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나도 원예에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다.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열정으로 이어져 많은 식물들의 비위를 잘 맞추며 쑥쑥 키워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꽃화분 하나를 사면 안절부절. 과잉인지 무심인지, 그들은 이내 시들해지고 말았다. 이제 식물은 나와 인연을 다했나보다, 무심하다가 몇 달 전엔가 스파트필름,이라는 화분 두 개를 들여왔다.

 

화원에 들러 가장 생명력이 강한 아이로 추천해 주십사 부탁했다. 내버려두어도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는. 그랬더니 스파트필름,을 소개해 주었다. 생명력 뿐 아니라 민감하지도 않아서 어디서든 잘 자란다고, 거기다 공기정화 효과까지 있다며. 일석 다조, 얼마나 기특한가. 그래서 두 개의  화분에 분갈이를 해 와서는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애지중지, 지금껏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다.

 

바야흐로 진록의 계절, 녹음은 짙고 바람마저 싱글한데, 산 아래 있는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원예반 소년들> 일본 작가의 중편 정도 되는 분량의 청소년 성장소설. 고등학교 신입생 세 명의 이야기. 요즘 스파트필름을 애정하기에 원예반이라는 말도 좋았지만, 거기다 소년들이라니. 원예와 소년은 왠지 서먹할 듯도 한데, 이는 표지도 책 제목도 참 예쁘다는 생각에 일단 끌렸다.

 

꽤 명문인 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쇼지와 오와다,시노자키.

쇼지는 중학교 시절, 반 아이들로부터 외모로 인해 수난을 당한다. 그 후로 쇼지는 얼굴에 대한 콤플랙스로 맨 얼굴을 하고는 대외적인 활동을 꺼리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공부는 꽤 하는 편이므로 이 학교에 입학, 명문대에 합격하여 모교를 빛내준다는 조건으로 한 학기만 상담실로 등교하여 모든 학교생활을 그 곳에서 진행한다.

 

오와다, 중학시절 좀 놀았던 아이. 폭력서클 선배가 야쿠자에게 끌려가 초죽음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한 학기를 남기고 독하게 공부한 덕에 이 학교에입학, 중학시절 서클아이들이 비아냥으로 귀찮게 굴지만 잘 극복하게 된다. 시노자키는 평범한 모범생에 단정하고 예의바른 아이. 두 친구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도 시노자키가 한다.

 

이 세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장 외진 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원예부를 부활한다. 사실 원예를 시작한 것은 얼결이었다. 운동부 선배들의 동아리 강제 가입을 피해 임시방편으로 선택한, 지금은 선배들이 졸업하면서 문을 닫아버린 원예창고와 화분들. 그러나 그 곳에서 아직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가느다란 화초들을 살리면서 원예에 관한 그들의 관심과 열정은 급속도로 불붙는다.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을 찾아 원예에 관련된 도서로 상식을 쌓아가고 그것은 실습으로 잇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식물이란 참 순진하구나, 하는 것을.

 

화초들의 건강과 안위를 살피면서 이들은 자신들 안에서의 변화를 감지한다. 물론 긍정의 변화다. 그런 소년들의 모습과 마음이 예쁘고 기분을 좋게 한다. 머리끝까지 가득차버린 각자의 어지러운 것들을 완만하게 풀어내며 성찰한다. 자연은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해 준다. 상대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하고 저쪽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는 유연함을 가르친다. 역시 아이들에게도 자연을 벗하게 하라. 그렇게 되면 심각한 상담실이 따위는 따로 필요 없을 것 같다.

 

'인생을 살다 보면 단순한 한 걸음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보다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 친구도 좋고, 가족도 좋고, 그럴 때는 그저 등을 가볍게 밀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인간은 그 정도의 작은 배려로도 충분히 동력을 얻고 구실을 얻어 다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

 

고시원 주인 서명숙 여사의 이 말이 백 번 맞다. 중대한 일일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또는 판단은 섰으되 딱 잘라 선포하고 실천하기까지 차마 어쩌지 못하고 우유부단해 질 때가 있다. 바로 그 때 누군가 그 결정에 살포시 한 손만 얹어 준다면,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앞으로 행진하기가 수월할 텐데.

 

서울 신림동의 한 고시촌. 지금은 대부분 원룸같은 시설로 리모델링을 해서 옛 고시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서명숙 여사가 운영하는 이 곳은 클래식한 고시원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다. 겉모습은 비록 누추하나 그 안으로 한 번 들어가면 합격하거나 죽어 나와야 하는, 스파르타식 기관. 그것을 증명하듯 이 곳을 거쳐간 고시생들은 모두 고진감래의 꿈을 이루었고, 현재 큰자리를 하나씩 꽤차며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현재 맴버는 다섯 명. 혁제,성훈,은철,동미,상훈이 바로 그들. 뒷바라지 하는 연인 몰래 법전대신 9급 공무원 책을 끼고 있는 은철, 오직 피시방만이 위로이며 돌파구인 혁제, 검사가 되어 검사답지 않은 검사를 때려잡겠다는 동미, 현직 국회의원의 아들이며 아버지에게 반항하듯 미술을 선택하고 지금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해방되기 위해 외무고시를 준비중인 성훈, 그리고 상태.

 

상태는 올해 불혹의 40세. 벌써 10년째 골방 신세다만, 이번에도 불합격 발표다. 시골에서는 오직 아들 하나 바라보며 농사짓는 연로한 부모님이 있고, 해도해도 될 것 같지 않은 불투명한 미래가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 동안 상태를 지켜봐오던 주인집 서명숙 여사는 드디어 판단한다. 남의 인생을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상태를 그만 이 고시원에서 내보내주기로. 그리고 나머지 네 명과 시나리오를 짠다. 그 후 택배로 성훈에게 배달된 개통되지 않은 아이폰 한 대, 그것이 바로 느닷없는 타임머신이다.

 

타임머신으로 가 본 10년 후 부농이 되어있다는 자신의 모습, 결국 귀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말도 안 되는 타임머신의 영향이 아니었음을, 처음부터 그들의 시나리오였음을 알았고 새 삶의 선택하는데 큰힘을 실어준 그들이 오히려 고맙다. 그리고 후련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소설의 3요소가 자꾸 떠올랐었다. 주제,문체,구성. 그 중에 뭐하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 문체는 그렇게 정갈하고 담백했으며 심지어 문장을 배우고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자꾸 뭐가 하나 빠진듯하게 심심했다. 격한 반전이나 번득이는 사건의 부재, 생활이 단조로운 고시생들의 이야기니까 그렇다 치자, 했다. 스마트폰이 평정한 이 시절에 한물 간 타임머신이라니... 은근히 건조하다,싶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이 소설의 주제가 집약되어 있을 줄이야. 앞에 분명한 길이 있는데, 자꾸만 망설여질 때, 그럴 때 서명숙 여사의 말처럼 그저 등을 가볍게 밀어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새로운 개인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장대한 일인가.

최재천의 책을 읽으면 또 하나의 즐거운 덤이 있으니, 그가 책 속에 소개하는 또 다른 책에 대한 정보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누구에게 무슨 책을 권해 주어야 할지 막막할 때는 그의 책에서 많은 양서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물론이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그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개미가 연상된다. 개미와 말한다,라는 짧은 글을 통해 개미와 그들의 화학언어인 페로몬에 대해 매우 흥미를 가졌었고 그 덕분에 우리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개미들에 대해 좀 더 호기심을 갖기도 했었다.

 

개미를 만나면 꾹 눌러 살상을 일 삼던 버릇에서 그 후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그들을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갈수록 사위가 온통 시멘트 바닥이라 발견하기 쉽진 않지만 개미들이 줄지어 기어가는 모습에도 저들이 왜? 어떻게? 그에 관련된 정보를 알고 지켜보니 재미가 솔찬할 수 밖에. 인간들과 가장 흡사한, 갖가지 공동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동물이 다름아닌 개미라고 한다.

 

과학자가 되었지만 원래는 시인이 꿈이었다는 분이어서일까? 과학의 이야기가 이렇게 부드럽고 담백하고 위트가 있다니. 분량은 적지만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개미 이야기가 언급되었고, 최재천과 뗄 수 없는 비교동물학자이며 침팬치 연구가인 제인구달과의 일화들, 개인적인 에피소드, 그리고 많은 책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짧막한 서평과 감상을 싣고 있다.

 

많은 이야기 중에 특히  이 두 마디는 오랜 여운을 남긴다. (젊은이들에게) 방황은 하되 방탕하지는 말라, 요즘 사람들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예 잊고 사는 것 같다. (4대강 개발사업의 폐혜를 다룬 영화, 모래가 흐르는 강,을 보면서 나도 처절할 만큼,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