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대부분 좋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만난 남녀의 결혼과 부부생활도 총명하기 그지없던 자식의 죽음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자식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정신적 고통에서 살기도 한다. 자신들의 출세욕때문에 팽개친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있다는 부모는 착각하지만 때로는 상처덩어리의 괴물아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내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세월과 함께 그저 그런 세상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노숙자의 삶을 택하는 남자도 있다. 어려운 시절 어머니를 도와 경제적 책임을 넘겨받아 동생들을 뒷바라지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삶의 끈을 놓아버린 어떤 장남의 얘기와 그 아들을 바라보는 늙은 노모의 이야기도 희생뒤에 남는 비참한 삶의 나락이다.

 

 

 

이렇듯 소설집 <맨밥>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세상과의 끈을 힘겹게 이어가다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어두운 인물들이다. 첫 단편인 '짖는 아이'는 충격요법이 제대로 먹힌 작품인 것같다. 아이를 예뻐하는 상냥해 보이는 이웃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정말 좋은 보모를 만났다고 착각하고 사는 맞벌이 부부. 처참하게 인정사정없이 휘둘린 아이는 거의 괴물의 성격을 갖게되고 만다. 이 아이가 고층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로 자신의 물건들을 떨어뜨리다가 마침내 가정부(그녀역시 자신의 아이는 돌보지 못하고 혼자 방에 두고와야하는데)를 밀어버리는 장면은 소름이 확 끼치게 한다. 직장을 그만두고싶지 않은 직장맘은 지금도 무수한 자기합리화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있을 것같다.

 

 

 

이 작가의 서술방식은 자의든 타의든 어그러진 퍼즐을 제대로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헝클어진 채 속을 태우고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또는 소설속 화자의 시점에서 처절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식물의 시간'에 나오는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 깨어난 남편은 아내라는 여자와 과거의 자신의 삶이 서서히 기억되기 시작하지만 끝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바로 그 자리에 올라가 다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깨어나 기억을 되찾게 되지만 그는 이제 더이상 세상의 짐을 짊어질 힘이 없을 뿐이다. 다시 살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가 또다시 삶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만드는 심연의 정체는 무엇일까?

 

 

 

'매직아워'의 주인공은 신체적 결함을 안고 있으나 자신이 중졸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야학에서 예쁜 미술강사 서은정 선생을 만난다. 자신도 방통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5년뒤 다시 만난 그녀는 집안 사정으로 갑작스런 파혼을 겪게된 후였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영화의 줄거리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들어본 얘기같다. 그만큼 있을법한 줄거리로 다가오는데 고왔던 그녀는 어느 여자들과 다름없는 극성엄마에 돈독이 오른 중년부인이 되어갔고 자신은 점점 현실적응력을 잃어가고 결국 노숙자로 살아간다. '돌산'에 나오는 잘나가는 시인이자 교수인 윤승혜의 남편 정원태도 아내의 차선의 선택으로 만난 남자였고 출판사등 사업을 벌여보지만 실패한 인생으로 전락한다. 각방을 쓰던 침대에서 남편은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윤승혜는 자신의 뱃속에 들어있다는 담석이 자신이 20년간 남편에게 쌓아온 돌산처럼 느껴진다.

 

 

 

'맨밥'은 처가의 갈비집을 물려받아 자립한 주인공이 동생들을 위해 희생한 형의 삶을 돌아보고 또한 똑같이 형과 함께 생활을 책임지며 늙은 어머니의 모습과 임종에 이르는 시간을 더듬어가는 과정이다. 술을 못끊고 폐인이 되어가는 맏아들을 걱정하며 가난한 자식집을 떠나지 않는 어머니. 자식이 힘들어지고 가난하면 자신에게 손벌릴까 두려워 연을 끊고 사는 노모와는 전혀 다른 어머니다. 오히려 없는 자식이 걱정이 되어 그 자식곁을 지킨다. 어머니는 형이 입원을 해 죽을 고비를 넘겨도 따뜻한 맨밥 한그릇을 준비한다. 자식이 눈을 뜨고 자신이 지은 밥을 찾을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 어머니는 형이 죽은 뒤에도 주인공 아들집에서 어려움없이 잘 먹을 수 있음에도 늘 맨밥 한그릇과 된장 한 종지를 두고 식사를 했다. 힘든 시절 희생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연대가 있다. 온 가족, 온 친척의 뒷 치닥거리를 하면서 살아온 주변의 보통 사람들도 주인공 형처럼 인생의 무게를 어느 순간 놓아버린다. 그런데 그 짓눌린 무게만큼의 지나온 인생에 대해,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오히려 너무 나약하다고 종종 비난하곤 한다. 그래서 갈비집 사장님의 형에 대한 따뜻한 이해가 좋고 그 무게를 몸소 함께지려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가득한 시선이 보기 참 좋았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13년 전망이 나왔다. 2013년의 트렌드 요약어는 레슬링의 한 기술인 코브라 트위스트다. 2007년부터 매회 꾸준히 트렌드라는 기준으로 한 해가 마감되는 연말즈음에 그 해를 분석하고 다음해를 전망하는 작업을 해 온 서울대 생활과학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선생 등 학자들의 올해의 결실이다. 세상이, 정말 한 두마디로 시대의 현상들이 요약된다는 건 어불성설일 듯하다. 급격한 문명의 이기들의 발전덕을 보고 있는 우리 시대뿐 아니라 따지고 보면 역사의 어느 시대고 할 것 없이 혼돈과 변화의 시대로 기록될 수 있었다. 지난 시기의 복잡한 변화의 면모를 몇개의 가닥으로 구심점과 조력 요인들로 구분해내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가의 일이겠는데 당장 올해와 다가올 해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은 누구의 몫일까.  연말이면 각 분야별로 연감형식의 글들이 연초에 청탁되었던 저자들에의해 씌여지곤 한다. 이제는 각종 소비의 주체로서의 삶에 푹 빠진 현대인의 삶의 모습의 추이를 진단하는 일도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저 복잡다단한 정보홍수속에서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떤지 그려내기가 막연한 일반인들에게 이런 트렌드 분석의 제시는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책은 2011년에 전망한 내용들을 분석한 전반부, 2012년의 분석 부분과 2013년을 전망한 후반부로 나뉘는데 2007년 이래, 몇가지 트렌드들을 설명하는 핵심단어들의 선정과 그 단어의 첫 알파벳으로 만든 한 해의 대표 트렌드 요약어들은 의도적인 맞춤이 아니었을텐데도 딱 떨어지는 표현력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용의 해와 뱀의 해를 염두에 둔 한 해 트렌드 요약어는 얼마나 깊은 궁리의 과정을 거쳤을지 노고를 칭찬하고 싶다. 물론 책 뒤의 모집광고에서도 보듯이 실제 연구진들 뿐 아니라 수많은 트렌더들의 참여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일선에서 각 분야의 트렌드 찾아내기를 염두에 두고 한 해를 열심히 살아낸 트렌더들의 힘이 반은 차지한 결과물일지 모르겠다.

 

사실 2013년의 전망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지만 2012년의 분석이 훨씬 흥미로웠던 이유는 지난 시간의 여러 사례가 그 트렌드예측을 증거하듯 잘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너 세상밖으로라는 키워드에는 싸이의 예가 제일 먼저 언급되었다. 한물간 스타나 무명배우를 기용해 대중적 소재의 싸게 만든 영화라는 비급 영화에서 비롯한 비급 문화는 에이급도 부러워하는 문화가 되었다. 마이너의 미덕은 다름의 접근방식과 디테일한 전략,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뚝심이다. 자생 자족 자발이란 키워드에서는 백화점에서 사치품 매출이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자동차 구매패턴 역시 2007년대비 보유한 차보다 큰 차로 교체하겠다는 응답이 3.3프로 감소했다고 했다. 중고시장에 나오는 제품이 화장품이나 패션제품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조사도 나온다. 그런데 실제 체감 분위기는 꼭 그렇지많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활기를 띠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코브라 트위스트로 나타내진 2013년의 키워드들은 날선 사람들의 도시, 난센스의 시대, 스칸디맘이 몰려온다. 소유냐 향유냐, 미각의 제국, 시즌의 상실, 디톡스가 필요한 시간, 소진사회, 적절한 불편이다. 소유냐 향유냐 같은 핵심어는 구태여 2013년의 키워드라는 당위성에서 다소 벗어날 수도 있겠고 스칸디맘 역시 일부 부유계층의 현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디톡스라는 표현이나, 소진사회, 적절한 불편이라는 시각의 제시는 트렌드 예측또한 단순한 예측을 넘어서 사회진단과 반성의 기능을 겸할 수 있다는 희망적 측면을 보여주었다. 누구나 그럴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들을 하지만 이렇듯 콕콕 집어 속시원하게 분석하고 예견해주니 세상이 잠시 정돈되어 보여진다. 좋은 책은 원래 우리가 뭔가 말하고 싶지만 뚜렷한 실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명료하게 드라내주는 책이다.

인터뷰이건 본인의 저술이건 촘스키의 책은 국내에서도 많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벨기에 루벵대학교 교수인 장 브릭몽이 촘스키와 대담후 편집해 낸 책이다. 그는 전쟁과 제국주의에 관련한 문제에 관심을 가진 학자이며 촘스키와 협력해 진보적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행동주의자라고 한다. 책은 크게 세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은 2009년, 2,3장은 2001년에 이뤄진 인터뷰이다. 1장은 남용되는 권력, 2장은 인간본성과 정치, 3장은 과학과 철학이란 소제목이 번역후 편집과정에서 붙여졌는데 이야기의 주제들이 각 장에서 조금씩 중복되거나 중첩되어지기도해 다소 임의적인 느낌이나 인터뷰의 중요 핵심주제를 짚어주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브릭몽이 서문에서 언급하듯 이 인터뷰는 인간본성과 진보, 혁명과 무정부주의, 시장, 표현의 자유, 철학과 지식인, 과학과 종교 맟 윤리에 대한 촘스키의 생각을 이해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촘스키의 다른 책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무엇보다 촘스키만큼 구체적 사례들에 능통한 국제정세 전문가는 없을 것같다는 점이다. 미국과 관련된 세계 어떤 분쟁지역의 사정도 소상히 꿰뚫고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막연한 이론적 틀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특정지역에 대한 세세한 자료들을 섭렵한 후에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그의 지적 계승자 그람시, 루카치, 사르트르, 푸코, 부르디외, 지젝 모두가 사회구조, 권력, 이데올로기, 계급분열, 정치의식, 사회변화등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반해 촘스키는 어떠한가라는 브릭몽의 질문에 촘스키는 마르크스외의 다른 이들은 '이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글이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대안들은 장기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단기적인 목표까지 아우른다고 했다.

 

위에서 '이론'이란 말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기존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의 의미에 따라 촘스키의 생각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방해받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된다. 그만큼 촘스키가 말하는 용어의 정의에 대한 분명한 통찰이 있어야하는데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그 말과 관련한 익숙한 사건이나 관념에만 근거해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20세기 사회주의를 파멸로 몰아넣은 최악의 적이라는 촘스키의 말도 '사회주의'란 말의 수많은 함축성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청탁받은 한 좌파계열의 신문에 '사회주의를 배반한 소련'이라는 글을 기고했다가 퇴짜맞았던 반면 무정부주의 계열 신문사에선 흔쾌히 받아 주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촘스키가 이해하는 사회주의는 생산을 비롯해 삶의 여러부분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제도이다. 한편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그의 또다른 입장은 브라질이나 과테말라처럼 서구 발전 모델을 어쩔 수 없이 채택한 나라와 비교하면 사회주의나 계획경제의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만 없다는 이유에서 나온다. 이런 촘스키의 시각에 동감이 되는 이유는 어떤 편견에도 치우치지 않는, 어떤 이론에도 안주하지 않는, 어떤 것에도 절대주의적 관점을 취하지 않는 실천적 이성의 산 증인으로서의 모습때문인 것같다.

 

 

2008년 금융위기이후의 상황에 대해 촘스키는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의 결합의 중요성(로맹 롤랑과 안토니오 그람시의사상에서 빌려왔다는)이란 표현을 썼다. 윤리의식의 성장에 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지만 촘스키의 태도는 진보적 발전의 가능성에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가능성을 완전히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촘스키는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상황은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그는 인간에게 본성이 있는 것은 확실하나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육신을 벗어날 수 없듯이 도덕적이고 인지적인 그릇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그릇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창시자로 촘스키는  자연사학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표트르 크로프트킨을 들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는 진화의 주된 요인이며 진화는 공산적 무정부주의로 자연스레 진행된다고 했다. 다윈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의 추론이 바람직하지 않은 결론을 낳는다해서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촘스키는 현재의 추론이 크로포트킨의 추론보다 더 근거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촘스키는 이기주의가 인간의 본성의 중심이라는 이론들은 동네의 병약한 과부를 먹이고 돌봐야하는지, 건넛집 아이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해야 하는지 따지는 일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는데 한편으로 나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즉 인간 본성이 이타적임을 강조하며 상호부조를 자율로 맡김으로써 소득재분배라는 개입을 소홀하게 할 수 있는 점은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것이다. 찰스 다윈과 러셀 월리스는 둘 다 진화론의 창시자이지만 월리스는 인간의 본성을 자연선택만으로는 설명하기에 부족하며 다른 과학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촘스키는 우리가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회의 형태나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동물의 세계에서 얻을 만한 교훈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의 깨어있는 정신을 강조한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사회생물학의 전언에 익숙해버린 내게는 다소 설득력이 부족해보이는 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