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다. 책방 심부름꾼 장이가 아버지를 따라 필사쟁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역사동화 <책과 노니는 집>은 정말 감동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장이의 삶을 통해 조선 말기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이 작품은 문학동네어린이문학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을 동화를 통해 조선 말기 천주교 탄압과 필사쟁이의 삶을 들여다 볼수 있어 너무 좋았다. 조선 시대에 명나라를 통해 들어오게 된 서학(천주학)은 그때 당시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 대한 반란이었다. 팔천 그러니까 조선 시대의 여덟 천민이었던 노비, 승려, 백정, 무당, 상여꾼, 기생, 공장 등은 말할 것이 없고 양반 중에도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혁명을 조용히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이야 당연시 여겨지는 인간평등 사상이지만 조선 시대에서는 천주교를 믿는 일이며, 서학의 첫 출발점인 <천주실의>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탄압의 대상이었다. <천주실의>는 서양 신부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 즉 하느님에 관한 책이다. 서학이라고도 부르는 천주학은 조선에선 금지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외사촌 윤지충이 천주교 의식에 따라 어머니의 초상을 치른 것을 계기로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뒤로 천주교 관련 서적은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사학한 글이라 하여 읽어서도 팔아서도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되는 책이었다.
필사쟁이인 장이의 아버지도 천주교 책을 필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몸이 짓이겨지도록 매를 맞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집에 돌아오셨다. 정작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책방 주인 최 서쾌(책을 파는 사람)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책방 어른이며 천주학쟁이들을 감싸고 도셨다. 한 달가량 시간이 흐른 뒤 최 서쾌가 찾아온 그 다음날 장이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 뒤부터 장이는 최 서쾌 밑에서 책방 심부름꾼이 되었다. 어머니도 없이 자란 장이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던 터라, 심부름을 보낼 때마다 반복되는 최 서쾌의 잔소리에 서러워 눈물이 났다. 하지만 책방 어른의 말처럼 장이가 하는 일은 주먹거리에서 술심부름을 하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지식을 배달하는 값진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장이가 아버지 없이도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로 장이가 심부름을 다닌 곳은 홍 교리와 기생집 미적 아씨이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 그럴까, 아니면 천주학을 믿는 사람들이라 그럴까 아무튼 뭔가 달라도 달랐다. 먼저 홍 교리는 양반 같지 않게 한낱 심부름꾼은 장이에게 사람처럼 대해주신 분이다. 아버지의 꿈을 이어 ‘필사’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도 홍 교리 어른이다. 홍 교리 집 사랑채에 가면 문 위에 현판에 ‘서유당(西遊堂)..... 책과 노니는 집’이라고 쓰여 있다. 서유당에 수북이 쌓여있는 서고를 보면 유독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책방을 꾸리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밤새 글씨를 써서 벌게진 눈과 움직이지도 못한 손으로 장이를 맞아 주셨다. 그러면 장이는 “간밤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셨어요?”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우리에겐 밥이 될 이야기, 누군가에겐 동무가 될 이야기, 그리고 또 나중에 우리 부자에게 손바닥만 한 책방을 열어 줄 이야기를 썼지.”하고 대답하셨다. 아버지는 필사라는 직업을 소중히 여기셨다. 평생 책 베끼는 일을 하며 책과 이야기 나누는 호사스러운 직업이 어디 있냐며, 하루 종일 앉아 붓을 쥐고 책을 베끼니라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펴지지 않아도 늘 웃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어느덧 훌쩍 자라버린 장이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선을 넘어 필사의 길을 걷게 된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씩씩한 장이를 보며, 내 아이의 삶을 그 위에 살짝 그려 보았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책과 사랑에 빠졌지만 나 홀로 그 세계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 모두 책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바로 아빠의 책사랑 덕분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잘 보이지 않은 눈을 찡그려가며 밤새 책을 읽는 분이시다. 아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책이라면 무조건 좋다. 나와 같은 장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무조건 좋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책 사랑하는 마음은 공감대가 형성된다. 홍 교리가 장이에게 한 말 중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 부분이 있는데,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 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가을부터 준비하듯 나도 책을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당장 다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 나 역시 나의 도서관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읽지 않은 도서가 무려 30권 가량 된다. 그런데도 매달 헌책방은 물론 서점에서 사는 책이 5권 가량 넘는다. 내가 읽어 주기를 목 빠지듯 기다리는 이가 있어 행복하고, 다음은 누구를 만날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 즐거움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