람소리, 비소리가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 목사가 제르트뤼드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날수록 아내의 잔소리와 한숨은 늘어났다. 사실 나 역시 같은 여자로써(아니 줌마로써) 화가났다. 목사는 제르트뤼드에게 아내는 본래 얼굴이 어둡고 근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얼굴의 그늘과 우울함은 누가 가져다 주었는가? 궁색한 살림에 목사 뒷바라지까지 하느라 숨죽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내가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내를 그렇게 평가하고 치부하긴 너무 불공평하다.
그러던 초여름 어느날 아들 자끄가 그녀를 사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커다른 슬픔이 가득차 올랐다. 안절부절 못하고 답답해하는 그의 마음은 과연 아들을 위한 걱정이었을까? 그녀를 위한 걱정이었을까? 분명 두 사람을 위한 걱정이었겠지만 이미 난 그전부터 목사가 제르트뤼드를 여자로써 사랑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정작 본인만 부인하고 있을뿐이지, 주변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들 자끄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하여 그녀의 남편으로 친구로 의지가 되어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자끄를 멀리 떠나 보내게 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제르트뤼드는 목사집을 나와 M양에게 보내지게 되는데, 아내는 입술을 떨며 눈물 젖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가엾은 양반”이라고 말하며 방을 나가 버렸다. 아내의 수수께끼 같은 말은 얼마 안가서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뚜렷해졌다. 제르트뤼드 없이는 단 하루도 못살고 그녀를 목숨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처음 제르트뤼드의 순수한 고백을 듣고 이성으로 통제해 보았지만, 이미 감성은 그보다 더 멀리, 더 빨리 그녀를 쫓고 있었다. “너희가 만일 눈이 멀었더라면 죄가 없으련만” 그렇다, 그녀는 죄와 벌을 알지 못한다. 그저 심장이 울리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표현할뿐이다. 그녀의 단호한 고객을 듣는 순간 갈가리 찢기운 이론의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그들은 입을 맞추고 말았다. 그는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사랑이 죄라 할지라도 그의 심장을 뽑아 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이 사랑을 그의 심장에서 뽑아 버릴 수 없다고 신께 고백한다.
불행 중 다행이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행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르트뤼드의 눈이 개안수술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눈이 먼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기에 평소 목사는 제르트뤼드에게 사도 바울이 기록한 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르트뤼드가 눈을 뜨면서 죄를 인식하게 되자, 그 길로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목사와의 사랑이 엄청난 죄였다는 사실을 눈을 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녀가 차지하려 했던 목사의 옆자리는 다른 여자의 자리였고, 그 때문에 초라한 얼굴위에 숱한 슬픔을 한 여자에게 안겨주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은 주름이 가득한 목사가 아닌 목사를 닮은 자끄였다는 사실이다. 눈을 뜨고 처음 자끄를 보았을 때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목사가 아닌 자끄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슬픔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목사에게 울부짖으며 외쳤다. “아아! 목사님은 왜 내게 그분을 뿌리치게 하셨나요?” 아아! 그분한테 고백하고 싶어요. 이젠 나가 주세요, 헤어져요. 당신 얼굴 보는 게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어요.“ 결국 그녀는 혼수상태에서 헛소리와 허탈증으로 밤을 보낸 후 아침 동틀 녁에 죽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은 절망이다. 눈을 감았을 때는 보이지 않은 세계의 희망으로 목사와의 사랑으로 행복했지만,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자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이미 개종하여 신부가 되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현실을 깨닫게 되자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비록 자신이 상상한 세계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계를 소유하게 되었지만, 가슴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순간 제르트뤼드의 영혼은 시들어 버린 것이다. 비록 눈을 감았지만 죄를 모른다하여 죄가 될수 없는 걸까? 나는 그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제르트뤼드는 목사의 사랑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의 아내의 눈물을 알고 있었다. 난 제르트뤼드가 그 모든 사실을 묵인했지 몰랐다고는 볼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개안수술을 받은 후 이 모든 사실을 눈으로 보게 되었을 뿐이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죄는 존재했다. 눈의 여부와 상관없이 죄는 그들에게 벌을 요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