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완서 선생님의 추천글을 읽고 선택하게 된 <잃어버린 것들의 책>은 정말 신비하고 아이러니한 두 세계의 공존 속에서 펼쳐진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가, 갑자기 전환된 채널에 의해 시선을 뗄수 없게 만든 이 소설은 얼마 전에 본 영화 <아이들>을 연상케 만들었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산에 갔던 다섯 아이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체가 발견 되었지만, 어린 시절 다섯 아이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환상의 세계로 날아간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데이빗처럼 말이다.
옛날 옛적에.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옛날 옛적에, 엄마를 잃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엄마를 잃었다.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마는 비겁하게도 살금살금 다가와서 몸속부터 갉아먹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정신까지 파고들었다. 엄마에게는 엄마만의 책이 있었지만 엄마는 데이빗에게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엄마는 신화나 전설, 성 이야기나 모험담, 무시무시한 말하는 짐승이야기를 좋아했다. 데이빗은 올해 나이 열두 살이 되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동화책에 남다른 애착을 느꼈다. 병들기 전 데이빗의 엄마는 이야기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하곤 했다. 이야기는 누군가가 읽어줄 때 살아나는 것이다. 큰 소리로 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목소리가 없다면, 담요를 뒤집어쓰고 램프 불빛 아래서 이야기를 쫓는 커다란 두 눈동자가 없다면, 이야기는 결코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다.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원하고, 그래야만 이야기속의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올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우리가 생명을 주기를 이야기들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음~ 정말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동화책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멋진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동화책은 멋지고 재미있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살아있는 이야기..... 그렇다. 이야기는 누군가 읽어줄때야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다.
엄마의 죽음 그리고 연이은 아빠의 재혼과 새엄마와 이복동생의 등장으로 데이빗은 책의 세계로 더욱더 빠져 들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들이 데이빗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책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그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을 만큼 강렬한 것들이다. 데이빗의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분리되어 그 나름대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 두 세계를 구분하는 벽은 너무도 얇고 약했고 언젠가부터 그 두 세계가 섞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꼬부라진 남자가 데이빗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책들의 웅성거림과 꼬부라진 남자의 출현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신이 꼬마 조지와 로즈를 미워하면 할수록 책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다 우연히 로즈의 저택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름은 바로 조나단과 애나였다. 어느 날 자신도 아빠와 심하게 다투고 난후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데이빗은 갑자기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숲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됐지만 왕을 물리치고 이 세계를 장악하려는 늑대들과 인간의 모습을 한 늑대(늑대인간) 루프 때문에 쫓기다 흉측한 트롤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수수께끼를 맞혀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는데 답을 늦게 맞히는 바람에 늑대들에 의해 숲 사람과 헤어지게 된다. 데이빗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소문에 의하면 왕에게는 <잃어버린 것들의 책>이 있는데 그 책에는 왕이 알아야 할 것들이 전부 들어 있어 곤경에 처했을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들춰본다고 한다. 어쩌면 데이빗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그 책에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낯선 세계의 모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마 낯선 세계에 덩그러니 떨어진 느낌은 말로다 형용하기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데이빗은 위기의 순간마다 지혜를 발휘해 여자 사냥꾼으로부터 벗어나고, 용기를 발휘해 무장한 병사들도 다 죽여 버린 괴물을 물리쳤고, 롤랜드와 함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있다는 성에 들어가 마녀의 실체도 밝혀내고, 중간 중간 꼬부라진 남자의 교활한 계략에도 넘어가지 않고 인내심으로 무사히 왕이 사는 궁전에 도착하게 된다.
이제 왕을 만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동화 속 나라에 살고 있는 늙은 왕의 실체는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조나단 툴베이였다. 그렇다면 동생 애나는 어디 있는 것일까? 정말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다. 사실 애나는 조나단의 친동생이 아니다. 애나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그 여자아이에게 쏠리자 조나단은 저 계집애를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일기장에 적어 놓게 된다. 꼬부라진 남자는 조나단의 분노를 듣고 왕이 되게 해주겠다며 동생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조나단은 동화 속 나라의 왕이 되고 애나는 평생 유리병 속에 갇혀 꼬부라진 남자의 생명의 연로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왕도 늙고 애나의 생명력도 다하는 바람에 꼬부라진 남자는 또 다른 생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꼬부라진 남자는 두 세계를 배회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 악몽을 꾸는 어린아이들, 시기하고 분노하는 아이들, 저밖에 모르는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왕과 여왕으로 만들어주고 권력을 주지만 사실 진짜 권력은 그가 쥐고 있었다. 권력의 대가로 아이들은 그들이 질투하던 또 다른 아이들을 그에게 넘겨주었고 꼬부라진 남자는 그 아이들을 성 지하의 자신만의 은신처의 가두었다. 그런데 데이빗은 지금껏 그가 유혹했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데이빗은 괴물과 가시의 성에 사는 마녀를 처단했다. 데이빗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은 데이빗 자신의 두려움이 현실화한 존재들이다. 꼬부라진 남자가 놀랐던 것은 데이빗이 그들을 상대하는 태도였다. 어른들조차 해낼 수 없었던 분노와 슬픔을 다스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만큼 강해졌다. 게다가 이제 증오와 질투심마저 사랑과 이해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화 속 나라의 모험을 통해 지혜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을 배웠다.
우리가 흔히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세계가 그곳에서 현실이 되어 펼쳐지게 되는데,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꼬부라진 남자는 요술쟁이라는 사실 외에 그렇다할 이름도 없다. 해설에 의하면 꼬부라진 남자의 조상은 룸펠스틸트스킨이다. 룸펠스틸트스킨은 불쌍한 방앗간집 딸을 위해 짚으로 금실을 자아주지만 훗날 그녀가 낳은 첫 아기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면서 자기 이름을 알아맞혀야만 아기를 빼앗지 않겠다고 한 동화 속 요술쟁이이다. 숲사람이 들려주었던 루프의 탄생 역시 <빨간 모자>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루프들의 존재감이 큰 이유는 조나단 툴베이가 늑대들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이 데이빗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에 상상의 나라에서 가장 섬뜩한 짐승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데이빗은 새로운 가족으로 인해 아빠가 자신을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헨젤과 그레텔>의 연관성이 작용한다. 의붓딸의 미모를 시기한 나머지 살인을 모의하는 계모의 이야기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역시 데이빗에게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데이빗이 동화책을 읽으며 느끼게 된 두려움과 무의식이 상상의 나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데이빗의 상상을 통해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이 순전히 상상의 산물이었다면 실종된 조나단과 애나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리고 꼬부라진 남자의 경고처럼 그토록 그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세계의 진실은 고통과 슬픔의 세계이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결코 희망적인 메시지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자체가 잃어버린 것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데이빗도 동화 속 세계를 여행하면서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배웠던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법, 책임감, 두려움과 용기,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 얼핏보면 좋은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순수함을 잃어버린 게 된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린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