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바보멍청이 엄마를 떠나 가출한 일곱살 여자아이. 하지만 단순한 가출소녀라고 할 수 없는 비범함이 그 아이에게는 있었습니다.

신학과 철학, 수학, 시문예, 원예에 조예가 깊은 일곱살짜리 여자아이라니.. 도대체 상상이나 가시는지.. 우리 아이랑 비슷한 나이인데 도저히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나이또래에서는 절대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픽션이라면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에 힘입어 탄생된 캐릭터로 이해할 일이지만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픽션이 아닌 실화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핀이 스무살때 만났던 일곱살짜리 여자아이인 안나와의

이야기를 그린 실화라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했을거 같지 않지만 엄연히 실존했던 아이의 말과

행적이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미스터 갓'이라고 부르는 거침이 없는 당찬 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곱살 꼬마 아이. 왠만한 어른의 수준도 뛰어넘는 이 당돌한 천재아이는 어른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핀과 안나는 얼핏 봐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평범하지 않고 세상의 잣대로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괴짜스러움이 통하는 두 사람은 엄청난 나이의 간격도 좁힐 수 있을 만큼 서로에게 끌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사랑 안나'라는 제목으로 시작을 합니다.

핀이 안나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구절이 곳곳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아마도 플라토닉 러브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나와의 만남이 있은지 30년이 흘렀음에도 그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3년간의 일들을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를지라도 안나같은 아이와의 일들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안나의 솔직하고 심오하고 기발한 말들을 이렇듯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저자 핀의 능력도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서구에는 종종 있었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나 <모모>가 우선 떠오르네요...

하지만 실존했던 안나의 실화는 다른 소설들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과 천사의 차이는 별거 아냐. 천사는 대부분 속에 있고 사람은

거의가 바깥에 있거든." 이라며 안나는 말합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똑 부러질만큼 남다른 아이.

여섯살때 이미 삶의 목적을 알고 있는 야무진 아이였고 '미스터 갓'의 친한 친구이며 조력자인 안나는 아홉살이 채 못되어 사고로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일곱살짜리의 순수한 감성과 영혼, 웃음,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일 밤마다 '미스터 갓'인 신에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친구에게

하듯 말하는 안나는 천사의 영혼을 닮은 아이였습니다.

'미스터 갓'이 자신을 하늘나라에 받아들여 줄것이라는 안나의 확신처럼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자신의 절친인 '미스터 갓'을 만나 늘 그랬듯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왕자가 현실세계에 환생한 듯 실존했던 안나의 이야기는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천재들이 대부분 그렇듯 너무도 어린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어린 아이의 짧디 짧은 생애동안 우리에게 전하려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안나의 절친인 '미스터 갓'이 이 세상사람들을 위해 임무를 맡겨 안나를 이 세상에 잠깐 내려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속마음부터 사귄 안나와 핀처럼 나이를 극복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어른들이 생각 못하는 세상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잠시 다녀갔던 현자로서 비범했던 아이의 영감어린 메시지를 통해 이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나의 무덤가에 피었다는 양귀비꽃이 눈에 선하고 보고 싶어집니다...

 

 

 

 

 

Hi, 미스터갓

북미 최고의 단편작가이면서 단편작가로서는 최초로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느낌은 알폰스 무하의 그림에서 가져온 듯한 서정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여성의 이미지의 느낌과 많이 닮았습니다.

표지의 화려하지만 절제된 세가지 색과 모양의 꽃들과 우아한 아르누보풍의 곡선미를 보여주는 나뭇잎의 모습은 이 책의 이미지와 분위기와 어울리면서도 더욱 매력적으로 보여 특히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제목과 표지디자인에서 여성적 취향의 소설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전소설을 제외한 현대문학을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 거의 현대소설을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저에겐 참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첫번째 이유는 책의 제목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집약해 나열해 놓은 듯한 제목이 인상적이었고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빨려들듯한 흡입력을 지닌 표지 디자인 또한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동안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가 되고 서점가에는 수상 작가의 작품들이 봇물을 이루지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죠.

그런데 이번에 보게 된 소설작품의 작가가 지난 해의 노벨상 수상자라니 다시금 놀랍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제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인 셈이죠..  

 

이 책의 표제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과 <어머니의 가구>,<위안>,<곰이 산을 넘어오다>등 총 9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짧은 단편속에 어떻게 그처럼 장편같은 복잡한 삶의 이야기들을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작가의 섬세한 관찰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물 위의 다리>나 <기억>은 마치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떠올릴 정도로 우연한 기회에 시작된 짧지만 격정적인 사랑을 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어 여성의 삶속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심리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토리뿐 아니라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색채가 많이 흡사합니다.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읽다 보니 왠지 익숙한 스토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전에 본 영화의 원작이었어요.

알츠하이머에 걸린 부인을 요양원에 보낸 노부부의 이야기였는데 'Away From Her'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남편 그랜트가 치매에 걸린 부인 피오나를 요양원에 보냈는데 면회를 할 수 없는 한달동안 부인은 남편을 까맣게 잊게 됩니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만난 오브리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오브리가 떠난 후 나날이 쇠약해지는 피오나.

그걸 보면서 그랜트는 아내 피오나를 위해 그 남자를 다시 요양원으로 데려 올 생각까지 하게 되고...

자신이 남편인 것을 기억속에서 모두 지워버리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를 보는 남편의 마음은 어떨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서구 작가들은 세심한 묘사와 이야기를 잔잔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특징인데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국내 소설의 반전과 긴장감이 주는 임팩트강한 짜릿함에 익숙한 독자들은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아마도 지루하기도 하고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생소한 시대적,지리적 배경과 우리에게는 낮선 서양의 정서들이 합쳐져 작품을 깊이 있게 파악하는데 더 어려움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직역을 해놓은 외국작품을 읽을 때의 느낌같은 우리 정서엔 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앨리스 먼로는 처음부터 등장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고 독자가 천천히 읽으면서 곱씹어 보고 인내심을 가지고 읽다보면 인물들의 인과관계가 이야기속에서 차차 이해가 되면서 몰두하게 되는 그러한 특징이 있습니다.

 

단편 한 작품 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져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범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만은 인물들이 겪는 각각의 독특한 상황들 속에서 묘사되는 인생의 소용돌이와 운명적인 선택, 감정과 심리의 표현이 풍부한 작가의 탁월한 천재성은 여성심리묘사의 장인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읽은 단편소설이었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먼로의 작품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떠나 여자의 느낌을 잘 살릴 줄 아는 작가의 섬세한 소설을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