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기하다. 오늘 아침 신문을 펼쳐 들었는데 동화처럼 환상적인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4월까지 백설같은 알프스의 만년설로 덮여 있는 독일 남부 슐로스 엘마우에 있는 휴양 호텔 엘마우 성이란다. 차근차근 읽어 보니 '유럽 인문 여행+' 시리즈의 첫 회로 기자가 독일의 슐로스 엘마우와 가파를 다녀온 뒤 써낸 글이다. 흥미를 느껴 뒷 장으로 넘기니 엇, 다음과 같은 커다란 문구가 떡 하니 눈에 꽂힌다.

 

<독일의 알프스 이 작은 마을에 '모모'가 산다>

 

오, 이 반가움과 떨림. 어떻게 내가 어젯밤에 딱 '모모'를 읽고 잠들었다가 일어나 펴 본 신문에서 '모모'의 고향을 보게 됐을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모모'의 작가인 미하엘 엔데의 고향이라고 해야지. 그래도 웬지 '모모'의 고향이라고 하는게 더 근사하다. 가파는 인구 2만 6000명에 불과한 초미니 도시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의 줄인말이다. 그곳에 미하엘 엔데의 미술관이 있고 미하엘 엔데 공원도 있다. 또 한 장의 사진으로 볼 수 있는 프레스코 벽화가 곳곳에서 반기는 고요한 중세 도시의 동화 같은 거리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쉽사리 거리를 떠돌던 모모의 모습이 그려진다.

 

1973년 발표된 '모모'의 부제는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이다. 언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녀 모모. 하지만 모모는 언젠가부터 도시의 옛 극장터에서 살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같이 모모를 돌봐 주기로 한다. 모모에게는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특별한 재능이 있기에 어느새 마을 사람들에게 모모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모가 있기에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게 되지만 서서히 연기처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시간을 훔쳐 가는 회색 신사들 때문에 도시는 점차 삭막해져 가고 사람들은 모두 '시간 낭비'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모모의 곁을 떠나버리고 만다. 회색 신사들은 자신들의 일에 방해가 되는 모모를 해치려고 하지만 모모는 시간 관리자인 호라 박사와 꼭 반 시간 후의 일을 미리 알고 있는 신기한 거북 카시오페이아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훔치는 회색 신사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은 다시 예전처럼 한 순간 한 순간을 즐기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회색 신사들을 물리치기 위해 모모가 숨가쁘게 내달렸던 한 시간이 사람들에겐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찰나였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매일같이 달력과 시계를 들여다 보며 살아가지만 정작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의미있게 들여다 본 것은 얼마나 될까.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말라깽이 작은 소녀 모모가 그토록 애써서 되찾아준 소중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냥 좋았다. 추운 겨울 밤에 이불을 둘러 싸고 누워서 노란 스탠드 불빛 하나에 가까이 대고 읽는 <서울, 1964년 겨울>이. 물론 나는 1964년 겨울을 살아 보지도 않았고 첫 장면에 묘사된 선술집 같은 곳은 구경도 해본 적이 없지만(선술집이란 것이 선 채로 술을 마시게 되어 있는 술집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려 보면 그때는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참으로 추운 겨울을 보냈던 기억이 많아서인가 웬지 내가 살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역시 소설의 첫 부분, 1964년 겨울, 서울의 어느 거리를 묘사한 다음의 장면이다.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선 채로 술을 마시게 되어 있는 술집)ㅡ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軍用)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 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세 사람이 그날 밤 나누는 이야기와 겪은 일들은 독자로 하여금 답답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력한 감정을 느끼게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작가 김승옥이 이 글을 썼던 시대의 자화상인 것이다. 빠르게 근대화되어 가고 있는 도시에서 개인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이 거대한 물질만능의 물결에 파묻혀 버리는 현실을 벗어나려는 자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자.

 

서울 변두리에서 그것도 겨우 70년대에 코흘리개 시절을 보냈던 터이나  당대 문학계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작가의 대표 작품을 읽는다는 즐거움은 60년대를 살아내었던 분들에 뒤지지 않을 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는 늘 붙어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상상력'이란 단어다. <나무>는 바로 그 상상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읽고 난 후엔 어디선가 한 번쯤 봤음직하고 나도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생각과 상상을 이처럼 기발하고 재치있는 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유독 인기가 높다는 작가에 대한 혹자들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그저 부러움의 눈길만 보낼 따름이다.

 

이 책에는 모두 18편의 재미있는 단편이 실려 있다. 물론 더 재미있는 이야기와 조금 덜 재미있는 이야기의 차이는 있다. 그 중에서 내가 특히 인상깊고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들은 20 이상의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천사들이 다니는 학교, 장난감 세트로 판매되는 우주 창조 기구(이 이야기는 사실 어릴 적에 텔레비젼에서 '환상특급'이라는 시리즈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하다...), 최상품의 진주를 만들기 위해 지구에 악취가 지독한 운석을 떨어뜨리는 외계 종족......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 걸까. 얼마 전에 보았던 신문의 인터뷰에서 그는 작품의 소재를 자신의 '꿈'에서 얻는다고 했다. 누구나 꿈은 꾼다. 때론 무섭고, 때론 신비롭고, 때론 손에 땀을 쥘 만큼 스릴이 넘치는 꿈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 시간이 몇 초만 흘러도 그 생생했던 긴장감이 그야말로 '꿈처럼' 희미해지고 기억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그 꿈을 놓치지 않고 머릿 속 어딘가에 담아 두었다가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표현해 내는 작가의 솜씨에 또 한 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끝 없이 팽창을 하고 있다는 영원한 우주의 신비에 경외와 두려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나무>는 단순한 재미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라는 희미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