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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도 피해갈 수 없었던 불화의 고리 1

나는 2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장남이다. 집안은 늘 시끌시끌했다. 다복했던 집안 분위기와 달리 농촌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들딸들에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돈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마련해주셨다.

부모님은 서로 사랑하셨다. 아버지는 힘든 상황도 넉넉한 유머로 넘길 줄 아는 분이셨다. 가부장적인 분이셨지만 연세가 드시면서 어머니를 많이 아껴주셨다. 어머니도 늘 가정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을 인정해주는 아버지를 끔찍하게 여기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실 만큼 두 분 사이는 애틋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더라도 공부를 놓으면 안 된다며, 평생 배우는 것이 삶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농사일은 물론이고 일본어, 영어, 한문, 서예 등 항상 배우려고 노력하며 사셨다.

나는 아버지 같은 가장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같은 가장이 된다는 건 한편으로는 큰 부담이었다. 한창 바쁜 전공의 시절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당직과 잦은 회식으로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게 모두 가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이고, 밤이고 성실하게 일하는 게.

결혼 초기에는 큰 다툼이 없었다. 하지만 연이은 당직과 술자리에 아내가 점차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없다.", "어디 가든 배려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는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고립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내가 불만을 얘기하면 그 말이 마치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운했다. 온종일 힘들게 일하고, 퇴근 후의 술자리도 결국은 일의 연장인데,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는 아내에게 화가 났다. 그렇다고 허심탄회하게 아내에게 말을 털어놓지도 못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직업인 정신과 전문의지만, 정작 아내와의 대화는 어색하고 서툴렀다. 서운하고 격한 감정에 휩싸이다 보니 대화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날 좀 먼저 이해해주고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면 내가 알아서 잘해줄 텐데, 기다려주지 못하는 아내가 내심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정신과 전문의라는 직함이 오히려 결혼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명색이 정신과 전문의인데 내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문제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애써 감추는 데 급급했다. 그런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아내와의 갈등이 겉으로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정작 안에서는 골병이 들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금슬 좋은 부모님과 화목한 가정 분위기는 분명 나에게 많은 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도, 내 가정을 꾸리는 데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부가 결합해가는 과정에는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성실한 가장의 본보기였던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대로 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런 모습을 아내도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내는 무엇보다 관심과 배려를 원했다. 나는 강한 불만을 드러내는 아내에게 다가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묵묵히 아버지를 내조해주던 어머니처럼만 해준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라고만 생각했다. 그때는 어머니의 순종적인 삶이 아내를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였던 것이다.

원 가족의 가정 환경이 부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도, 훗날 자신의 결혼생활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약 어린 시절에 자신이 따랐던 부모 형제의 모습을 지금의 배우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면,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갈등을 부추길 수도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가정에서 자란 배우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아버지는 안 그랬는데…….", "왜 우리 어머니처럼 가정에 헌신하지 못하지?"라고 비교하는 순간, 갈등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된다.

결혼생활이 10년 정도 지나면서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쳐갔다. 불화가 깊어지자 결국 우리는 서로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무시하고 덮어두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하고 내심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한 집에 사는 부부가 투명인간처럼 숨죽이고 사는 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 일이던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함께해야 할 날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모든 시간을 서로 없는 것처럼 지내기란 어불성설이다. 서로를 무시하고 한 집에 사는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무시와 회피야말로 악다구니하며 싸우는 것보다 더 무서운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무시와 회피로 근근이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아버지학교 신청서'

서운했다. 화가 났다. 나만큼 열심히 사는 가장이 또 있을까? 나만큼 참고 사는 남편이 또 있을까? 나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아내가 싫었다. 그런데 아내의 태도가 비장했다. 안 가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너나 어머니학교 가서 배울 것이지…….'라고 내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람들은 고통을 받으면 그 어느 때보다 변화를 갈구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변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변화시키는 건 아주 작은 계기 하나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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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다시좋아질수있을까, 남편이달라졌어요, 박성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