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조선에 새로운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있을 때, 리진은 그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매혹적이지 않은가. 본래 있던 오래된 것과 새롭고 신선한 것의 만남. 여태껏 문을 걸어잠그고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이들이, 드디어 그 빗장을 연다. 아마 이 책의 주인공도 그렇지 않을까. 리진은 과연, 닫아왔던 그녀의 마음을 콜랭 앞에서 열 수 있을까.

 

 리진 1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아무 기록도, 아무런 기억도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는, 그저 이름뿐인 여자의 이야기. 그러나 이름뿐이면, 그게 또 어떤가. 이 책에 나와있듯, 이름은 없던 인연도 만들어내는 법이며 이름의 주인의 삶에 따라 그것의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리진. 입이 벌어지고 입천장 위에 붙어있던 혀가 발려내려가며, 리. 목 안쪽에서부터 작은 바람이 일며, 진.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작가는 그녀의 삶을 써내려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이 리진이다. 아무런 기록이 없어도, 그녀의 이름만으로 그 삶은 충만한 것이다.  

  읽으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세어보기에도 지친다. 솔직히 말하면, 읽으면서 내 엄마를 위해 울진 않았다. 엄마 생각이 몇 번이고 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해야 했던 책이건만, 정작 울 때에는 엄마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작중의 '네' 엄마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만큼 이야기에 몰두했던 까닭이다. 작중 엄마와의 추억을 회상할 때라던가 자식들이 대립할 때, 특히 마지막 장면 등 장면 하나하나가 굉장히 섬세하고 눈에 선명해 손을 뗄 수 없었던 책이다. 읽던 도중 딱 한 번 책을 덮은 적이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읽다가 도저히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던 까닭이다. 후에 집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즈음 다시 읽었다. 자식들이 울 때 나도 울었고, 아버지가 울 때 나도 울었고, '네'가 울 때 나도 울었다.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눈물이 전혀 아깝지 않았던 책.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다. 악이 있기에 선이 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 이 책은 나에게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 그러나 사소하고 사소해서 알지 못했던 것. 이 시집에서 나는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 좋은 것은 나쁜 것에 의하여 더욱 좋게 보인다는 것, 양날의 칼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 또는 사람 사는 얘기들. 그저 그런 얘기들이다. 발에 치일 만큼 사소하고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 소소한 것들에 대한 얘기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만한 이야기지만, 시인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줍는다. 그리고 돌멩이에서 돌로, 돌에서 광석으로, 광석에서 보석으로 바꿔놓는다. 우리가 놓친 것들을 날카롭게, 또다른 관점에서 찌른다. 그제야 우리는 그 보석을 보고, 아, 이게 그 돌멩이였구나,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런 책이다. 그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