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새하얀 밤의 추억을 기억하는가? 아스라이 밀려든 그리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은 소설 <백야>. 누구나 한번쯤 사랑하는 연인과 새 하얀 밤을 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밤새 거리를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로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순백의 사랑. 이런 글이 <죄와 벌>의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무게감보다는 감성적인 <백야>를 통해 그의 색다른 면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흔해 빠진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공상가의 순수한 사랑을 읽는다면 분명 김이 모락 피어오르는 차 한 잔의 여유와 그리움이 찾아 올 것이다.
공상가는 늘 혼자였다. 하지만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 곁에 아무도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그를 무척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를 찾아온 상실감의 원인이 바로 모든 것이 그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거리에는 이렇게 사람들이 넘쳐나고 도시는 시끌벅적한데 자신에게 그 누구도 손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나란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실로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그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런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공상가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무작정 밤새 거리를 쏘다녔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슬픈 얼굴을 가지고 운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있었다. 공상가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실루엣을 보고 브뤼네트(살결이 희고 머리카락과 눈빛이 갈색인 여자) 일거라 생각하며 가슴을 조리며 그녀 곁에 맴돌고 서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남자가 그녀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여자는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는 지팡이로 순식간에 초대받지 않은 신사를 사라지게 할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백야는 시작된 것이다.
공상가는 평생 현실 속에서 아가씨를 만나본적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매일매일 상상 속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상상 속 여인과 사랑을 나눴을 뿐이었다. 서두에 설명한 공상가의 슬픔 역시 내부에서 일어난 사람들과의 거리감이다. 그녀 그러니까 나스첸카는 그런 공상가의 내면을 화해시키고 스스로가 품었던 의문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아마 나스첸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의 미래는 또 다시 곰팡내 나는 고독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녀 곁에 있을 때만큼은 공상에 빠지는 일도, 고독함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얀 밤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에 의한 운명적 만남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나스첸카 의 이야기를 해보자! 부모님이 어릴 적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할머니와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가정교사까지 두셨는데, 어느 날 아침 그녀를 불러 당신께서는 앞이 안 보이니까 이제 자신을 돌볼 수 없다면서 옷핀으로 그녀의 옷과 할머니 옷을 함께 꿰어 버리셨다. 그리고 그녀가 착한 아이가 되지 않은 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선고하시고는 2년째 할머니와의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슬픔의 원인이었을까? 아니다, 그 집에는 낡아빠졌지만 다락방이 하나 있었는데, 외지에서 온 젊은 사람이 새로 이사를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만 할머니가 심부름을 시키자 옷핀을 빼고 가야 된다는 생각도 못하고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을 동정했던 했던 것인지, 아니면 진정 사랑이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는 꾸준히 책을 보내주어 많은 책을 읽게 되고, 그의 친절함으로 난생처음 할머니를 모시고 극장에도 가게 되었다. 그분은 그날 밤 내내 다정한 눈길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이 순진한 아가씨는 그 신사의 친절함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발길을 끊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한달 한번 극장에 초대하기 위해 왔을 뿐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오페라의 계절은 지나가고, 그 분의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마침내 병든 사람처럼 야위어갔다.
지금으로부터 꼭 일 년 전 5월, 그 분이 이제 이 도시에서의 용무가 끝나 일 년간 모스크바에 가게 되었다며 방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두근거리는 심장, 아픈 머리, 뭐가 뭔지 알수 없는 기분, 열정, 지탱하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그분에게로 달려가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분은 그윽한 눈빛으로 나스첸카를 바라보며 지금은 가난한 데다 직장도 없는 형편이라 어렵다며, 일년 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설령 일년 뒤에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 자신이 결혼 할수 있는 처지가 된다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고, 만약 당신의 사랑이 그때까지 식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행복해 질것이라고 설명한다. ‘내가 이상한가?’ 나는 왜 그 말이 거짓처럼 들렸을까! 착한 나스첸카를 떼어 버리기 위해 남자들이 흔히쓴느 수법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세상을 오래 살았나보다. 그렇게 약속하고 떠난지 일 년이 지나가고 이곳에 도착한지 사흘이 되었지만, 여태까지 자신에게 나타나지도 않고, 아무런 소식조차 없어 슬픔에 잠겨 그날 밤 운하에 서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공상가는 자신의 일처럼 마음이 아파 그녀의 편지를 그 남자에게 전해 주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그들의 백야는 계속 되었지만 남자의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난 계속해서 나스첸카에게 그 사기꾼 같은 남자는 잊어버리고 순수한 공상가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비로운 새 하얀 밤이 늘어나면 날수록 나스첸카는 혼란으로, 공상가는 불안함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나스첸카..... 만약 그가 오지 않는다면?
공상가....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분명 그 분보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친절하고 상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향한 사랑이 쉽사리 포기되지 않은 마음은 무엇일까? 이 사랑이 거품이었기를 희망하며 나스첸카와 공상가는 울고, 고민하고, 절규하다 결국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그 순간 내가 판단한 거짓 사랑에 대한 현실을 깨달은 나스첸카의 결심이 얼마나 훌륭해 보이던지..... 왜 뻔한 사랑의 목마른 기다림으로 눈물을 흘리는지 알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나스첸카를 부르는 무서운 목소리가 이 모든 환상을 깨뜨리고 말았다.
나스첸카는 그 남자와 결혼한다,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여자를 과연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난 공상가의 성품과 사랑에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오히려 한 사람의 고독과 감사에 넘치는 마음을 건네주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아! 더없는 기쁨의 완전한 순간이여! 인간의 기나긴 삶에 있어서 그것은 결코 부족함이 없는 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옮긴이의 말이 너무 멋져 이곳에 잠시 옮겨보고자 한다. ‘사랑은 물론 운명이 아니다. 그렇다고 쟁취 또한 아니다. 사랑은 그 순결한 사랑의 마음으로써만 아름답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단언하건대 사랑은 바로 환각이며 몽상이며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의 지옥이다. 사람들은 그 지옥불의 휘황함에 매혹되어 제 몸이 타는 줄도 모르고 불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 두 사람이 헤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들 자신의 불타는 사랑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