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 볼만 하구나!" 끝 없이 펼쳐진 요동 벌판을 만난 연암 박지원의 감격어린 말이다. 동행하던 사람이, 왜 드넓은 벌판을 보며 울고 싶다하느냐 물으니,

 

인간의 (희노애락오욕애) 칠정은 결국 울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을 터트릴 만한 좋은 자리, 통곡할 만한 자리를 소개한다.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 바다를 굽어보는 곳, 황해도 장연의 금사 바닷가. 하늘가와 땅끝이 초원뿐이고, 비바람만이 창망하니 오늘의 이 요동벌판이 바로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자리라 한다.

 

제주도의 오름을 보고 읽는데 계속하여 연암의 그 통곡하기 좋은 자리,가 떠올랐다. 사방이 툭트였으니 바람만이 서로 통하고, 오름 위에는 풀들만이 우거지고, 시원한 하늘엔 구름뿐이니 한바탕 울어대기에 딱 안성맞춤이지 않은가. 연암이 다시 살아 돌아와 제주의 오름들 위에 선다면, 분명히 그 자리로 추가했을 것이다.

 

이름난 관광지만을 제주도의 전부인 양 여기던 사람들이 어느 때부터 제주의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느릿하고 섬세한 걸음, 올레. 올레를 통해 제주다움에 눈을 떴고 감동했다. 그리고 그 올레를 품었던 사람들은 좀 더 깊은 제주의 맛에 갈증을 느낀다.

 

양파를 벗기듯, 한 겹씩 벗길수록 새록새록 새맛나는 제주도. 이제는 어디로 향해 볼까. 그러나 고민하지 말자. 그 곳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이름하여 오름. 오르다,에서 파생된 말 오름. 산,이나 언덕,을 이르는 제주도 토박이말 오름. 제주도의 자연 생명들이 건강하게 우거진 곳. 사계절 삼 시 세 때, 기상에 따라, 시시각각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성지, 오름.

 

제주도에는 화산기생으로 만들어진 오름이 368개나 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쉽게 오를 수 있고 접근성도 좋으며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34개의 오름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글쓴이는 제주도 토박이 형제들로 책 속에서 그들의 애향심 가득한 정성이 느껴진다.

 

여러 차례 제주도를 다녀왔어도 오름,이라는 것이 이리 있을 줄이야. 처음 오름의 모습은 김영갑의 사진을 통해서였다. 유난히 중산간 지대의 초원과 오름을 사랑했던 김영갑. 그의 사진 속 오름들은 나를 황홀지경에 빠뜨렸다. 이 곳이 대체 어딜까. 당장 그 곳으로 달려가게끔 충동질한다. 덕분에 물어물어 찾아갔던 곳. 재작년 겨울이던가? 해질 무렵 급하게 올라본 다랑쉬 오름과 용눈이 오름. 오름 꼭대기서 보는 사방의 풍경과 그 깊숙한 분화구의 모습에는 아, 탄성만이 터져나올 뿐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그 순간의 경외감과 경건함은 아직도 여전한데,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으려나. 연암의 말처럼 통곡하기 좋은 그 자리로 찾아들어, 한바탕 울고 싶어라. 이왕이면 기쁨이 극에 달한 울음이기를.

 

참 고이하다. 한번 마주한 적도 없으며 오직 사진을 통해서만 알게 된 분을,

사진가 김영갑(1957-2005)

 

제주도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에 다녀오는 날이면, 며칠은 꼭 그런 분위기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쉽고 아프고 무겁고. 마치 가족을 떼어 놓고 오는 것처럼, 가족의 한 사람이 먼 길을 떠나 이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처럼.

 

세상을 뜨기 1년 전 쯤에 출간된 그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가 그가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면, 이 책 <김영갑>은 그가 떠나고 몇 년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풀어낸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내가 김영갑,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때가 ... 언제였더라. 3,4년 전 쯤? 평소 냉,한 성격을 지닌 어떤 사람이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꺼냈다. 갤러리에 들어가 서는 순간, 눈물이 펑펑,나더란다. 의외였다. 저 사람이 눈물을? 왜? 왜? 다급히 물으니, 모르겠단다. 그냥 저절로 눈물이 흐르더란다. 그 때 나는 귀담아 두었다. 김영갑 갤러리. 제주도에 가게 되면 꼭 들러봐야겠군. 그 사람을 눈물 흘리게 한 곳이 참 궁금했다.

 

 갤러리의 첫인상은? '참 제주스럽게 예쁘구나.' 그리고 갤러리 안에 들어갔을 때, 사진의 첫 인상, 바람. 그의 사진들 속에는 제주도의 바람들이 가득이었다. 경이로웠다. 청보리에 이는 보드라운 5월의 바람, 휘모리장단같은 바람, 첫사랑같은 바람, 산들바람, 솔솔바람, 안개비바람,꽃바람,노랑바람,붉은바람....,바람의 빛깔을, 바람의 촉감을 낱낱이 읽었고, 보았고, 느꼈다. 세상에 이런 사진도 있구나, 울컥해지는 울림과 감동, 새로운 경험이었다.

 

제주도의 자연풍경이 좋아서 제주도에 정착한지 20여 년, 오직 제주의 자연속살들을 담기 위해 동분서주. 사진에 몰입하기 위해 결혼도 마다했다. 외골수 고집불통으로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도 전혀 받지 않았으며 빈곤을 운명처럼 여겼다. 뱃속 허기는 들판의 당근이나 무, 고구마를 주워 달래며, 그 돈으로는 인화지와 필름을 구입했다. 무위자연, 제주 오름에 오르면 그 벅참에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사람. 같은 장소를 수십 번, 수백 번, 오르내리며 해양성 기후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제주의 자연을 오롯이 사진에 담았다. 그러면서 그는 행복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진만 찍을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이고 삶의 의욕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었다. 제주도에 정착한 지 20여 년 동안, 20여 만 장을 남기고, 이제 필름값 걱정, 은 없으려니 할 그 무렵, 불행하게도 불치의 루게릭병이 찾아온 것이다. 가혹하다. 치료할 방법도 없이 근육은 굳어져 가고, 셔터를 누를 힘도 없게 됐을 때, 그는 갤러리를 지으리라 결심한다. 그 많은 사진들을 보관하기 위해. 서귀포시 삼달리의 작은 분교를 임대할 수 있었다. 건강을 걱정하는 모든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중산간 마을을 옮겨 놓은 듯한 갤러리 마당. 한 개씩 돌담을 쌓으며, 들꽃을 심으며, 나무도 옮겨심으며...., 그러다 발병 5년 후, 2005년 고통 속에 삶을 마감하고,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갤러리 앞마당에 고이 잠들다.

 

사진을 위해서라면 철저하게, 처절하게 외로워야했던, 김영갑. 굶기는 밥 먹듯이 했어도 노동을 해서라도 필름을 사고, 매년 전시회를 열었던 그. 그 인내와 사진에의 열정을 예찬한다. 지금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갤러리와 사진들은 우리 곁에 남았다. 아끼고 지켜 나가야할 일은 그의 사진을 아끼는 우리의 몫. 어떤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사진으로 따뜻한 시를 쓰고, 사진으로 오묘한 색감의 그림을 그려냈던 김영갑. 그를 아는 사람들이 말하는 김영갑. 마치 평소 근엄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전 처음으로 고모에게 아버지의 어린시절 일화들을 듣는 것처럼 생소하면서 흥미롭고, 애잔하면서 그리운, 그리운 이야기들이다. 

자승자박. 이 사람들, 참 힘들게도 산다. 스스로 쳐 놓은 밧줄에 스스로가 꽁꽁 묶이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오영제. 치과의사이며 세령마을 대대로 땅부자 집안의 재력가이다. 남 부러울 것 없이 완벽한 외부적 조건에, 그러나 그의 삐뚤어진 내면은 나날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니, 어쩌자고 남을 괴롭힘에 쾌감을 느끼며 일생을 허비하는지. 정말 모를 일, 읽는 내내 쯧쯧, 혀를 찬다.

 

교정. 오영제가 즐겨 쓰는 말이다. 치과의사니까,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러면 좋겠는데 불행히도, 아니다. 교정이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물불 가리지 않는 린치로 굴복시키고 파괴하는 것. '교정이 필요함', 세상에서 가장 집요하고 폭력적인 이 말과 결심이 만나면 바로 행동으로 옮김. 집요하고 치밀한 사람. 아마 해 뜨고 달 뜨는 시간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으리라 믿는, 독선적인 냉혈한.

 

한겨울 한밤중, 한계령 찻길 한가운데에, 지갑과 휴대폰을 모두 빼앗고 차에서 아내를 밀쳐내버리는 것, 그 길로 아내의 행방이 묘연하자 대신하여 딸 세령이 괴롭히기, 치아를 깨뜨리고 피범벅이 될 정도로의 폭력행사, 모녀가 아끼는 고양이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단칼에 단두, 현수 아내와 현수 아들에게 유령처럼 따라붙는 복수극 등.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평생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현수,서원이의 아빠이자 이 세령마을 댐현장에 새로 발령받아 온 팀장. 이 사람은 두 번째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람이다. 성격이려니, 이해하려해도, 아무래도 심했다 싶다. 지난 날 야구선수였던 거대한 풍채가 대꼬챙이가 되도록 말라가는 피말리는 과정, 결국 이슬로 사라지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므로해서 가족에게까지 가해진 멍에.

 

현수는 이 마을로 부임해오기 며칠 전 숙소 상황과 한 집에 살게 될 승환,을 만나기 위해 험한 기상에 음주 운전, 그리고 익숙하지 못한 길에 들어선다. 그때 마침 아빠 영제를 피해 도망 중, 느닷없이 달려든 세령을 치게 된다. 그리고 세령호수에 시체 유기. 그것을 눈치 챈 영제의 교묘한 심리수사와 응징, 불우했던 어린시절 기억과 오버랩되는 현수의 환청과 환영, 그 괴로움에 쇠약해져가는 현수.

 

이 공포스런 사건들은 7년 전에 일어났지만, 그 끝나지 않은 불행은 그 후 7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때 당시 열두 살이었던 나, 서원. 서원에게 승환이 없었다면 서원의 7년은 어땠을까. 그야말로 벼랑끝 한 발 디딤, 이었을 것이다. 7년 전 그 날 밤, 현수가 뺑소니에 시체유기만 하지 않았더라면, 합당한 죗값을 치뤘더라면, 그의 가정은 이렇게까지 풍비박산 나지는 않았을까.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정유정의 물샐 틈없는 서사력과 폭발적인 문장력. 수사와 잠수, 토목에 관한 전문적이고 해박한 지식을 녹여내 구성력이 치밀하다. 2년 동안 칩거몰두하여 완성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녀의 노고가 어느 만큼인지 그녀의 건강이 걱정될 만큼 놀랍고 흐뭇한 작품이다.

 

세령마을과 세령호수, 등대마을 등. 작가가 분명 가상공간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꼭 존재할 것만 같은 생생함. 생각만 해도 음습하고 오싹하다. 책 속에 첨부된 동네지도, 읽다가 자꾸 그 장소를 확인하려 앞 장으로 되돌아 가곤..., 오... 섬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