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끄럽게도 역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지하다. 태종태세문단세나 겨우 외우고 있을 정도다. 마지막이 고순으로 끝나니 고종 다음 순종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황실의 역사가 스러졌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분명 고종도 순종을 비롯해 의자왕, 영친왕등의 후손을 두었고 또 구분들의 후손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분명 살아가고 있을진대 어찌된 일인지 나는 도통 어느 메스컴을 통해서도 우리나라 황실 후손에 대한 근황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이 책에서도 나왔지만 우리나라 황실의 핏줄이 일본인과의 정략결혼으로 인해 고유성을 잃었기에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아,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황실의 후손이라는 이 O O 라는 분이 텔레비젼에 나온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함자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그 때에도 보면서 참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더랬다. 일본이나 영국을 비롯해 외국의 왕족들이 나라와 국민들로부터 받는 대접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왕족의 후손들은 얼마나 홀대를 받고 외면을 당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에 대해서도 이 책이 출간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 책을 쓰게 된 작가조차도 우연히 대마도를 여행하면서 덕혜옹주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덕혜옹주의 남편이 대마도 번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둘의 결혼봉축기념비가 있다)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떠도는 풍문이 아닌 유일하게 온전한 자료가 일본인이 쓴 <덕혜희ㅡ 이씨 조선최후의 왕녀>라는 일본책이었다고 한다.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나 14살이 되던해에 일본으로 강제 연행이 되고 갓 스무살에 일본의 왕족도 아닌 일개 대마도백작과의 강제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덕혜옹주. 영친왕 또한 정략결혼을 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덕혜옹주는 여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통과 울분이 더하였으리라.

 

'울분'. 나는 이 단어가 덕혜옹주의 가슴에 평생 들어차 있던 고통과 한을 가장 적절히 대변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황녀로서의 자존감을 지닌채 한낟 일본인의 아내로 살아야만 했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 거기에 외동딸의 자살과 조국의 외면까지 더해져 미치지 않고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녀로서의 자존감이라는 것이 버리고자 하여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을 테니 무엇 하나 자신의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소설에서는 그나마 덕혜옹주에게 평생을 바쳐 그림자처럼 받들고 따르는 박무영이나 복순이와 같은 존재들이 등장하나 내 생각에는 실제 그 분의 삶은 아마도 절해고도와 같은 것이었을 것 같다.

 

"공주의 덕을 아느냐. 온순하고 공경하고 너그러워 편협함이 없으며 미움을 스스로 품어 더럽거나 좁아지지 않을 것이며..... 본 것은 본 대로 두어두고, 들은 것은 들은 것에 놓아두며,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며..... 늘 주위를 조화시켜 착함을 이룰지니라....."   ㅡ(p403)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그분들의 불운했던 삶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제라도 그분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제대로 기억되고 모셔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린 마일>은 여느 책들과 달리 책의 뒷 표지에 이 책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어느 평론가가 쓴 스티븐 킹의 작품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이 실려 있기 때문에 제목인 그린 마일이 무슨 뜻일까,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해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대개의 작가들은 추리소설이라든지, 연애소설이라든지, 자기개발서라든지 주 분야가 있어서 독자는 작가의 한 작품을 읽고 만족하면 같은 기대를 가지고 다음 작품을 읽게 되지 않나. 그러나 스티븐 킹은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대중 소설과 고급 소설, 혹은 공포 소설과 본격 문학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우선 다 읽은 후의 소감으로 간단히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평을 하자면 내게는 이 작품이 공포 소설과 문학 소설의 합체로 보인다. 염력을 가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캐리>처럼 <그린 마일>에도 주요 등장 인물이 초 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심오한 공포를 이끌어 내는 스티븐 킹 특유의 스토리 텔링을 보자면 역시 공포 소설의 분위기를 지니면서 읽어나가다가 내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느꼈던 걸 생각하면 단순한 공포 소설로 치부할 수 없는 뭔가가 분명히 있다고 그의 작품에는 있다고 느낀다.

 

아무리 그래도 대중적으로는 공포 소설 작가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읽고 눈물까지 흘렸다니 과연 어떤 작품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 것이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이 이야기의 배경은 1932년 미국의 콜드마운틴 주 형무소이다. 그리고 사형수 동으로 쓰던 E동 한복판의 넓은 복도 바닥, 녹색의 낡은 리놀륨으로 깔린 그 바닥이 바로 그린 마일이다. 다른 교도소에서는 라스트 마일이라고 부르는 곳. 즉, 사형수가 사형이 집행되는 날, 전기 의자로 걸어가는 마지막 길이란 뜻이다.

 

화자인 '나'는 바로 이곳의 동 책임자이자 사형 집행관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회상록으로 씌여진 이야기는 그가 그곳에서 1932년 아홉살이 채 안된 쌍둥이 자매의 강간 살해범으로 들어온 '존 커피'라는 흑인 죄수를 만나고 형을 집행하기까지의 시간 동안에 겪은 일들로 인해 자신의 직업에 대한 본질에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요즘은 의사가 주사로 약물을 주입해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지만 예전에 전기 의자에 앉혀 사형을 집행하던 시절의 상황으로 돌아가 이야기 속에 몰입하다 보니 과연 인간이 인간의 죄를 벌한다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치며 우리나라의 사형집행재개를 촉구하던 내가 말이다. 물론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우냐는 식의 물렁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분명 법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같지 않은 쓰레기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은, 그동안 사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무조건 코웃음치고 비웃던 나를 다시금 돌아보고 조금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만큼 마음 한켠을 비워둔다.

빨강머리 앤이란 제목은 아마 일본에서 번역할 때 역자가 생각하여낸 제목인가 보다. 내가 어릴 적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보았던 만화영화도 일본 작품이라고 하고 우리 나라의 예전 문학작품의 대부분이 일본 번역작품을 우리나라말로 재 번역한 작품이 많다고 어디선가 들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빨강머리란 수식어가 붙지 않은 '앤'은 도무지 낯설고 어색하다. 그런데 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라니 책을 펼치면서 웬지 새로운 앤을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만나본 앤은 내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 역시 사랑스럽고, 영리하고, 애정이 넘친다. 빨강머리에 어울리는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는 다혈질 기질과 늘 꿈꾸는 듯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쉴새 없이 재잘대는 명랑함도 그대로다. 어린이용으로 번역된 책들만 봐왔었는데 이번에 완역본을 읽어보니 고아인 앤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돌보아 준 머릴러와 매슈의 존재에 대한 애정 또한 새롭게 다가온다. 그래서 매슈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예전보다 더욱 가슴 아팠다. 앤에게도 사랑하는 매슈의 죽음은 인생에서 첫 번째로 겪는 슬픔과 시련의 사건이었고 그 후로 앤은 더욱 성숙해지고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앤은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있었다. 은빛으로 내리는 달빛 속에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공기는 은은하게 향기롭고 정적에 잠겨 있던 그날 밤의 일을. 그것은 슬픔의 손이 앤의 인생에 닿기 전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 차갑고 뿌리치기 어려운 슬픔의 손에 닿으면 다시는 옛날의 즐거운 인생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머릴러의 실명위기와 세 사람의 따뜻하고 소중한 보금자리였던 그린게이블즈를 팔아야만 하는 경제적 불안이 닥쳐온다. 그러나 천성이 밝고 맑은 우리의 앤은 닥쳐온 현실을 원망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의무라는 것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좋은 벗이 되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는 대학도 포기하고 애번리의 교사로 지내면서 그린게이블즈와 머릴러를 지키기로 결심한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앤, 네 덕분에 나는 오늘 다시 한번 인생은 아름답고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때의 의연한 네 모습은 앞으로 살아갈 남은 내 인생에서도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해. 고맙다, 빨강머리 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