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등으로 구분하는 것을 학교에서 배울 때는 이런 구분이 처음부터 있던 체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의문이 생겼다. “근대 이후”라니? 왜 모던 다음에는 시대를 규정하는 그럴싸한 단어가 없는가? 하지만 누구도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고대, 중세, 근대 등으로 시대를 구분한 것 자체가 근대적인 사고체계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지난 다음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근대적인 시대 구분이 나에게는 편리하다. 이렇게 공통적 특징들을 모아서 덩어리로 그릴 때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배운 역사는 일직선상에 표시된 점들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는 나에게 일직선상의 점과 점 사이에 있는 어느 기간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도 명료한 표기인가? 그런데 움베르토 에코가 이 중세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학자들과 함께 이 프로젝트를 만들어갔다. 무엇을 얘기하려고 그랬을까?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중세를 되돌아보면 그 시대는 암흑시대다. 학교는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에코가 그의 긴 머리말에서 던진 첫마디로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 학교만 그렇게 가르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부분의 나라들, 대부분의 학교들은 여전히 중세를 암흑으로 규정하고, 그 권력에 의해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중세는 암흑일 수밖에 없다. 중세가 우리에게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은 중세를 차지하고 있는 그 긴 시간 때문에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흔히 하는 얘기대로 “중세 천 년”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천 년 동안 세상은 얼마나 많은 변화의 고비를 견뎌야 했을까?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우리는 한 몫에 볼 수 있을까? 중세를 한 줄로 세워 둔다고 하면 이쪽 끝(476년)에서 저쪽 끝(1492년)까지가 한 눈에 들어오기는 할까? 세상에... 이렇게 길고 복잡한, 그래서 도무지 계산이 안 나오는 그런 기간을 우리는 그냥 싸잡아서 “중세”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번에 나온 “중세 컬렉션”은 중세에 대한 그런 오해를 제대로 짚어줄 심산으로 의도된 것 같다. 기획자는 중세를 다시 네 시대로 구분해서 네 권의 책에 담고자 했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 중에서 첫 번째로 나온 책이다. 우리말 번역으로 거의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나올 책들도 거의가 그 정도 분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양만 갖고 생각해도 이런 책을 기획했다는 게 엄청나다.
처음에 생각할 때 나는 이 책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쯤으로 생각했다. 일 년에 한 권씩, 전체 15권으로 로마 역사를 기술하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확실하게 지킨 시오노의 기록과정.... 원고의 분량으로 보나 기간으로 보나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에코의 이번 기획이 그에 견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심 기대했던 것이 있다면 로마인 이야기를 읽을 때의 그 재미였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를 지탱하게 하는 사상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를 분명히 반대하고 그의 생각하는 방식을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지면 위에 펼쳐지는 그의 화려한 입담만큼은 혼을 빼고도 남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야기꾼으로 치자면 우리의 움베르토 에코도 그에 못지않은 사람 아닌가? 그것은 에코가 쓴 소설들만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런 기대가 완전히 만족되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로마인 이야기” 같은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동안은 내가 백과사전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움베르토 에코 혼자 책을 쓴 게 아니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집필에 참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은 위키 백과 쪽에 더 가까운 책이다. 몰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백과사전처럼 중심 단어를 알파벳순으로 배열한 책은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주제들이 제목으로 등장하고 기획의도에 의해서 배정된 학자들이 내용을 채웠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이번에 나온 중세 1권은 중세 천 년 중에서 처음 500여년을 다룬다. 중세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시대는 그것만 가지고도 너무 긴 시간이다. 수없이 많은 민족과 종족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들이 가진 문화와 사상, 종교적 의식들도 끊임없이 대결한다. 그런 만큼 중세 초기에 서있는 사람이 아무리 까치발을 들고 서서 고개를 빼고 본다고 하더라도 500년 너머의 반대쪽에서 자기 눈에 익숙한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비록 같은 자리라 하더라도 500년이라고 하면 그 정도로 다른 세상이 될 확률이 크다는 얘기다. 지은이들은 그 사이에 있었던 종족 혹은 민족들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그리면서 책의 부제를 “야만인,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의 시대”라고 붙였다. 중세가 로마의 몰락과 함께 시작되는 시대라고 하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부제는 아마도 “로마의 마지막에 영향을 준 무리들”이라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이번에 나온 책은 그렇게 복잡다단한 시대를 소개하면서 전체를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 등이다. 이 여섯 주제는 그 안에서 더 작은 카테고리로 나눠지며, 각각의 카테고리는 그보다 더 작은 이야기들로 나뉜다. 바로 그 “더 작은 이야기들”에 배치된 전문가들이 서술하는 기록을 우리가 읽는 것이다. 어떤 것은 서너 페이지 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열 페이지 넘는 꽤 긴 문장들도 있다.
내 눈과 머리가 이런 식의 글에 익숙해지는 것은 150쪽 이상을 읽은 다음이었다.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꽤나 여러 차례 물어야 했다. 하지만 일단 익숙해진 다음에는 그간에 알지 못했던 많은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세라고 하면 유럽을 의미하는데 사실 그동안은 유럽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한 나라처럼 어울릴 수 있는지...억지든지 아니든지 우리가 단일민족의 자부심을 주입받았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책은 그런 나에게 오늘날 유럽을 이해하는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한반도의 고대 사회가 어떻게 현재의 우리 모습으로 안착되었는지를 아는 것과 비슷한 앎이라고나 할까?
다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어려운 것은 너무 많은 인명과 지명, 민족들이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다. 발음하기도 까다로운 그들의 긴 이름은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그림이 안 그려지는 때가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쉬움으로 남았던 것이 이 부분인데,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림이나 지도 같은 것을 적절히 끼워주었다면 훨씬 더 쉬웠을 것 같다. 물론 책 말미에 사진 몇 장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별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지도나 사진이 더 적합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많이 배웠다. 방대한 분량만 생각한다면 숨이 탁 막힐 수밖에 없고, 글의 스타일도 로마인 이야기하고는 다른 류(類)지만 오랜만에 멀리까지 즐거운 여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