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손녀가 할아버지 앞에 얌전히 앉아 그 분의 따뜻한 훈계를 듣고 있는 듯하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루에 5분,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 자기를 마주하는 시간을 찾아보자는 김수환 추기경의 이 말씀은 한 번쯤 눈을 감고 진정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의 현재를 점검하게 한다.

  그 분은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가치 있게 살기 위해 가져야하는 마음과 실천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사랑, 자기희생, 배려, 용서, 친절, 용기, 자비, 조화 등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될, 우리가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온 말이다.  그런데 왜 그 분은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이 낱말들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실천의 문제겠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겠지.

  말로는 잘도 떠들어 대면서 과연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성찰하게 한다.  행려 병자 수용소를 만들어 배를 곯거나 병들거나 늙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루에도 몇 백명씩 받아들여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가족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손을 꼭 잡아 주며 기도로서 임종을 지켜주던 테레사 수녀님의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예전에 마더 테레사에 대한 책을 읽으며 이런 분은 진정 하늘이 내시는 것일까 감동한 적이 있다.  이런 실천이 있어야만 진정한 나눔이라 하겠지.

  예전에 장애인 시설에 자원봉사를 나간 적이 있다.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지체 장애로 언어와 행동에 장애를 겪고 있었다.  남자 아이들도 꽤 많았는데  겉으로 보아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다. 알고 보니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까지 되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꾸 침을 흘리며 나에게 안기거나 손을 잡거나 바짝 붙어 앉아 책을 읽어주기를 원한다.  순간 겁이 나고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들이 가슴에 자꾸 안겨 드는데 이를 어쩌나. 사심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달려 드는 아이들인데도 멈짓멈짓 물러서게 된다.  당황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미소는 잃지 않으려 애썼으나 이미 나의 마음가짐이 틀렸던 것이다.

  마더 테레사는 문둥이 병으로 온 몸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의 중환자도 모두 끌어안고 맞아 들였다.  그들의 손을 잡고 기도를 쉬지 않았다.  진정한 나눔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 작은 그릇도 되지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는 다시 그 장애시설로 나눔을 나가지 않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김수환 추기경은 나에게 왠지 호통을 치시는 것 같다. 

  잠시 뉘우침의 시간이었다.  이번 달 나눔에는 꼭 장애인시설에 가서 참여하고 싶다.  그렇지 않아도 늘 마음 한 켠에 불편함이 있었는데 잘 되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마음을 좀 더 열면 되는 것이다.  나보다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마음을 크게 한 번 먹고 다가가 웃으면 되는 것이다. 묘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해타산 없는 맑은 영혼에서 나오는 해맑은 그 분의 미소를 이제는 직접 볼 수없지만  이렇게 좋은 책으로 그 분의 말씀을 대신하여 들으니 아쉬운 마음이 덜어지는 듯하다.

우리가 다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이 이 안에 가득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며 알고 있는 것을 조금씩 실천해 가면 되는 것이다.

김수환추기경의잠언집, 김수환추기경의바보가바보들에게2, 바보가바보들에게2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길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 데 있는 탓이며’ 이 책 속에 나오는 구절이다.  맞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일게끔 한다.  그래서 나도 당장 책을 덮고 기차표 예매를 한다.  배낭에 읽다만 이 책을 집어 넣고 트fp킹화를 챙겨 넣고 아침 일찍 경춘선을 타러 떠난다.  작가가 머물고 갔던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청평사까지 산길을 걸어간다.  콸콸콸 산 위에서부터 힘찬 물이 흘러 내린다.  귀가 즐겁다.  책에 씌여졌던 ‘회전문’에 얽힌 전설이 새겨진 비석을 찬찬히 살펴보고 ‘정말 맞네’ 확인 하면서.

덕분에 10여년 만에 홀연히 찾아 간 춘천의 소양강과 청평사 들어가는 길목은 많이 변해있었다.  하지만 그 때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추억은 그대로 새록새록 떠오르고 웃음을 머금는다.

  자동차에 네이게이션을 달고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며 샛길을 찾아 떠나는 방랑객! 어린시절부터 무작정 낯선 길이 좋았던 역마살? 붙은 작가를 따라 가 본다.  한 번쯤 가 보았던 익숙한 길도 나오고 생소한 길도 나온다.  작가와 동행했던 사람이 주왕산에서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라고 외쳤던 그 마음을 백번 공감한다. 

  가을이 무르익던 어느 날, 주왕산은 오색 단풍이 찬란하여 그 눈부심에 나도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학창시절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저절로 이 구절이 읊어질 것이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옷을 벗어 꽉 쥐어 짜면 진주홍 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이런 표현을 한 정비석은 정말 천재가 분명하다.  그 순간은 완전한 자연동화요 물아일체이다.  작가는 주왕산을 내려와 주산지까지 가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의 배경이 되었던 곳.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황홀한 곳이다. 

  작가가 찾은 곳 중에는 태백도 있다.  겨울 날, 꼬불탕꼬불탕 산길을 휘돌아 갔던, 아직 폐광촌이 남아 있었고 왠지 마을이 전부 검게 보이기도 했다.  멀미를 해서였을까.  태백에서 처음으로 나는 멀미를 했다.  그래서 나에게 태백은 ‘멀미’ 가 먼저 떠오르는 곳인데, 작가는 태백의 오지를 찾아든다. 

  책을 읽으며 작가를 따라가다 보니 간 곳과 가야할 곳을 정리하게 된다.  가 보고 싶은 곳을 공책에 적어 두기도 한다.  찬찬히 언젠가는 꼭 한 번씩 가 보리라.

홍천,양양, 낙산사,청사포,경주,호미곶,삼척......, 이미 가 본 곳을 빼놓고도 가고 싶은 곳이 많다.  이 책을 읽는 사이 나도 모르게 그만 로드 페로몬에 킁킁, 홀리고 만 것인가!

 

  몇 년 전에 이준익 감독의 영화 ‘즐거운 인생’ 이 오버랩 된다.  책표지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무기력하고 지치고 외로운 40대 아저씨들이 다시 사는 이야기.  자신은 사무실에서 새우잠 자며 라면으로 겨우 연명해도 유학 간 자식 뒷바라지가 행복의 전부인 기러기 아빠, 명퇴 후 교사인 아내 등에 묻어 가는 기죽은 남편, 학원비와 과외비 조달을 위해 퀵서비스와 대리운전을 하면서 못 볼 꼴 다 당하며 마음 상하는 가장, 그런데 그들의 삶을 활화산처럼 만들어 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학창시절 잘 나갔던 밴드그룹 활동의 재개였다.  먹고 살기 바빠서 잊고 살았던 그들에게 그것은 3년 가뭄 끝에 내린 단비였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던 남편이 멋있어 보이고 그를 보며 가족이 웃는다.  남편도 웃는다.  많은 공감을 하며 찡하게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흡사 이 책속의 주인공들과 닮아 있는 듯하다.

  록밴드 결성으로, 두 바퀴 자전거로, 색소폰으로, 블러그 활동으로, 스쿠버 다이버로, 플라이 낚시로, 패러글라이딩 그리고 요트 타기로 자신의 삶을 싱그럽게 관리하는 중년들의 이야기가 상큼하다.  비교적 전문성을 요하고 비용도 상당할 것 같아서 지레 ‘역시 나는 취미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이건 뭐,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이나 누리는 취미지, 나에겐 사치야, 꿈도 꿀 수 없지.’ 이런 생각이 드는 중년이 있다면, 그렇다고 기죽거나 포기하지는 말자.  취미활동이 꼭 이것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평소에는 비교적 러시아워를 피해 출퇴근 하는 나는 가끔 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이 있는데 그 때는 거의 초주검이 된다.  복복선이 생기고 버스 전용차선이 생겼다 해도 역시 출퇴근 혼잡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런 전철을 탔을 때 자리 하나 나는 것은 하늘이 준 행운!  그런데 그 자리에 덥썩 주저앉는 아저씨들을 본다.  순간 놀란다.  보통 때 남자는 일단 여자에게 양보를 하거나 몇 초 의사를 묻는 눈짓이라도 주는 것이 상례인데, 출퇴근 시간은 예외없다.  엥? 하고 아저씨를 보는 순간 ‘네, 앉아서 편안히 가십시오. 오늘도 고생많으셨습니다.’ 이런 말이 튀어 나올 정도로 지쳐 보인다.  안쓰럽다.  미소없는 무표정한 얼굴, 축 늘어진 어깨,  스트레스 해소 특효약인양 줄 담배로 까매진 입술, 찌든 담배 냄새, 땀 냄새.  이는 오늘을 사는 평범한 중년 가장들의 흔한 모습이다.  반 평생을 부양 가족을 위해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의 숙명이려니 하고 책임감을 다 한다.  그러다 보면 한 평생 훅! 눈 깜짝할 사이에 가고 말겠지!

  이제는 가족을 위한 삶과 나를 위한 삶을 조화롭게 배분하며 살기를 바란다.  오직 일만 하다가 한 생을 마감한다면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한스러워 하겠는가!  자식도 아내도 가장의 책임을 다 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지친 아버지와 남편의 얼굴을 대할 때는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가 변해야, 내가 즐거워야, 가족도 경제도 모두 즐거워진다.’

  주말이면 방바닥과 소파 등받이와만 친구하지 말고 가족과 공원에 나가 배드민턴이라도 한 게임 어떤가!  김밥 싸 매고 산행을 하는 것도 좋고 강변에 나가 자전거 타기도 좋고!

봉사활동도 좋고. 봉사가 일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원해서 하는 봉사는 보람과 기쁨을, 일석이조가 된다. 그러면서 많이 웃고 많이 웃으면 웃음 바이러스 전염되고 또 그러면 가족간의 없던 사랑도 되살아나고 사는 낙이 생기고 다시 회사생활도 생기를 더 할 것이다.  큰 돈 안들이고도 즐거운 취미활동을 찾자면 얼마든지 많다.

  개인 블러그 운영도 좋을 것 같다.  신변잡기를 올리다 보면 글도 쓰게 되고 작은 것에 관찰력도 생기고 사진도 찍게 되고 사진을 찍으려면 아무래도 여성들은 립스틱이라도 살짝 한 번 더 바르게 되고 트레이닝복에서 벗어나 옷매무새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사소한 변화가 나중에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남도 더 사랑하게 되고 남도 나를 사랑해 주고......, 아, 좋다!

  미혼인 나는 가끔 결혼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다. ‘미혼하고 아줌마하고 같니?  나는 결혼 했는데 뭐~, 애들 때문에 안 돼, 남편 때문에 안 돼, 그 돈이면 뭐뭐를 하겠다......, 가만 보면 자신은 쏙 빼 놓고 계획한다.  여성으로서 자신은 뒤로 하고 아이와 남편만 있다.  물론 가족을 위하는 마음은 아름답고 당연하지만 너무 심하게 자신을 소외시켜도 사는 재미가 없지 않을까!  그 정도는 가족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중년이여! 나중에, 나중에,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당당하게, 나도 가족도 행복해질 그 무엇인가를 시작하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