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놓지않고 계속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매 페이지마다 글씨가 매우 빽빽한데, 무척이나 잘 넘어갈 뿐더러 담고 싶은 것들이 꽤나 담겨있다.12살 진희라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소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 삶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시선 뒤에 진희가 서 있고 진희 뒤에 선 독자는 조용히 진희의 이야기를 바라보게 만드는데, 이런 구조가 이 책을 더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것 같다.

 

12살이면 초등학교 5학년이다. 60년대의 12살과 지금의 12살은 사회적 배경은 물론, 경제적 환경까지 판이하게 달라 그 성숙함이 과거의 시대만 못한건 사실이다. 허나 12살 소녀의 이야기 치고는 맹랑하기도 하면서, 어찌보면 너무도 일찍 삶의 이면을 알아버린 것 같아 좀 짠하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독자는 진희보다 한참 어른인데 전혀 어른같이 느껴지지 않아, 똑같은  사건속에 나를 내던지고 나의 행동 변화를 살펴보기도 한다. 감정의 동요가 일때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철저히 분리시키는 장면에선, 어른보다 더 냉철한 이 아이가 소설속 주인공이긴 하지만 감당이 안되기도 한다.

 

진희의 시선안에는 작은 마을이 등장하고 그 안에 사람들이 등장한다. 할머니, 이모, 광진테라 아줌마와 아저씨, 미스리 언니, 이모친구 경자, 장군이 엄마, 장군이, 깡패 홍기웅, 허석, 이형열등, 등장인물 저마다 특색이 뚜렷하고 다양한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진희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들의 삶 속에는 사랑, 이별, 배신, 미운정, 고운정, 말로는 정의내리기 힘든 우리네 짠한 삶의이야기가 들어있다.

 

조금은 철이 없던 이모가 사랑과 이별, 배신이라는 성장통을 겪어가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읽는이로 하여금 통증을 느끼게 한다. 매일 폭력를 일삼는 남편을 두고 도망을 가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 다시 남편의 품으로 돌아오는 광진테라 아줌마의 모습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을 본 것만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그런데 왜 이런 답답함에 공감이 갈 수 밖에 없는지..

 

겉모습을 냉소로 똘똘 무장한 진희라는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군이를 이용하는 장면 또한 밉지 않았다. 첫사랑 허석을 향한 진희의 독백은 독자의 어릴적 추억을 자아낸다. 나 또한 꼬맹이 때 나보다 한참 어른인 사람을 마음에 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참, 그냥 꼬맹이 때의 추억으로 간직될 만한 그런 첫사랑이 아닌 듯 하다. 그 어린 나이에, 본인의 입을 통해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새의 선물을 통해 난, 이 작가에게 반해버렸다.

 

 

은희경, 새의선물

 

 

가끔씩 방안 정리를 할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어느 한켠 신주단지 모시듯 박스안에 고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창시절부터 현재까지 받은 편지이다. 그리고는 아주 가끔씩 꺼내보고는 한다. 그 안에 활자를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느세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회상에 젖어있는 나를 발견한다. 요즘은 편리한 네트워크 구축으로 실시간으로 메일을 보낼 수도 확인 할 수도 있으며, 언제 어디서건 문자 서비스로 대화도 가능해 졌다. 이런 편리함 뒤에 점점 숨어버리고 있는 그 옛날의 향수가 묻어나는 것들이 그립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진심을 전하고자 할 때 편지지와 연필을 꺼내 들고는 한다. 소통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편지만큼 진심을 전하기에 따뜻한 매개체가  또 있을까.

 

조금은 얇은 다이어리 두께의 <더 레터>라는 이 책은 나희덕 시인과 장석남 시인이 주고 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두 시인이 주고 받는 총 서른통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계절이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속에 어느세 나를 내맡기고 있음을 느낀다. 눈이 오는 산골짜기 깊은 곳에서의 하얀세상을 만끽하기도 하고, 고요한 산속의 울림속에 눈을 감고 명상의 시간을 가져 보기도 하고, 옥수수 밭이 비로 축축히 젖는 느낌을 느껴보기도 하고, 매미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에 어느세 나 또한 여유라는 것을 품어 보기도 한다.

 

작년인가 <채링크로스 84번지>라는 책을 읽은적이 있다. 저자와 헌책방 주인이 공간을 초월하여 20년간 우정을 쌓으며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구성의 책은  같은 공간에 함께 있지않아도 꼭 함께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두 시인이 다른 장소에서 자연이 변화하면서 느끼는 관찰속에는 자연이 곧 삶이라는 오묘한 진리가 숨어있는 듯 하다. 문학적 소양이 얕은 독자라 두분의 담소와 중간 중간에 담긴 여덟편의 시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이 안에는 아주 작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진화되고 있는 시대의 씁쓸한 고독함도 느껴진다.

 

어찌 보면 집을 떠나 낯선 방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들여다보며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극하긴 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마음 깊이 던져 볼 수 있는 것도 그 막다른 방이 안겨 준 선물이겠지요. 13p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으면서 감정표현에 충실히 살아가고 사람이 얼마나될까? 언제인가부터 울음이라는 감정 표현은 타인에게 비춰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강박에, 울고 싶을 때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처럼 스스로 만들어 낸 강박을 내려놓지 못하고 무겁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잠시 모든것을 내려놓고 명상을 가져보는게 어떠냐고 권하는 느낌이다. 진정한 배움과 성장은 치열한 경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성찰의 시간 안에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준다. 몇시간안에 다 읽고 덮어버릴 수도 있으나 언제든 한통의 편지씩 꺼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더레터, 좋은생각, 나희덕, 장석남, 편지모음집

 

 

좀 더 부담없이 사진을 찍기 위해 작년 봄에 필름 카메라를 고이 박스안에 담고 디지털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내게 변화한 것이 있다면 셔터를 누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고, 찍는 횟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에 와 닿는 사진 한장을 만나기가 아나로그 때 보다 녹록지가 않다. 바로 눈으로 확인이 되는 디지털의 세계는 보여지기에 더 담기가 어려워진 것 같다.  

 

촬영부터 편집까지 너무나 무궁무진한 디지털의 세계는 배워야 할 게 참 많은 듯. 그래서인지 매년 많은 DSLR 관련 도서가 출판된다. 그 많은 도서중에서 <좋은 사진을 만드는 김주원의 DSLR 사진 강의>라는 책을 만난건 크나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찍어도 찍어도 맘에드는 사진 한 장 나오지 않는 요즘, 처음 사진을 배운기 시작한 그때보다 못한곳에 멈춰있는 나에게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정사각형의 사이즈에 보들보들 매끈한, 약 520페이지 두께의 묵직한 첫 느낌이 참 좋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진가의 마인드는 이 책을 더 끌어 당기게 한다. 

 

사진이 전하고자 하는 다양한 메세지가 있겠지만, 저자가 전하는 사진과 글에서 전체적으로 본인이 느낀점은 진정한 소통과 따뜻한 배려였다. 사진에 대한 기술적인 측면을 익히기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슴 저 끝트머리에서 코끝까지 뭔가가 치고 올라오게 하는 책과 음악, 영화를 종종 만나고는 한다.  굳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 어떤 감흥을 불러 일으키려고 했다, 라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무엇'을 느낀다. 사진 또한 단지 기록물의 의미가 아닌, '그 무엇'을 가진 하나의 감정매체일 것이다.

 

사진의 기본적인 이해, 빛, 색감, 구도, 느낌, 스토리, 포트폴리오, 포토샵등으로 구성된 이 책을 차근 차근 넘기다 보면 가슴을 쾅 하고 울리며 공감을 갖게 되는 '그 무엇'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무엇' 은 시름시름  의기소침 해 있는 사진 열정을 서서히 솓구치게 한다. 지금의 나의 사진은 이십대 초반, 처음 사진을 배웠던 때의 정형화 된 틀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진을 더 느낌있게 찍고 싶은 사람이나 정형화 된 그 틀안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사진과 감성을 불러 일으키기에 좋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또한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촬영시간까지 세밀한 팁을 제공 해 다양한 사진을 찍어보면서 공부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부연 설명 없이 사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은 기술관련 팁을 배우려는 독자에게는 뭔가 좀 부족하고, 또 사진은 적고 글이 빽빽한 책은 좀 넘기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책은 감성을 자극하는 사진과 그에 따른 내용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500페이지가 아까우리만큼 어느세 훌쩍 넘어간다. DSLR에 대한 이해와 사진에 대한 넓고 깊은 방향을 잡기에 유용한 도서라 생각 되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로도 주고 싶어진다.

 

뭣보다 '와' 하고 멋드러진 사진을 찍어내는 것 보다 중요한건,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라는걸 느끼게 해 준다. 오랜시간 연구와 노고가 엿보이는 이 책 자체가, 김주원 사진가의 '자신만의 스토리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많이 보고 걷고 관찰하고 생각하라는 저자의 조언을 생각해보면, 본인의 사진 실력이 늘지 않은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좋은 스승님을 곁에두고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흐린 날 강원도의 한 부둣가를 방문했을 때 이 거대한 파도를 본 순간, 꼭 사진 속에 담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발을 벗고 파도를 맞으며 촬영할 때의 그 짜릿함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렵다. 가끔 목숨을 담보로 한 사진 촬영을 할 때, 그저 운명에 맡길 뿐이다. 159p 

 

좋은사진을만드는김주원의DSLR사진강의, 한빛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