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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읽은 후 이 작가에게 관심이 깊어졌다. 가슴 미어지는 사연을 어쩌면 그리도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그의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그래서 두 번째 읽게 된 책이 ‘인생’이다. ‘인생’의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活着)’이지만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화하여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면서 이 소설의 개정판은 <인생>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허삼관 매혈기’ 보다 2년 전에 나온 작품이다.

‘활착(活着)’의 사전적인 의미는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 또는 그런 일-이다. 민초의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삶이란 그 환경이 어떻든 간에 언젠가는 그에 적응하면서 살게 되어 있다. 삶이란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나’로 나오는 서술자는 민요 수집을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시골에서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수 많은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흥미로운 노인은 처음이다. 그래서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소를 끌고 밭을 가는 푸구이를 틈만 나면 찾아가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내력을 듣게 된다.

젊은 시절 푸구이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던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그러나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에 도박까지 일삼더니 결국은 조상들이 일구어 온 전 재산을 모두 도박빚으로 탕진한다. 그 일로 인해 그의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고 그는 몇 조각 안 되는 논을 얻어 위세당당한 지주에서 소작인의 모습으로 전락하고만다. 정신을 차린 푸구이는 가족을 데리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지만 발버둥을 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가 없다.

어머니마저 쓰러지자 몇 푼 안 되는 돈을 모두 긁어 의원을 찾아가던 도중에 강제 징집이 된다.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내전이 한창이던 때,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이다. 사상과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력 앞에 힘없이 끌려가는데 푸구이는 몇 년 후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푸구이의 딸은 열병으로 벙어리가 되었고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그나마 있던 집안 살림까지 몰수당한 이들은 풀뿌리와 물로 연명한다. 그 사이 푸구이의 아들이 죽고 아내가 죽고 아이를 낳다가 그의 딸이 죽고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의 사위가 사고로 죽고 핏덩이였던 손자마저 몇 년 후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게 푸구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는데, 푸구이가 원했던 행복은 너무도 사소한 것이었다. 배 곯지 않을 만큼의 양식으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것, 온 가족이 아침에 함께 눈을 뜨고 한낮에는 들녘에 나가 열심히 일한 후 저녁이면 또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편안히 눕는 것.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리이지만 푸구이 가족은 이런 기본권마저 빼앗긴 삶을 살다가 대부분 요절을 하고 만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푸구이의 삶 역시도 그렇다.

‘황제는 나를 불러 사위 삼겠다지만 길이 멀어 안 가려네.’ 그러나 푸구이는 굴곡 많은 삶 속에서도 인생을 달관할 줄 아는 노인이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삶은 계속될 테니까.

열 두 살 된 딸이 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남의 집 수양딸로 가는 대목, 남모르게 밤새 걸어 집으로 찾아온 딸을 업고 다시 성안으로 데려다 주려다가 그 딸을 업은 채 되돌아오던 아버지의 마음, 자신의 옷을 잘라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주던 아내, 공산당에게 몰수 당한 양들에게 아침저녁으로 풀을 뜯어다 먹인 후에 등교하던 아들, 쌀 한 줌을 가난한 이웃사람 주머니에 넣어주던 똑같이 가난한 사람, 병든 장모의 편의를 위해 의자를 만들고 지붕을 개량해주던 말없이 마음 넓은 사위 등 가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여러 인정을 만나는 순간마다 독자는 콧끝이 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