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노볼'은 주인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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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소녀 '전초밤'은, 채널 60번의 리얼리티 드라마 주역이자 인기 액터이며,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고해리'를 보면서 디렉터의 꿈을 갖는다. 그러나 디렉터가 되기 위해 입학해야하는 필름스쿨의 입시에 낙방한다. 그러던 중, 고해리 주연 드라마의 디렉터인 '차설'이 그녀를 찾아온다. 고해리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죽은 그녀와 쌍둥이처럼 닮은 전초밤이 아무도 모르게 고해리의 대역이 되어줄 것을 제안한다. 전초밤은 디렉터의 꿈을 위해 가족들에게 필름스쿨에 추가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1년 간의 계약을 이행하러 스노볼에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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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초밤은 스노볼 입주민들과 수많은 시청자들이 보는 앞에서 고해리의 삶을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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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까지 속여가며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장난감 스노볼의 유리벽과 같았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움 속에서 그녀는 고해리가 누렸던 안락함과 풍요로운 혜택을 놓치고 싶지 않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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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드라마로 비쳐지는 고해리의 모습과 실제 마주한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갈등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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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능숙하게 대역을 소화해 나가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위기나 대립이 긴장을 유발시켜 계속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또한 상황에 따른 감정선으로 스토리에 절로 몰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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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사연 뿐만 아니라 작품 속 독특한 세계관과 설정 역시 굉장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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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41도로 꽁꽁 얼어붙은 세계에서 스노볼은 유일하게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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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초밤이 사는 세상은 '설국열차'의 세계관처럼 생명체가 살기엔 척박하고 암울한 곳이다.

이백 년 전 갑자기 이곳에 몰아닥친 혹한과 강추위로 인해 국가, 정부, 세계 경제는 무너지게 된다.

이 때 이본 미디어 창업주인 '이본' 회장이 사비를 털어 거울 돔을 세우고 지역 주민을 지킨다. 그렇게 이 돔은 유일하게 따뜻함을 유지하는 공간이 되고 사람들에게 '스노볼'로 불리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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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초창기의 뜻이 변질되었는지, 현재 스노볼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벙커가 아니라 '트루먼쇼' 무대가 된다. 스노볼 거주자인 액터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스노볼 바깥주민들의 오락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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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리처럼 스노볼에 사는 사람들은 액터라고 불리며, 액터의 삶은 리얼리티 드라마로 편집돼 만천하에 방송된다.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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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스노볼 돔밖 거주민들은 쳇바퀴 돌리기를 통한 노동력으로 전기를 생산해 수신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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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보면 공정한 대가를 치르는듯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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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으며 특권을 누리지 않습니다." (p.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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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거주자인 이본그룹, 디렉터, 액터와 스노볼 밖 주민들의 이해관계는 방송국 제작자, 배우, 시청자의 위치가 아니라 신분제 사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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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거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문물을 누린다. 왕족처럼 전기생산 비참여, 프라이버시 보호 등 모든 편의를 제공받는 이본 그룹의 회장 일가를 제외하면, 이 안에서도 계급이 나눠지고 그에 따라 혜택이 달라진다.

잘 나가는 디렉터와 고해리같은 명배우들은 귀족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디렉터와 액터는 그럴 수 없다. 방송이 종영된 액터나 퇴출된 디렉터는 씁쓸하고 비참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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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밖 거주민들은 아예 의식주의 기본권리도 존중받지 못한다. 한 개의 사과는 커녕 쪼개놓은 것을 배급받아야 할 정도로 배불리 먹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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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전기를 만드는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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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세상의 균형을 이룰 것입니다. (p.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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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모습은 이본 회장의 연설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 속엔 자연스레 비틀린 욕망이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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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급 액터만 해도 스노볼 안에선 기본 편의생활을 즐길 수 있기에 스노볼 거주민들은 안락한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어떡해서든 이 곳에 남으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먹이사슬 탑급에 위치한 사람들은 뒤에서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행위를 은밀하게 벌이고 낮은 단계 거주민들은 아무리 비합리적인 일이라도 따라야 한다.

갑인 디렉터 '차설'과 그녀의 아버지 '차귀방'은 디렉터로서의 성공가도를 유지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을의 위치인 '조미류' 같은 액터는 디렉터가 시키는대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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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이라도 스노볼에서의 영주권을 위해서 예외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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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리의 할머니 고매령, 어머니 고상히는 손녀이자 딸이 죽었는데 할머니는 마치 고해리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태연하게 카메라 앞에 서고, 어머니는 뒤에서 진짜 딸을 질투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전초밤이 대역으로 그들 앞에서 연기한다지만 혈육의 죽음을 맞이한 가족의 모습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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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는 한 명의 사람이 아닌, 하나의 허상에 불과했다. (p.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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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을 겪으며 전초밤은 모니터로 본 사랑스러운 고해리의 모습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심경이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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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소설 속 허구지만 현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액터와 디렉터의 모습이 실제 방송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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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방송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일반 '사회' 역시 그렇다. 현 사회는 법적으로 신분제가 없는 평등 사회지만 사회 곳곳에서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빈익빈 부익부, 학벌, 혈연, 외모, 지역, 성, 인종, 인맥 등에 따라 차별이나 혐오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사회에서 성공을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입시 경쟁에 뛰어든다.

이미 여러 면에서 월등한 조건을 타고 태어난 아이들은 이본 그룹 사람들이나 잘 나가는 액터, 디렉터처럼 '그들만의 리그'에서 더 높은 곳을 향해 겨룬다. 중산층은 매년 9월에 열리는 액터 오디션에 뽑히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것처럼 조금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며 달린다. 반면 경제적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스노볼 밖 거주민처럼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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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설 ' 스노볼' 세계관은 우리네 현실보다 조금 더 지독한 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5단계(or 8단계) 이론 중 가장 기본적인 욕구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구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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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스노볼 안팎으로 사람들은 어떡해서든 스노볼 안에서의 따뜻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산다.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이유때문에 고매령은 독하게 인자한 할머니를 연기하고, 배새린은 발악을 하면서까지 역할을 유지하려고 하고, 전초밤은 차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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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했어. 넌 평생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니까." (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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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지금부터, 역사에 길이 남을 드라마를 만들어 가는 거야." (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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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도 몇 몇 인물이 보여주는 비인간적인 악행은 용서받을 수 없다. 전초밤은 이들의 죄를 응징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자 도와줄 이들을 규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초밤은 전과 다른 변화를 맞이한다. 동경하는 고해리를 흉내내기 급급했던 그녀는 다른 이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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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전초밤의 스노볼을 둘러싼 숨가쁜 여정을 정신없이 따라가보니 어느 덧 끝페이지에 도달해 있었다. 작품이 가진 몇 가지의 매력이 이 소설을 페이지 터너로 만들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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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디테일한 설정이다. 세계관의 소재는 익숙하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선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스노볼 내의 도시의 장관, 스노볼 밖의 퇴직자 마을, 일반인 마을, 디렉터 및 액터라는 직업, 스포일러 금지 등 스노볼 세계의 법 등 여러 면에서 기발한 상상력이 두드러져 보였다. '스노볼'과 이를 둘러싼 세상을 만드는데 그만큼 작가님이 큰 공을 들인 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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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스토리텔링이 주의집중을 사로잡았다. SF 장르, 디스토피아 세계관, 미스터리 스릴러 요소가 어우러진 이야기는 물론 초반부터 심어놓은 복선 역시 흥미를 주었다. 처음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암시인줄 모르고 무심코 넘겼다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를때 쯤에 복선임을 알고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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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가 쏠쏠하다. 겉으로 보여지는 고해리의 모습과 그녀가 누리는 풍족한 환경에 심취했던 전초밤은 결국 가짜를 벗어 던진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찾아 쟁취한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되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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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인생이 재미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야.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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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개인의 행복과 도덕 및 이타심의 상관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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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을만한 영어덜트 소설 같지만 읽을수록 여러모로 생각할거리가 많은 심오함이 느껴지는 작품인 것 같다.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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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낡고 오래된 빌라에서 사는 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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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깡마른 몰골로 집으로 돌아온 건 3년 전이었다. 세 살과 갓 백일 지난 아이를 품에 안은 채였다.(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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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우연히 제부가 동생에게 가정 폭력을 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동생과 어린 두 조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넉넉치 않은 형편에 갑자기 늘어난 식구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으로 이어진다. 부모님, 동생은 밖에 나가 일을 해야 해서 딱히 직업이 없던 내가 온갖 살림과 두 조카의 양육을 도맡는다. 그렇게 나는 가족의 희생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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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꿈이었던 나는 정신없는 일상에 쫓겨 시 공모는 커녕 필사도 하지 못한채 지낸다. 동생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시로 등단한 학교 동문의 소식에 자존감은 나날이 고꾸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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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임에도 소설같지 않았다. 마치 리얼 다큐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주인공이 겪는 일상이 생생하고 리얼하게 묘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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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가 온 세상을 잡아먹은 것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p.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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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겪는 일상은 그저 '바쁘다'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반복되는 일상같지만 당일에 마쳐야 하는 업무는 날마다 달랐으며, 각 각의 업무마다 고강도의 노동력과 인내심을 요구했다. 먼저, 당일에 마쳐야 할 살림은 작은 평수의 집 안에서 한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었다. 전통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관을 지닌 어머니 때문에 주인공은 혼자서 매우 비효율적이며 심신이 고생하는 잡무를 감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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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도 마찬가지다. '나'는 학원 강사일을 하는 동생을 대신해 두 어린 조카의 어머니가 되어 전담으로 맡아 키운다. 두 아이들은, 특히 둘째 조카는 이혼 전적이 있는데다 폭력적이고 말종같은 생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발달이 더뎠다. 너무 안쓰러운 아이들이지만 마냥 사랑만을 주기에는 현실의 벽은 터무니 없이 높았다. 한 벌의 옷을 갈아입는 동안 집 안을 몇 바퀴씩 뛰어다니고, 국수를 바닥에 쏟아서 부러뜨리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있으려니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거기다 아이들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알아보는 것도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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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과 고단이 내 발목을 부여잡아 질질 끌려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p. 41)

끔찍하게 지겹고 지긋지긋하게 지루했다. (p. 105)

나는 늘 숙제하는 기분으로 동동거려야 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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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과 책 곳곳에 나오는 독백은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그만큼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다. 울분 섞인 감정이 책 밖으로 전해지면서 마음이 절로 먹먹해졌다. 힘들게 살아가는 그녀에게 가족 구성원 그 누구도 도움이 되어주긴 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다. 백수인 그녀가 집안 일과 두 아이에 대해 모두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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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칭찬을 바란 게 아니었다. 애썼다고, 수고했다고, 너도 고생이 많다는 말이면 되었는데 엄마는 단 한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p.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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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아니라 가족이란 이름의 짐덩이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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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큰 딸의 이야기이건만, 개인적으로 주인공을 포함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고된 일상뿐만 아니라 온 식구의 행동에 숨이 막힐정도로 갑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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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주인공의 부모님이 보이는 행동에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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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버지는 예전에 사업이 망한 뒤 무기력하고 기운 없는 사람이 되어 큰 딸의 가사일을 도와줄 여력이 되질 못한다. 맞벌이를 하는 어머니는 이제 연로한 나이로 살림을 놓고 싶었던거지 업무 지시만 내리고 살림에 동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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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연로하신 부모님이 가사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이 염려되는 연세에 일까지 하는 분들이 집안 일을 병행 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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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나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p.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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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부모님이 나이 많은 큰딸을 경제적으로 독립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경제적인 자립을 하지 못하니 가난해지면서 악순환이 반복된다. 내가 부모라면 마흔줄인 자식이 아직도 꿈을 찾는답시고 돈 없는 백수로 있는 꼴을 절대로 못 볼 것 같다. 시인이라는 꿈을 응원은 해줄지언정 언제까지고 경제적으로 떠맡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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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주인공이 독립을 하려고 하니 발목을 잡는다. 이런 중심없는 행동이 주인공의 착한 딸 콤플렉스에 영향을 미친게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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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우유뷰단한 동생이다. 어릴 적의 동생은 알아서 공부를 잘하고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똘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혼남을 만나 임신부터 하면서 삶이 틀어지게 되었다. 나이 서른에 가까운 언니의 꿈을 응원하며 그녀의 학자금까지 마련해서 대학에 보냈던 어여쁜 동생은 어디갔나 싶을 정도로 작품의 대부분에서 무신경한 태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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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의 트라우마가 심한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혼을 질질 끌고, 자신의 사정을 숨긴채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는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일을 늦게까지 한다는 이유로 두 아이에게 무심한 태도를 보인채 육아를 전적으로 언니에게 의존한다. 두 아이를 모두 자기가 키우겠다고 울면서 말할땐 언제고 정작 자신의 삶만 찾아나서며, 언니에겐 민폐를 끼치는 모양새에 할말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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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주인공 '나'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는 가족보다 주인공이 더 난처하게 느껴졌다다. 그녀가 희생정신이 강한 착한 딸이 아니라 가족 탓만 하며 자신의 인생을 야무지게 챙기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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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동생과 달리 뭔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대학입시와 공무원 시험준비를 몇 년 동안 연이어 실패만 하다가 마침내 시인이라는 꿈을 찾고, 20대 후반에 동생의 도움으로 야간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시인이라는 꿈을 위해 딱히 노력하진 않는다.

남들은 시인에 등단하기 위해 고시공부하는 것처럼 노력하는데, 그녀에겐 그런 열정이 없었다. 그냥 취미 동아리 수준 정도의 시도만 하면서 시를 못쓰게 된 경위를 가족을 위해 집안일을 하는 탓으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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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관점에서만 보면 면 숨이 턱턱 막힐정도로 정신이 없고,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포기하면서 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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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족 그 누구도 '나'에게 희생하라고 말하거나 강요하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자초한 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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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일상이 지독하게 힘들고 시인의 꿈을 간절히 이루고 싶었다면 가족과 상의하여 살림을 분담하거나 독립을 하는 등 진즉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허나 그녀는 그러질 않았다. 자신을 도와준 동생이 이제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 제 삶을 찾을 수 있도록 가정주부 역할을 맡았지만, 애초에 뭣도 모르고 각오도 없었던 탓에 제대로 해내지 못한채 속병만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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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순환만 반복되고 가족에 대한 원망만 깊어지게 된 이유로 첫째, 나의 자존감 부재와 깊은 열등감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야무진 동생과 비교당하고 부모님의 관심과 기대감없이 자란 그녀는 이미 자존감이 무너진 상태다. 게다가 주변 동기들은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동생은 다시 제 갈길을 찾기 시작했다. 반면 그녀는 재력, 학벌, 인맥 등등 뭐 하나 가진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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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 속에서 가족들에게 쓸모있는 존재로 다가가기 위해 희생을 자처해 집안 살림과 육아를 도맡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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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 가족은 서로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다. 큰 딸이 어릴 때부터 무기력함을 보인 다는 것은 분명 내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부모는 그런 그녀를 방치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둘째 딸에게만 주의를 기울였다. 집에서부터 외면 받았던 그녀는 회복탄력성을 잃은 채 자라게 되었고 마흔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무기력한 성인이 되어버렸다. 가족끼리 서로 관심을 주고 애정을 쏟았다면 그녀는 이런 식으로 가족을 위해 희생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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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가족끼리 대화가 너무 없다. 가족끼리 속내를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으니 여기저기서 가족들의 속 상처가 곪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고 무력한 나날을 보내고, 동생의 혼전임신과 가정폭력을 긴 시간동안 몰랐다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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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내 마음대로 살아봤으면 좋겠네."

"누가 살지 말래?"

나는 엄마를 쳐다봤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 데도 못 가는 건 결국 식구들 때문이었다.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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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힘들어서 한탄을 하는 소리도 그냥 넘겨버릴 정도로 그들은 가족간의 대화를 진중하게 나눠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대화를 조금이라도 나눴다면 이렇게까지 우울한 가족이 되지 않았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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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혼인과 혈연으로 이어진 집단이라고 하나 힐들 때 마음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돈때문에 싸우거나 서로에게 족쇄가 되는 존재를 '가족'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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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인공의 상황은 개인의 삶과 가족 공동체를 위한 삶 중 무엇에 더 중점을 둬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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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인공의 가족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장남의 성공을 위해 밑에 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일에 매달리거나 자식을 위해 부모가 자신의 인생을 받치는 등 가족을 위한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옛날처럼 맹목적인 희생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함은 느낄지언정 비난을 받는 시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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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가족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한다해도 가족이 책임져 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가족을 책임지느라 시를 쓰지 못했다고 해서 그에 대해 가족이 미안해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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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개인의 인생을 챙기며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선 가족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보이는 것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빙자한 희생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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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가족에 대한 분량이 더 많긴 하나 이 작품은 주인공의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가족에게 얽매여 살던 '나'는 갑작스럽게 터진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변화를 맞이한다.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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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든 시도해보는 게 의미 있다는거, 이미 언니도 잘 알고 있잖아.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말자. 그때 포기해도, 그 때 다른 길을 찾아도 돼.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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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머물고 있는 정류장 다음의 행선지가 어디가 될진 밝혀지지 않았으나, 마지막의 장면이야 말로 진짜 꿈을 향해 드디어 한 걸음 내딘 모습이었다. 늦은 시작이지만, 진정으로 자신만의 삶을 향한 그녀의 행보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 작정단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보통 박물관과는 성향이 조금 다른 박물관이 개관 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소설 '침묵 박물관'을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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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박물관 기사다. 고즈넉하고 작은 마을의 저택에 사는 노파에게 박물관 개설 의뢰를 받는다. 노파는 이 곳에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의 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설립하고 싶어한다. 거기다 마을에서 새롭게 죽은 이들의 유품을 훔쳐오라고 지시까지 한다. 당황스러워하는 나와 달리 노파는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관과 미신을 내세워 강경하게 밀고 나간다. 결국 박물관은 의뢰대로 진행이 되고 나는 노파의 양딸인 소녀, 정원사, 가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유품 수집 및 관리를 한다.

그러던 중 마을 광장에 폭탄테러 사건이 터지며 소녀는 중상을 입는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에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주인공은 형사들의 추궁을 받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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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박물관은 늙은 세상의 안식처가 될 거야.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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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겉표지 디자인만 보고 몽환적인 어른이 동화거나 일상 힐링물이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전개와 소재가 처음의 기대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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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잔잔하고 따뜻한 면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유품을 전시한다는 발상으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더해 기묘한 분위기도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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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마을 사람들의 유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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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전시하고, 보존하는 박물관을 만들어주었으면 해."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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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스러웠지만 달리 생각하면 역사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 옛 유물들 또한 선조들의 유품이라는 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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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충격적인 것은 수장품이 박물관에 오는 과정이다. 유족에게 기증이나 양도받는 등의 합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몰래 훔치는 방식이었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행동해서 그런지 아니면 유족들이 관심이 없어서 그런건진 몰라도 이 범죄는 들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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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왜 이렇게까지 망자의 물건을 모으려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저 단순히 그녀의 달력이나 물건에 영혼이 담겨 있다는 미신을 맹신해서 그것을 구해내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추측이 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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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침묵 박물관이 붕괴된다면 마을 사람들의 육체의 증거는 어떻게 보존하겠어? (p.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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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은 죽은자의 과거를 담는 동시에 이 세상에 살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죽어서 육신이 곁에 없다해도 유품이 남아있는한 세상에 남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죽은자의 흔적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존재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는 한 이는 완전한 죽음의 끝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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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노파는 이를 알기에 별볼일 없어 보이는 유품일지라도 특별한 감정을 품고 보존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많은 연고자를 두지 않고 죽음을 앞둔 그녀였기에 침묵 박물관이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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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박물관 이름을 유품 혹은 추모 박물관이 아닌 침묵 박물관으로 정한 것일까. 이는 이 마을의 침묵의 전도사와 관련이 있어보인다. 이들은 흰바위들소의 가죽만 입고 평생 묵언수행을 한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면 침묵 속에 묻힌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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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기나 긴 침묵을 위해 육체를 버리고 마음 속으로 망명하는 전도사들과, 사연은 가득하지만 영원히 침묵할 수 밖에 없는 박물관은 비록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다를지언정 침묵한다는 점에서 같은 양상을 지닌다. 죽음과 수행 앞에선 저절로 침묵할 수 밖에 없다.

묵언수행 중의 마음과 유품에 대한 태도가 경건해야 한다는 것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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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하찮은 유품이라도 경외심을 갖고 가슴에 품으려는 겸허함이 없으면 박물관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아. (p.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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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특성상 '침묵'이라는 단어는 잘 어울릴 수 밖에 없어서 이런 이름으로 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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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마을에서 눈물 아가씨를 뽑아, 울면서 겨울이 오지 않게 비는 '울음 축제'라는 독특한 행사를 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빌어도 겨울은 온다. 겨울이 오면 마을의 사람들과 흰바위소들 중에서 꺼진 생명체들이 나온다. 그리 열심히 울어도 결국은 겨울을 피할 수 없는것처럼 죽음도 그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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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든 무생물인지에 상관없이 우주 안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언젠가 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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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죽음은 공평하다. 죽음의 본질을 반영한듯 침묵 박물관의 수장품은 그 물건 주인이 누구였든 가치에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이 대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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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유품을 남긴다는 노파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p.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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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피할 수 없는 끝, 그 끝에서 누구나 물리적 혹은 정서적인 흔적을 남긴다. 남겨진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만든다. 몸은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존재감은 계속 남아있다.

위인들은 죽은 후에도 생전의 이름과 업적을 남긴다. 생에 옳은 일을 많이 할수록 세상에 남겨진 이들의 마음 속엔 좋은 사람으로 남아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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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달리 말해 추상적 혹은 정서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삶이 이어진다는 것과 같다. 영원한 안식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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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뜻하는 것처럼 죽음이 온전한 끝이 아니라면 그 너머를 위해 지금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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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소설엔 여러 범죄가 나오나 추리 소설의 형식을 갖춘건 아니다. 침묵 속에 굴러가는 세계인지라 범인을 잡는 과정에 중점을 두진 않는다.

대신 묵직한 주제를 던져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