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이단아 ‘정도전’, 그를 말하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저서에《삼봉집》,《경제문감》등이 있다. -네이버 사전

 

정도전은 학창시절 국사 시간, 그리고 현재까지도 내 주위에 머물고 있다. 그에 대해 무엇이 떠오르냐 물으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내게 있어 그는 고려 말 조선 개국 공신의 제갈량, 급진파, 그리고 비운의 신하다. 정도전은 시대에 따라 그를 표현하는 어투는 달라져 왔다. 비단 사학자들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다. 이는 드라마를 각색하는 작가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어느 누구든 어떤 시각으로 한 인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판단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호는 삼봉이다. 그는 성리학의 선구자 ‘이색’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다. 동급생으로는 하륜과 정몽주, 이숭인 등이 있는데 이 세 명은 특히 정도전에게 있어 죽마고우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들을 호락호락한 동량지재로 남겨두질 않았다.
‘이놈이 나의 제자가 된 것은 이놈의 복인가? 아니면 나의 복인가?’ (p1권 p69)
스승인 이색 또한 정도전이 어렸을 때부터 그의 비범함과 그 비범함이 자신을 비롯해 시대를 급변하게 할 것임을 짐작했다. 그는 이색에게 있어 양날의 검과 같았다. 특히나 ‘시대말’라는 상황은 정도전에게 어떤 이 옆에서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극락과 지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정도전의 이상은 ‘요․순시대처럼’ 이었다. 그는 백성을 위한 나라를 건국하려고 애썼고, 19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공화정이란 모델의 뿌리 중 하나를 이룩하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당시 왕정체제가 그들의 운명처럼 받아들여진 시대에선 너무도 무모하지 않았나 싶다. 어떤 개혁이든 백성과 기반 정치 세력의 지지가 절대적이라고 본다. 당시 그에겐 그 어떤 지지도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발생하는 갑신정변도 그러한 지지규모에 대해선 같은 맥락을 달리지 않나 싶다.

 

저자 이수광은 다른 소설이라든지 얼마 전 접했던 <조선 시대를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으로도 만나보았다. 언제나 저자의 사실적인 묘사와 방대한 자료들에 국사 초심자인 나로서는 감탄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여러 책들을 통틀어 이번 책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조금은 편파적이지 않았나 싶다. 어느 인물에게나 그만의 장단점은 존재하지만 저자가 그린 정도전은 너무나 선인이었다. 그래서 읽는 내겐 그가 다분히 멀게만 느껴졌다.

 

어느 시대나 '이단아'로 불리는 이들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라는 한계적 감정으로 부딪히는, 남과 다른 천재적 면모로 인한 다른 이들의 시기와 질투심의 발로일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시대가 가지는 필수적 요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그 시대를 어떻게든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의 힘이 (정도전의 경우를 봐도) 국가의 원수를 바꾸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비단 그들을 홀로 싸우게 만들더라고 말이다.

 

왕씨 고려에서 이씨 조선으로 바뀐 시대. 그 격변의 시대 중심엔 정도전과 이성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뒤엔 수많은 피를 뿌리며 이룩한 조선이 있었다. 비록 조선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경국대전’의 편찬에 정도전의 획기적 아이디어가 녹아들어간 여러 책들은 묻혀버렸지만, 그의 정신은 현대까지도 계승되어 안정과 나타를 뒤집어 놓는 자명종과도 같다. 

 

조존 성찰 두 가지에 공력을 다 기울여
책 속의 성현을 저버리지 않았노라
삼십년 이래에 근고를 다한 업이
송정에 한번 취해 허사가 되었네
-정도전 <자조(自嘲)> (2권 p222)

 

세기말 인물 정도전은 그렇게 가버렸다. 하지만 그의 역사적 자취를 따라가는 먼 후대들은 그의 빛나는 성찰을 기억할 것이다. 고로 그의 시에서 말하는 허사(虛事)는 후대의 가슴 속에서 움트는 실사(實事)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 속에도 그의 정신은 싹이 터 대한민국의 땅에 뿌리내릴 것만 같다.

정도전, 이수광, 쌤앤파커스

사랑하기때문에, 기욤뮈소, 밝은세상

살구꽃처럼 흐드러지게 피고 지다 : ‘카이네 기생’

 

 

소설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떼쟁이가 본업인 ‘허바우’의 딸 ‘행화’, 허바우가 첫눈에 홀딱 반해버린 회령 기생 ‘월아’, 독립군을 돕는 큰아버지의 아들 ‘봉학’, 행화의 재기에 반해 그녀를 사모하는 경지에 이른 일본 중위 ‘야마자키’. (그 외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생략한다.)

 

행화는 태어나면서부터 기생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다. 빼어난 미색,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재기, 이는 천명(天命)이었다. 행화는 어머니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천하다는 기생 월아의 집에서 재기를 배운다. 그리곤 운명적으로 아편중독자인 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기생이 되고 만다.

 

“우리 행화는 저 살구꽃을 닮아 너무 고와.” (p98)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했다. 살구꽃처럼 고운 얼굴, 나긋한 몸체. 하지만 그녀의 삶은 살구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지 못했다. 기생들의 삶은 본래 그러했던가. 행화는 태어나면서부터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을지도 모른다. 그건 시대적 운명과 가족사적 운명을 받아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과 같았다. 바람에 흩날리면 가차없이 떨어져 흐르는 살구꽃.

 

시대는 일제강점기다. 아버지 허바우는 돈을 위해 이리저리 영합하는 기회주의자다. 떼쟁이는 언제나 돈을 위해 시류를 갈아타고, 그의 삶은 언제나 장돌뱅이와 같았다. 행화 또한 떠도는 삶을 그리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갈대처럼 흐느적거리며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운명은 행화를 가혹하게 밀고나간다.

 

소설은 카이네 기생인 할머니의 손자가 자신의 뿌리가 일본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손자는 시대의 격변 속에 져버린 살구꽃의 기구한 운명과 화해하는, 이른바 액자식 구성이다.

 

‘카이네(かいね)’는 우리나라 지명인 ‘회령’을 일컫는 말이다. 이야기는 회령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당시 일본군에 철저히 뿌리뽑힌 수많은 조선 살구나무들을 그리고 있다. 카이네 기생의 기구한 운명은 울며겨자먹기로 생을 이어나간 당시 조선인들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얼마 전 일본 위안부로 끌려가셨던 할머니들의 진정서에 이어 피해 보상금에 관해 말이 많았다. 살구꽃처럼 흐드러지게 피기도 전에 일본군들에게 뽑혀버렸던 소녀들은 이제 시든 채 하나 둘씩 세상을 하직하셨다. 하지만 그 지옥의 향기는 그네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으리라.

 

지금도 서글픈 가야금 소리에 맞추어 시름을 잊고자 했던 조선민들의 구슬픈 곡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지는 듯하다. 처음 책장을 넘길 때 유독 힘들었던 소설이었지만 두 번째 시도로 넘긴 책장은 먹먹함과 분노가 함께 서리며 재빠르게 넘어갔었다. 언제나 그렇듯 조선과 대한제국사 그 자체는 굴욕감이 먼저 퍼지는 나의 본능으로 인해 소설 넘기기가 너무 힘들다.

 

신나게 넘어가는 듯했던 책장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면, 허무감에 덮기가 힘들어진다. 생각보다 결말이 내겐 조금 아쉬웠다. 통쾌한 느낌까진 원하진 않았으나 지루한 현실을 그대로 알려주는 듯해 느낌이 좋진 않았다. 언제나 신비로운 존재인 ‘기생’의 이러저러한 모습 중, 오늘은 일제 시대라는 숲에 흐드러지게 핀 살구 기생 꽃들이 일본군이란 농부에게 철저히 짓밟힘의 집합체를 본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온다.

 

카이네기생, 장혜영, 어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