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읽는가. 

명화를 통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예술 서적은 가끔씩 읽지만 가뭄에 촉촉한 비가 된 듯 마음은 신선해지고 머리는 지적 상념들로 가득찬다. 마치 숲 속에 내리는 보라색 비처럼.

2. 책 뜯어 먹기

운전하는 게 귀찮아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곤 한다. 작은 움직임조차 허락되지 않은 꼭 여민 보자기 끈을 풀어헤치자 지하철역은 군중을 토해낸다. 무표정한 얼굴, 생기를 잃은 얼굴, 무기력은 따사로운 햇살조차 어찌할 수 없나 보다. 어깨와 등을 잔뜩 웅크리고 반복된 일상에 겨울과 봄을 그리고 여름과 가을을 교차하며 다람쥐처럼 변해버린 버겁기만 한 삶. 주말, 여름을 알리는 기운찬 해가 중천에 떠 있다. '그래, 이제 또 여름이 시작되는구나...' 보이지 않던 초록빛, 공원을 거닐며 공허한 마음을 온통 초록빛으로 채우고 나니 머리와 심장이 박동한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무엇 때문인가...

직장이라는 사회 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파(世波)에 시달리며 사회에 대한 편협한 시각과 우아한 노련미를 잃은 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겁이 덜컥 난 순간이 벌써 몇 번째이던가.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랑, 꽃, 들, 하늘, 향기 등 등한시해온 지난날들에 대한 유기만으로도 나는 유죄다.

불혹의 중반으로 치닫자 어느새 여유로움은 공허(空虛)를 관통(貫通)하고 마음속에 들어앉았다. 전시회, 공연 등 예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고 아이와 함께 도록집을 사모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집착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게 있어 이 집착은 더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벗으로 삼고 싶다. 몇 년 전부터인가 국내에 초청되어 열리는 수많은 유, 무명작가들의 전시회는 유년시절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아내와 나에게 헤어지기 아쉽지만 긴 여운을 뿌린 준 세기의 만남이었다.

'그렇구나... 살다 보니 이젠 별것이 다 보이는구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 땀 한 땀 공부를 하다 보니 물감과 여백, 붓과 펜의 터치, 그리고 세월의 조화를 머금은 작은 작품 안에는 역사와 정치, 타락과 고락, 미와 추, 사랑과 이별, 눈물과 미소 등 인간 오욕과 만물이 걸어온 벅찬 역사가 스며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감상법과 턱 하니 스치고 가는 영감도 없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주눅이 들지 말고 자기만의 느낌과 생각에 솔직하며, 떠오르는 대로 상상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는 것, 그것이 앤서니 브라운이 말하는 작품 감상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또 함께 나눌 수도 있는 생기발랄한 즐거움이 바로 예술 작품의 소중한 가치이며 힘이라고 말한다.

작품과 작가의 세계를 몰이해 하는 일반인과 청소년을 위한 [역사가 기억하는 세계 100대 명화]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무지와 빈곤을 일갈(一喝) 해소시켜 주는 도판집으로 걸작 회화 100점을 선별하여 작품별로 재구성, 미술을 넘어 문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인류 문화 전반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데 도움을 주는 도서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학문적인 요소가 주를 이룬 이은기/김미정 님 저(著)의 [서양미술사]나 그에 비해 동(動)과 선(線)적인 측면에서 다소 용이로운 [유럽 미술의 거장들]과 같은 맥락이나, [역사가 기억하는 세계 100대 명화]는 매우 깔끔하게 이해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하게 평가한다.

15~16세기 초반 기하학적인 방식에 따른 원근법을 확립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라파엘로(아테네의 학당), 티치아노(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와 희망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표현한 카라바조(성 마태오의 소명), 그리고 렘브란트(니콜라스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들라크루아)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7세기의 반 다이크(사냥터의 찰스 1세)에서 19세기의 밀레(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르누아르(이렌 카앵 당베르 양의 초상), 반 고흐(별이 빛나는 밤)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대한 명성은 현세(現世)까지 가슴 떨림으로 남아 있다.

3. 인상 깊은 구절

드가는 "예술을 통해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결국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예술이다."라고 했다.... [서언]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일렬로 서서 발포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이미 총을 맞아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과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사람들이 있다.... [p.162]

어린 아기는 이 참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미 숨이 끊어진 엄마의 가슴을 더듬으며 젖을 찾고 있다.... [p.181]

4. 끄트머리

미술 작품 전시와 감상, 얼마 전만 하더라도 특별한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스러움으로 여겨지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네 부모님은 일제 점령기와 동족상잔과 가난으로 대변되는 보릿고개로 고단한 외줄타기의 삶을 지나오셨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파생된 예술 개념의 부재와 짧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자식들에게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지 못한, 오만한 사치라고만 치부해 왔던 시절이 있었기에 한숨 돌려 돌이켜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예술 작품에 대한 정서적이고 교육적인 측면 모두에서 사유의 폭이 넓어진 축복받은 세대이다.

예술 작품의 감상은 과학적, 분석적인 접근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상하고 마음으로 온 느낌을 체득(體得)하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감상법이다. 작품에 대한 깊은 감동을 다시 상상하고 또다시 깊은 사색에 잠겨 비로소 나만의 작품으로 태어날 때, 마음속 기저(基底)에 이르는 공명(共鳴)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소담한 공원에 설치된 마을 공지란. 지나치다 '어린이 미술 대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미래의 꿈나무 화가를 상상하며 맑은 하늘 보며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