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 실버스타인,하면 누군지 잘 모르겠는 사람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쓴 사람, 하면 아,그 사람! 할 것이다.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시인이며 극작가, 연기자, 화가, 만화가, 작곡가로 다재다능했으며 사후에도 여전히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 셸 실버스타인 (1930-1999)

 

내 손바닥 하나를 좌아악 펴면 다 가릴만큼의 작은 책. 그 안에 또 사뭇 작은 글씨로 쓰여진, 어린이를 위한 시인가, 어른을 위한 시인가. 누구도 상관없이 재미있을. 기발한 상상력을 발동케하는. 읽으면서 자꾸 어린이들 상상력 확장에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킥킥댈 아이들 모습이 눈에 선하며 아이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줄, 통쾌하게 한 방 먹여줄, 엉뚱한 마무리에 이어서 '상상하는 글쓰기'나 '연상하기'도 좋을 것 같은데, 거기다 셸 실버스타인의 익살스럽고도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함께하니 재미가 훨씬 더하다.

 

프랙 씨는 아들 잭에게 / 핑계대지 말고 열심히 뛰라고 하고 /

브릴 씨는 아들 빌에게 / 지면 죽을 줄 알라고 하고 /

드루 씨는 아들 루에게 / 기죽을 건 없지만 경계하라고 했지/

하지만 우승은 트레이스가 했지. (그는 아버지가 오지 않았거든) <경주를 시작하기 전에> 전문

 

곳곳에 반전도 매복되어 있고 재미를 위한 황당무계함도 있지만 또 곳곳에 정신 반짝 나게 하는 촌철살인의 깨달음도 깨알같으니 해학 속 풍자이며 골계미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문학이 아니겠는가.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 그럼 아이스크림이랑 음료는 다 내 거야 /

웃고 떠드는 것도 내가 하고 / 춤도 내가 추고 / 생일 축하 노래도 내가 할 거야 / "내 생일 축하합니다." // <생일 축하 합니다> 전문

상황을 상상하니 애잔하면서 자꾸 웃음이 난다. 그래도 친구 한 명 오지 않았다며 극도로 비관하는 것보다 훨씬 귀엽지 않은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내 등 좀 긁어 줘 / 가려운 데가 손이 닿지 않아 /

으흐흐 아하하 으흐흐, 정말 시원하다 / 고맙다 친구야, 끝도 없이 고마워/

돈 달라고? 왜? 무슨 돈? / 나는 이제 하나도 가렵지 않은걸 // <가려워>전문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원, 오리발 내미는 것도 유분수지.

 

"굉장히 촌스럽고 웃기게 생긴 모자네." /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지/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알지 못하는 건....../ 이 모자가 나한테 /꼭 맞는다는 사실이지 // <이 모자가 우습다고?> 전문

내 생각보다는 남의 시선과 남의 생각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심신의 불편함을 억지로 감수하고 주관을 잃어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짧지만 긴 여운의 메시지.

 

한 동안 가방 안에 폭 넣어다니며 틈틈이 읽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조카들에게 보내줘야겠다.

그림을 보고 또 이야기같은 시를 읽으며 흐흐흐, 꺄르륵 하는 녀석들의 웃음 소리가 가깝게 들려오는듯 하다.

엄마와 딸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였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그런 책이 아닌가 살짝 의심하며 후루룩 훑어보기. 엄마와 딸의 첫 번째 여행이야기? 그것도 산티아고 걷기 여행이라? 단번에 끌렸다.

 

지금까지 서너 권의 산티아고 여행기를 읽었지만 800킬로미터 긴 여정에 같은 이야기는 없었다. 똑같은 길이지만 글쓴이의 삶이나 생각에 따라 색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 그것은 독자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엄마, 박윤희. 1963년생

명문대 졸업에 현재는 금융컨설팅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완벽에 가까운 똑부러지는 성격. 그러나 기대치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딸에게 실망이 컸으며 수 년간 딸과의 불편함을 풀지못한 채 골만 깊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1년을 마친 딸이 휴학을 하고 싶단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다.

 

딸, 박정현 1990년생

엄마는 늘 부담가는 존재다. 부모님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명문대를 나와 피나는 노력으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부모의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외고 입학 그러나 당연히 SKY를 기대했던 부모에게 실망을 안겼다. 다른 대학으로 입학과 전공은 향학열을 전혀 자극하지 못해 무의미했고 그렇게 1년 후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선언한다.

 

둘만 떠나보자. 가서 풀어보자. 모녀간의 서먹함도 깊게 파인 감정의 골도 한 번 메워보자.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있을거야.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무작정 짐을 싸고 스페인 산티아고를 향해 모녀는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갈등과 화해가 길 위에서 펼쳐진다.

 

한 달이 넘는 산티아고 800킬로미터의 여정은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다. 더욱이 도보 초보자이며 도시생활에만 익숙했던 그녀들에게는 고난과 생존의 길이다. 그러나 열악한 알베르게(여행자 숙소)와 음식과 변덕이 심한 기후는 두 모녀를 똘똘 뭉치게 했고 고착된 마음의 벽을 허물게 했다. 길은 말랑하지 않았으나 모녀간의 마음은 걸을수록 부드럽게 말랑해져갔다. 인간적인 이해와 애틋함이 돋기 시작하면서.

 

딸 정현.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왜 고생을 사서 하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거창한 생각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데. 남들은 그랬다는데...힘들기만 해. 아무 생각도 안 나... 처음 며칠은 후회막급했던 스무살 정현이. 그러나 카미노 20일이 넘어가면서 뭔가를 느끼게 된다. 완벽하고 독하게만 느껴졌던 엄마의 모습에서 '엄마에게 저런 빈틈도 있네, 귀여우시네, 보기보다 연약하시네' 그 동안 몰랐던,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엄마의 인간적인 면모를 재발견하며 진정한 '엄마'를 알아간다. 그리고 엄마의 지나온 삶을 들으니 천하무적같던 엄마에게 그런 상처도 있었구나, 연민도 느껴진다. 서로의 컨디션을 묻고 잠자리를 살피고 요리를 챙기고... 그리고 여행자들 사이에서 적극적인 자신도 발견한다. 서울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자신이 먼저 나서서 묻고 돕고 또 도움을 받고. 그 동안 너무 수동적이었던 스무살 삶이 아깝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인데. 모든 것을 부모에게 특히 엄마에게 떼를 쓰고 신경전을 걸었던 부끄러움.

 

 

엄마도 나름대로 마음을 비워가는 걸음이다. 내가 낳았다고 해서 내 소유물이 아닌 것을. 뜻대로 행해주지 않는, 악착같지 않은 딸을 보면 한숨이 났고 그것을 표현하면 다툼이 되니 언제부터인가 차라리 함구하고 살았다. 그럴수록 더욱 어색해져가는 모녀지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오직 내 딸 잘되기 바라는 뜻에서 욕심을 부린 것이지만. 그것은 엄마 생각이었다는 것을. 내 딸로 이 세상에 와서 그저 건강하고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며 살면 그만인데, 엄마로서 과욕을 부려 딸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것 같다.

 

40일 동안 800킬로미터의 여정이었다. 보람과 고됨 속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서로를 인정하고 애착을 갖게 되었다는 것. 정현은 스물 한 살의 열정을 되찾았고 미래의 청사진도 재정비하여 현재는 유학중이라고 한다. 그 어느 때보다 향학열에 매료되어. 엄마의 눈치를 보지않고 능동적으로 계획하고 나서니 쑥쑥 성숙하고 향상될 수밖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간의 여행은 참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갈등이 있을 때나 사이가 좋을 때도 함께 또는 따로도 좋다.

엄마와 정현처럼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린 열악한 곳에서의 여행은 동지애를 형성하고 유대감을 갖게 한다. 역시 가족밖에 없구나 하는 안도감. 그 속에 쌓여가는 끈끈한 신뢰까지. 사이가 좋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여행은 좋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이심전심. 뭔가가 스몰스몰 솟아나는 좋은것이 있다.

비우고 새로 다짐하고 담기도 하는 여행길.

 

그나저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산티아고에 대한 동경이 짙어진다.

내 수명이 향년 80세라고 예상할 때. 겨우 40일이다. 어찌보면 먼지같은 시간 40일. 마음 속에 늘 자리하고 있는 이 길을, 이런저런 핑계로 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에 꼭 들고 말것이다. 그 때 갔어야 했어.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 겨우 한 달이라는 시간이었는데, 난 이런저런 핑계로 가지 않았지. 하며 땅을 칠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길에 대한 자신감을 북돋운 것은, 이들도 해냈다는 것. 아스팔트킨트 도시인이자 완전초보 도보여행자, 그녀들도 해냈다는 것에 강한 동질감과 자신감을 갖는다. 그녀들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정말 갈 날이 있을까.

'오매불망 섬을 사랑했던 사람들' 이생진 시인과 김영갑 사진작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통점은 이것. 섬에서 또 섬으로 궂은 발품을 마다 하지 않은 사람들. 섬의 전부를 샅샅이 한 사람은 사진으로 또 한 사람은 시로 혼신을 다한 작품을 감상자와 이어주니 그 분들을 죽을 때까지 축복하리라.

 

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기묘한 힘을 가졌는데, 어떤 독자를 시인은 성산 일출봉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그 곳에서 시인을 알아보고 넙쭉 절을 하면서 사연을 말해 주더란다. 생의 고통에 눌려 자살을 결심했던 즈음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읽고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고. 그리고 새로운 생을 다짐하기 위해 성산포 바다를 보러 왔노라고.

 

20여 년 전 나는 그 시집을 읽으면서 그 사연에 소름이 돋았었다. 사람을 살리는 바다와 사람을 살리는 시라... 그 후로 나는 제주도 특히 성산포에 대한 환상에 켜켜이 빠져들고 있었다. 홀로 제주도 배낭여행을 갔을 때도 맨 처음 찾아든 곳이 성산일출봉과 성산포였으니까.

 

<숲 속의 사랑>은 이생진 시인의 시편과 김영갑 작가의 사진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묶음이다. 숲 속의 사랑 20편의 시와 나란히 그 곁에 사진. 그리고 김영갑의 수필 몇 편과 그를 추모하는 이생진 시인의 시 몇 편까지

 

김영갑의 사진을 보면서 자꾸 또 제주도의 유혹에 빠져든다. 또..또...또.... 나풀거리는 노랑유채꽃밭,하늘,구름,바다,오름,꽃잎,햇살,그늘 그리고 바람...씩씩하게 살아있는 섬의 바람.

 

 

그대는 가고 <숲 속의 사랑>은 다시 세상에 나와 바람과 햇살 사이로 그대가 걸어오는 듯 나뭇잎이 흔들리네.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던 어느 날, 날더러는 감자 밭에서 시를 쓰라 하고 그대는 무거운 사진기를 짊어지고 사라졌지.나는 오도가도 못하는 오름 길에서 이슬비를 맞으며 찔레꽃을 보고 있었고.

 

시는 무엇이며 사진은 무엇인가.

 

나는 시로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그대는 사진으로 시를 찍고 있었던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오름에 올라가 그대의 발자취를 읽고 있네.

2010년 이른 봄, 용눈이오름에서 이생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