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불의 집 - 기시유스케

 

'유리망치'의 후속편 혹은 외전격인 소설집. '유리망치'의 두 컴비가 다시 돌아와 각종 미스터리 밀실 사건에 도전한다. 두 캐릭터가 가지는 고유의 장점들을 잘 살려서 무리없이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작가가 드라마화를 염두해두고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치 한 편의 일드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대략 이런 식의 소설집을 한 편정도만 더 써낸다면 충분히 8,9화 분량의 드라마 에피소드가 완비되는 것이다) 총 네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두 번째 수록작인 '검은 이빨'과 네 번째 수록작인 '개는 알고있다'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살인,밀실,추리의 삼박자가 고른 비율로 잘 갖춰졌고 특히 준코와 케이 두 컴비가 빚어내는 유머와 활극도 기본 이상의 재미를 선사했다. 

하지만 전작인 '유리망치'만큼의 임팩트를 주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유리망치'가 장편이라서 드라마 구축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었던 탓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한다 해도 몇 개의 단점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사용되는 트릭들이 제법 기발하기는 하나 환호가 나올만큼 놀랍지는 않다는 것이다. 초반의 밀실설정의 궁금함, 혹은 긴장감이 마지막 '해결편'에 가서 뒤통수를 치는 듯한 짜릿함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그저 실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중견 작가가 몇 가지 트릭들로 이야기를 짜맞추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미스터리적 부분이 아니라 준코와 케이의 캐릭터성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별넷 이상의 가치는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후속작이 나온다면 분명 사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래도 나는 기대한다. 기시유스케의 미스터리보다, '공포소설'을!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임영태

 

최근에 읽은 최고의 한국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근래 한국소설이 나에게 만족감을 준 케이스는 거의 없다. 그나마 올해 읽은 한국소설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덕혜옹주'였는데- 이 작품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 '덕혜옹주'를 능가했다. 개인적 취향이 다 다른 법이겠지만 이 작품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 좋았던 결정적 이유는 국내 순수문학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르적 상상력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귀신을 볼 줄 아는 한 대필작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 그 남자의 눈에는 귀신이 보인다. 길을 걷다가도 마트에서 물건을 사다가도 순간순간 느닷없이 귀신이 눈에 보인다.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귀신들을 찬찬히 관찰하게 된다. 소설 속 귀신은 외국 영화나 미드에 등장하는 귀신들과는 조금 달랐다. 원한을 풀어달라고 주인공을 찾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이승을 떠도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죽은 영혼은 이 세상에 남은 하나의 미련 때문에 붙어 있는 것이다. 미련이란 뭘까, 하고 생각해보면 '무언가에 대한 놓쳐버린 열망' 같은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부분을 놓치고 지나간다. 그중에서 몇 개는 혹은 특별한 한 가지는 죽어서까지 후회와 미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유령들이 이승을 떠도는 이유는 바로 그 미련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그 이상 어떤 이유도 없다. 망자들은 분노나 절망같은 극한의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립고 그리워 계속 그곳을 떠돌 뿐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구분을 흐려놓는다. 귀신이라고 해서 무서운 얼굴을 하거나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지 않는다. 죽은 자는 산자와 똑같이 생겼고 똑같이 행동한다. 산 자가 무언가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하듯, 죽은 자 역시 뭔가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할 따름이다. 다만 가장 큰 차이라고 하면, 산 자가 원하는 것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인다면 죽은 자에게는 집착이 없다. 다만 '그리워할뿐'이다. 집착은 소유욕을 부르고 소유욕은 결국 싸움과 화를 부른다. 하지만 죽은 자는 싸우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소유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했던 이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면 그저 그 곁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그리워할 뿐이다.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었다면 그저 그 곁에서 그 물건을 바라보며 그리워할 뿐이다. 추억어린 거리를 그리워하며 걸어갈 뿐이고, 보고싶었던 풍경이 있다면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리움은 그리워하는 마음 자체로 귀신들을 달래준다. 소설의 주인공인 대필작가는 유령들의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자신이 가진 애착과 집착과 소유욕에 대해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아직 죽지 않았지만 산자에게도 미련과 그리움은 존재한다. '그리움'은 산자 죽은자 모두에게 소중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내내 마음이 따스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커다란 감동이나 세련된 휴머니즘은 없었지만, 읽어가다보면 자연스레 마음속을 정화시켜주는 듯한 기분을 받게 된다. 특히 극 중반에 길게 소개되는 '개'에 대한 에피소드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할 때부터 임영태 작가에 대해서는 남다른 기대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후 특별한 행보를 보이지 못하다가 이 작품으로 그의 진가를 다시한번 멋지게 발휘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소소하지만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빠르게 이어지면서 '서사'의 힘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온두라는 여성은 낮에는 유모차 판매원으로 일하지만 밤만되면 차 트렁크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 그런 그녀에게 름이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름 역시 밤마다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이른바 트렁커족.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둘은 밤마다 치킨차차차라는 게임을 통해 서로에게 숨겨진 비밀의 진실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온두와 름이 밤마다 벌이는 치킨차차차 게임을 통해 그들이 어째서 트렁크 속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인 임영태 작가의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을 워낙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어서 제2회 수상작에 거는 기대도 무척 컸다. 이번 2회 중앙장편문학상은 두 작품이 공동 수상되었는데 하나는 오수완 작가의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이고 또 하나가 바로 이 작품, 고은규 작가의 ’트렁커’다. 이 작품은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가슴 속에 치유되지 못한 상처와 슬픔에 대한 보고서 같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플레이 되고 카드 하나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초고도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단 한가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마음 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슬픔, 영혼 속에 각인된 상처,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고통과 상념들- 아무리 세상이 편리해지고 과학이 발전해도 우리들은 절대로 우리들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슬픔이나 상처를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슴 속 슬픔을, 기억 속 상처들을 그냥 덮어두려 한다. 애써 잊은 척, 상관없는 척 해볼 뿐이다.

소설 속 남녀는 제각각 커다란 상처와 고통의 시간을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인양, 희미해진 기억인양- 애써 모른 척 하며 하루하루 주어진 일과에만 매달리려 하지만, 밤이 되면 그 기억들은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상처는 덮어둔다고 절대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덮어두고 감출 수록 덧날 뿐이다. 영혼을 고통스럽게 좀먹어간다. 온두와 름은 어린 시절 자신들이 받은 끔찍한 고통들에서 도피하기 위해 트렁크를 선택했다. 그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찾을 수 없고, 그런 곳에 누군가가 들어가 있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간- 그래서 그런 곳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조차도 잊게 만드는 망각의 늪! 트렁크는 그들에게 그런 장소였다. 슬픔도 고통도, 저주스런 과거도 모두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어둠 저편으로 묻어버릴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지닌 타인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자신의 트렁크를 열어본다.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속을 누군가가 들여다봐주길 원해서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트렁크 속 내용물이 남에게 혹시라도 들키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하는 것과 자신의 트렁크 속 내용물이 남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상처를 누군가가 와서 보듬어주길 원하는 것이다. 상처를 가두어놓은 마음의 트렁크 속으로 들어와줘서- 이 슬픔이 혼자만의 짐이 아니라고, 함께 나누어서 치유될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길 갈망하는것이다.

책은 이처럼 끔찍한 과거의 상처를 안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가볍고 스피디한 문체로 이어나간다. 때문에 단숨에 읽혀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도시인의 마음속 그늘’의 깊이는 저 끝을 알 수 없는 트렁크 속 어둠의 깊이처럼 아득하고 묵직하게 우리들의 영혼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