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디자이닝,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세계.
어제 읽었던 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선 공통점을 보이고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확실히 다르다. 더 인간적인 면이 보이고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으며 특히 저자의 글솜씨에서 풍기는 재미가 적잖이 쏠쏠하다.
출판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아트 디렉터이자 이 책의 저자인 홍동원. 디자이너라면 의례 생각하게 되는 깔끔하고 말끔한 이미지와는 달리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과 수염이 그려진 자신의 삽화에서 마치 이웃집 형님을 연상케 한다. 홍대 대학원 시각디자인 학과를 졸업 후, 어린 나이에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추천작가로 추대되고, 대학에서 하던 강의를 그만두며 독일로의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2년 차에 또 때려치우고 국내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려 아트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다소 민망한 제목이지만 저자가 말하는 이 뜻은 얼토당토 않은 디자인을 요구할 때의 상황을 말한다. 이 책에는 디자인에 대해 쉽게 설명되어 있다. 아니 디자이너들의 애환과 클라이언트, 디자인 등에 관한 에피소드가 수필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어 누구나가 쉽게 근접할 수 있다는 점이 어려운 디자인 관련 전문서적과 다른 이유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의 능변이 어려운 디자인의 내면세계를 쉽게 풀어갔다는 것이 책의 주안점이라 하겠다. 물론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거기에 주저리주저리 양념까지 얹혀 있음을 상상해 보라.
많이 보아왔던 I♥NY로고가 뉴욕거리의 개똥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반대편에 있는 이슬람권에선 이 로고를 어떻게 변형시켰을까, 검찰의 명함 제작에 참여한 저자는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을까, 대학시절 만화책 속에서 찾은 아톰. 더이상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지 않는 아톰. 검인정 교과서에 대한 디자이너의 자세,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에 얽힌 사연, 짝퉁에 대한 단상 등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 책의 2편, 아니 3편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태세다.
또한, 그는 값싼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하는 클라이언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카피를 일삼고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무늬만 디자이너인 이들에게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두 팀장들과의 생활이 매우 공감을 이룬다. 나 그러한 생활을 해왔던지라 글을 읽고 상상만 해도 그림이 그려지기에.
기다림은 심심함을 동반한다. 컴퓨터에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게임이란 게임은 다 해 본다. 나는 게임의 고수가 되었다. 그래도 김 팁장은 내가 원하는 시간 그리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시간에 절대 맞추지 않는다. 자신도 그런 줄 안다.아는 놈이 더 무섭다. 자기가 시간을 딱딱 지킬 줄 알면 아트디렉터하지 뭐 하러 나와 일하냐고 대든다......본문 중
하나의 디자인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열정이 들어가는지 클라이언트들은 모른다. 자료수집으로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으며 국내는 물론 국외의 자료를 수집하는 노고가 이들의 열정이다. 이러한 노고가 하나의 작품을 잉태시킨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터무니없이 낮은 비용의 책정과 무리한 일정이 우리 디자인 업계 수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말만 하면 바로 튀어나오는 도깨비 방망이가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이들을 슬프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저자이자 입담 좋은 아트디렉터 홍동원. 그에게는 장이 만이 가진 고집이 있다. 우리의 것이 최고의 디자인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며 그의 말대로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시다바리도 아니다.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누구나가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흥미와 웃음 그 자체다.
한국엔 원래 디자인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중략....'빠다' 냄새에 빠져 살았던 내 청춘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 중
정말이다. 김 팀장은 건축가 승효상 선생이 베나스비엔날레에 초대받은 작업의 포스터를 만들고 있다. 김 팀장 입이 째진다. 모처럼 돈도 되고 재미도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p 296 (이 책의 마지막 글)
비둘기똥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