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박선생은 첫째 아내에게는 다섯 아들을 얻었고, 둘째 아내에게는 재산을, 그리고 세번째 아내로부터는 사랑을 얻었다. 사회적인 명성은 수십 개의 명함이 이를 증명하였고 집안 깊숙한 곳에 수장고에는 갖가지 보물들로 가득이다. 소유함으로써 더해지는 불안감, 그것을 어쩌지 못하여 따로이 밤샘하는 도우미를 둬야 할 정도로 노인은 의심이 많았고 또 인색하였다.

 

명성이 더해지고 사회적인 입지가 견고해질수록  따르는 자들이 늘어났고 그 속에서 아내의 외로움은 더해간다. 첫부인은 둘째부인이 되는 그의 연인,방선생으로 하여 갈등하다가 결국 이혼을 했고, 법적으로 둘째부인이 된 방선생은 그의 또 다른 젊은 연인때문에 여자로서 고통을 받아야했다. 그의 아내와 동업자로서 인고의 세월이었으나 죽음을 앞두고는 남편의 연인을 받아들여 그의 보필을 부탁하는 너그러움을 보인다.

 

드디어 법적으로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되는 호순, 호순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30,이라는 격차를 극복하고 그와 연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던 호순. 그녀는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박선생의 집으로 들어오지만, 그림자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연애와 결혼의 현저한 차이, 무뚝뚝하고 인색한 남편의 태도에서 오는 극도의 외로움, 체면 손상의 우려로 호순을 대외적으로 내보이기를 꺼려하는 노인. 그에 대한 애증으로 겪는 심리적인 갈등 등.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집을 처분한 돈을 대끔 남편 수중에 건내고 한 두 푼씩 그것도 셈에 인색한 남편에게서 얻어쓰는 호순.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감을 감수하는 호순. 그녀는 순진한 것일까 또는 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증표일까. 과연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그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존경일까, 아니면 경제력을 잃고 오갈데 없는 처지의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존중으로 아내를 대하지 않고 마치 순종하고 복종해야하는 학생을 대하듯하는 박선생의 언행 또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급작스러운 병환으로 세상을 뜬 박노인, 남겨진 그녀의 운명은? 그가 평생을 애지중지하던 수장고의 보물들은 대부분 위조품인것으로 판명이 났고 그의 다섯 아들들은 그녀를 비인간적으로 대했다. 그가 그의 그녀들에게 강조하고 주입했던 것, 사랑이란 사랑의 대상을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 그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일방적인 억압이 어디 있을까.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인 영향의 탓고 있겠지만,  여성의 자처이든 강요이든 간에 일부다처, 라는 것은 틀림없이, 여성에게는 물리적인 흔적없이도 가혹한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세번째 아내였던 소설가 서영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소설들을 접해보지 못하다가 얼마전 산티아고 순례길의 후기를 담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읽었었다. 기회가 되면 그녀의 소설도 꼭 읽어보리라 다짐하던 차에 이렇게 자전적 신간을 접하게 된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으로 글을 풀어갔다고는 하지만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에 대한 애증과 만감의 교차는, 생각만큼 그녀를 시원스럽게 놓아주지는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당시 문학계의 거목이던 김동리 선생을 사랑하고 존경한 만큼, 그에 따른 대가도 혹독했으리라. 세상은 둘 다를 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달걀이 걸어간다'? 제목이 독특했다. 무슨 뜻일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어느 드라마에서 들었던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말의 해석이 떠올랐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 막강한 일제에 맞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독립은 요원하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인 것을 어리석게 왜 목숨을 거느냐, 라는 질문에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사물이고, 계란은 아무리 나약해도 생명이어서 언젠가는 알을 깨고 병아리가 나와 닭이 될 것이고..., 이런 대사가 있었다. 처음 듣는 대단한 해석이었다. 그 말이 옳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렇다면 혹시 이 책에서도? 제목의 뜻을 찾아 골몰한 결과, 책 끝부분에 뜻의 풀이가 있었다. 주인공 영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아프리카 출신의 친구 빌,이 에디오피아의 속담이라며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미 또한 드라마에서 독립운동가의 말과 비슷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외세,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야수와 같은 탐욕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짓밟을 때, 믿기지 않을 만큼 조선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 책에서의 베델과 후세,이다. 베델은 영국인이며 언론인으로서 파렴치한 일본의 야욕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인의 인권유린을 막는데 혼신을 다한 사람이다. 영국의 규제로 결국 금고형이라는 옥살이에 쇠약해진 몸으로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일본인 후세,라는 사람은 변호사로서 역시 베델과 같은 길을 걸었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조선을 변호하는 후세에게 변호사 자격정지가 내려지고 해방이 되고 나서야 다시 자격이 주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베델과 후세가 중심인물은 아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 후손의 이야기다. 또 일본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고 희생한 이수현씨(영현)와 아프리카에서 이타정신을 발휘한 이태석(알프레드 리)신부님이 모티브가 된 인물도 등장한다.

 

서울에 사는 영현은 초등학교 5학년, 아버지의 영국지사 발령으로 하여 1년 정도 영국으로 옮겨간다. 이 때 빌,이라는 소년 역시 영현과 같은 학교를 다니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오는데, 그 배후에는 동양인 알프레드 리 신부님이 있었다. 어린 빌은 훗날 조국인 수단을 위해 큰일을 하겠다는 포부로 장학생으로 선발 되었고 영국의 수전,이라는 여학생 집에 기거하게 된다. 수전은 바로 베델의 후손이다.

 

영국의 수전, 수단의 빌, 그리고 한국의 영현. 이들이 청년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성실하게 담고 있다. 모범생들의 이야기니 격한 갈등이 있으리 없어 살짝 아쉬웠지만? 또 근대계몽소설의 느낌이 잠시잠깐씩 살짝? 그러나 이들의 교우관계나 능동적이고 열린 학습활동, 또 여러 취미활동을 통한 성장을 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주도학습'이구나 싶었다.

 

훌륭한 조상을 둔 이들이어서 그런가. 역사학도가 된 영현과 역사학 강사가 된 후세의 후손이 우연히 만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맞서보려 하지만, 아직도 철면피인 일본의 반성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나 달걀이 걸어간다, 이런 젊은이들이 부단히 활동하는 한, 미약하게나마 점점 변화가 있기를 소망하며

평양감사라도 본인이 싫으면 즐겁지 않은 법.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혼신을 쏟을 때, 그 때의 희열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행동하는 영국의 청년, 매트 페로즈. 그의 성공에 대리만족하며 내 가슴마저 콩캉거렸다.

 

선택의 기로에서 거리낌 없는 판단. 어쩌면 그에게 또 다른 능력이 있음에서 오는 여유가 아닐까, 잠시 부러웠다. 그러나 그보다는 꿈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절실했을 것이다. 바늘구멍 들어가기 만큼 힘들다는 국가 감사원 회계사를 휴직하고 오매불망하던 치즈를 찾아 옆나라 프랑스로.

 

미식가를 자부하는 프랑스 사람들 틈에서 영국 청년으로서 꿋꿋하게, 오직 치즈가 좋아서, 치즈를 배우고 최고의 치즈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어떤 소외감도 감수할 수 있었다. 무엇이 장애가 되리. 그는 젊었고 무엇보다 치즈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넘쳐대는데 말이다.

 

틈나는 대로 프랑스어를 익혔고 회계사일 때 휴가 역시도 프랑스 농장으로였다. 염소와 친해지고 싶었고 우유를 어떻게 짜내야 신선할까, 어떤 발효과정을 거쳐야 맛있는 치즈를 얻을 수 있을까. 직접 경험하고 배우고 싶었다. 그에게 농장에서의 실습은 그야말로 삶의 보람이었고 행복이었다. 다시 영국 감사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는 이미 답답하고 집중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자나깨나 치즈, 그는 결국 결연히 치즈를 선택한다.

 

프랑스에서 치즈의 메카라 불리는 리옹으로 이사, 꾸준한 수소문 끝에 세계적인 치즈 브랜드 몽스, 에서 드디어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은 요리로는 자국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척박하다며 영국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영국의 청년이 프랑스 최고의 몽스가게에서 일을 한다면 그들로서는 어불성설, 달가와하지는 않을 것이 뻔하다. 그만큼 완벽한 프랑스어 구사가 절대적인 상황. 기초부터 치즈 교육과 함께 가중되는 프랑스어 공부.

 

그러나 그 무엇도 그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몽스의 치즈 숙성소인 치즈 동굴에서의 기초 교육 시작. 어머어마한 덩어리의 치즈운반과 기술적인 치즈 자르기와 쌓기. 치즈 건조하기와 뒤집기. 200여 가지가 넘는다는 몽스 치즈의 특성과 이름도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목표했던  치즈 숙성의 방법 익히기. 치즈의 개성을 만든다는 효소들 조절하기 등. 처음부터 그에게 지름길이란 없었다. 기본부터, 찬찬히 섬세히 직접 경험하기.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2013년 프랑스 최고의 치즈대회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챔피언이 되었다. 목표했던 것에 대한 부단한 열정과 도전의 결과리라. 우승을 차지한 치즈플래터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그를 보며, 그 활짝한 미소 속에는 얼마나 많은 그의 노고가 스며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제2의 인생, 꿈,도전..., 이런 말들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그저 막연하고 현실성 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한 우리에게 이 청년의 능동적인 실천은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을 붇돋워주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파이팅,을 읊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