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줄 치느라. 독서 도중 인상 깊은 구절이나 뇌리에 박히는 문장이 있으면 표시해가며 읽는 편인데, 이 책에는 정말 안 좋은 문장이 없고 안 좋은 시가 없고 안 좋은 글이 없었다. 실려있는 모든 시 하나하나가,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밟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덕분에 붙여놓은 포스트잇만도  족히 열 개는 넘고 온갖 펜으로 칠해놓은 것 때문에 책이 아주 그냥 알록달록하다.

 그러나 읽고 있으면, 펼쳐 보면 정말, 시의 세계로 빨려가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이 얇은 책 한권 너머의 또 다른 차원의 세계. 바로 시의 세계. 그 다른 차원의 우주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이 책은 그 우주의 웜홀이 되는 것이다. 저 시의 은하수로 풍덩,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몸을 맡길 수 있게, 깜깜한 밤하늘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말자. 그저 조용히 책을 열자. 그리고 한꺼풀 벗기는 것이다. 겹겹이 닫혀있는 저 너머의, 시의 우주를.

 바로 이런 책을 찾고 있었다. 이런 책에 갈증하고 있었다. 이런 책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그런 때가 있다.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하고 싶을 때. 아무거라도 괜찮으니까 들이키고 싶을 때. 무언가 내 공허를 채워 줄 알량한 지식. 쪼그라든 풍선같은 내 지식의 부피에 아주 조금의 공기라도 좋으니, 내 숨통을 열게 해줄 만한 앎. 그런 게 필요할 때가 있다. 이 책은 그 생각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고, 발화점이 되어줄 것이고, 내 공부의 끓는 점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 책이다. 정말 공부에 미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 작가는 소위 '괴짜 교수'로 불리는, 여러 분야에 권위자로 불릴 만한 박학다식하고 공부에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또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왜, 누구나 한번쯤은 미쳐야지 그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읽고 있으면 그런 거 다 상관 없이, 그의 일부분만이라도 닮고 싶어지는 책. 보고 있으면 손끝으로 그의 열정이 느껴지는 뜨거운 책이다.

 리진 그 첫번째 이야기가 한 여자의 사랑을 이야기 했다면, 그 두번째 이야기는 여자의 일생을 그려놓았다. 1권에서 보여주지 못한 그 모든 리진의 이야기를 모조리 쏟아놓은 듯 하다. 1권에서 보지 못한, 아껴둔 보물창고의 빗장을 연 기분이다. 솔직히 말해 로맨스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1권에서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왕 펼친 책 끝장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2권을 꺼냈다.

 그리고 리진2는 정말, 별세계였다. 완전히 다른 규모와 다른 스토리. 단순히 사랑과 이별에서 그친 게 아닌, 리진과 그 주변인들의 삶 자체를 남김없이 그려넣었다.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팝콘처럼 터져나와 책장 속에서 폭발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정말, 깊은 슬픔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슬픔이란 슬픔은 모두 다 갈아넣은 듯 했다. 책을 붙잡고 울어본 게 얼마나 오랜만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기뻤다. 울면서도 기뻤다. 내게 이 순간을 선물해준 리진에게 고마워서.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있을까, 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