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심각하게 수학을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힌다. 물론 강제다. 학대 수준은 아니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문제를 해석하고 맥락을 찾아 해결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하는 수학에서 해석의 힘과 맥락을 찾는 능력은 책을 읽어야 만들어진다. 즐겁고 재밌는 수학이기 위해 문제 풀이는 스토리로 접근해야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이 짧고 강렬한 영상에 빠져 드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시국이 만든 비대면 문화의 여파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됐다. 오랜 시간 과외다 학원이다 하며 수학으로 밥벌이를 하는지라 코로나를 겪은 아이들의 수학학습능력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 요즘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다.

 

사칙연산을 수학의 기본 도구라 본다면 아이들은 나눗셈을 가장 어려워한다. 단순하게 자연수를 나누는 건 쉽지만 분수와 숫자의 비로 사고를 확장하는 과정은 곤혹스럽다. 초등학교 때 시작되는 숫자 사이의 비와 나눗셈을 제대로 이해하는 아이들은 경험상 머리가 좋은 부류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책읽기와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념이 하나로 연결되는 매력이 수학의 바탕이라면 이런 수학 근력 혹은 수학 기초체력은 책에서 나온다. 그리고 논리적인 스토리를 만들 줄 아는 아이들이 튼튼한 수학 체력을 키운다.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대부분 스마트폰 영상에 빠져 있다. 어찌하겠는가. 시대가 이런 시대인걸. 중요한 건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혹독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수학을 스토리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책에서 언급하듯 수학이란 거대한 숲을 미세한 수준으로 확대해 보면 프랙탈 구조마냥 끊임없이 확장되고 반복되기에 그렇다. 기본적으로 이차식은 이차방정식과 이차부등식 그리고 이차함수로 확장된다. 아이들에게 이차방정식은 해만 구하면 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차방적식의 해는 이차함수의 그래프와 연결되고 다시 이차부등식의 범위를 찾는 데까지 확장된다. 중요한 것은 방정식이든 부등식이든 이차함수를 평면좌표에 그래프로 나타내면 쉽게 해결된다는 사실이다. 이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이차함수의 곡선은 실제 중고등학교 수학의 기본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중학 3학년 과정에서 아이들은 함수란 말만 나와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차방정식에서 이차함수로 넘어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없기도 하지만 이차함수로 표현된 그래프로 이차방정식과 부등식을 해결하는 즐거움은 사고의 확장이 없인 힘들 수 밖에 없다. 이 사고의 확장이 쉽냐 어렵냐는 책읽기 혹은 스토리 구성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수학이 스토리라면 기승전결이 논리적이어야 한다. 스토리의 바탕에 정의와 정리 따위의 공리가 있다. 개념이 확실하다면 그 속에서 패턴을 찾아 확장시켜 나가며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야기는 이유가 있기에 마땅한 결론이 도출된다. 그 결론에 다른 개념을 첨가하면 다시 새롭지만 기존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두 문자로 이루어진 방정식을 만족하는 점을 찍어 그래프로 표현한 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수학을 단절된 무언가의 결합이 아닌 연속된 개념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즉 수학이란 스토리인 것이다.

 

글쓴이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그리고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수학교양서는 많지 않으니 말이다. 대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용은 더하다. 단순히 아이들만 놓고 봐도 이 책은 초등학생이 읽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그만큼 교과과정과 가깝다는 말이다. 일대일대응이랄까?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과 비교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게 구성되어 있다. 상당히 방대한 내용을 수학 개념과 패턴 그리고 스토리라는 핵심으로 탄탄하게 기술해 놓았다. 본문에 등장하는 수식과 그래프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글만 따라 읽기만 하면 수학의 본질을 재밌게 즐길 수 있다. 글쓴이의 열정과 감각이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책을 어른들이 많이 읽었으면 한다. 학부모나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도 추천한다. 아이들이 성적을 위해 수학을 공부한다지만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도 수학은 어두운 삶의 길에 환한 빛을 비춰주는 등불이니 말이다. 지금보다 다가올 미래예측이 중요한 시기가 또 있었을까? 미래는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맥락과 패턴이 만든 현재 이야기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이 스토리의 마지막이 어떤 식일지 수학이 도구가 되지 않을까? 

여객기와 고속전철은 현대 과학기술의 첨단이다. 공항과 역이라는 허브를 통해 세계는 글로벌화 됐다. 그곳은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거르는 일종의 체(?) 역할을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체에 관한 이야기라 하겠다. 모빌리티란 이동을 통해 생성되는 모든 문화에 적용된다고 볼 때 공항과 역은 인간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앞서 말한 체에 걸러지면서 말이다. 체가 정체성 획득이라는 경계라면 체 안쪽과 체로 걸러진 부분은 체란 구별짓기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네덜란드 스히폴공항에는 “프리비움”이라는 생체 측정 검사제도가 있다. 약 100달러를 지불하면 프리비움을 통해 홍채 스캔만으로 출입국심사를 통과할 수 있어 공항에서 이동 속도가 빨라진다. 게다가 프리비움 이용 고객은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장을 예약할 수 있고, 그들은 특정 회사의 특별 카운터에서 체크인이 가능하다. 이런 절차는 공항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원되지 않는다. 키 1.5미터 이상에 연 8회 이상 스히폴공항을 이용해야 하며 무엇보다 유럽경제연합 회원국(솅겐조약협정국) 출신만 가능하다.

 

공항에서 벌어지는 국경을 초월한 새로운 시민권 탄생은 전통적인 민족, 국가 정체성과 다른 새로운 정체성 탄생이라 하겠다. 어찌 보면 빈번하게 여객기를 이용하는 고객을 위한 맞춤 서비스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빌리티에 의해 부여되는 정체성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공항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공항이 철저한 통제와 배제의 시스템으로 구연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공항이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정체성에 있다. 쉽게 말해 내가 가진 경제적 부에 따라 계급정체성이 정해진다는 말이다. 내국인과 외국인의 정체성(물론 경제적 위치에 따른 국가별 등급에 따라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별은 역전될 수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정체성이 바로 그것이다.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에 대한 서비스의 차이를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모빌리티로 인해 생성되는 새로운 국경이 공항에서 펼쳐지는데, 솅겐협정국 시민들과 비협정 국가 국민들은 스히폴공항에서 다른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물론 난민들이나 가난한 극빈층 여행객들은 또 다른 차원의 배제된 정체성을 배당받을 것이다. 모빌리티 엘리트의 탄생은 철저한 차별과 배제, 통제라는 보이지 않는 신체권력의 작동과 함께 한다. 발달된 운송수단을 바탕으로 성립된 세계화는 바로 그 운송수단에 의해 세계 시민들에게 차별적인 정체성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몇 주전 친척 어른이 처음으로 KTX를 타고 서울에 다녀오셨다. 가실 때는 직접 표를 끊었고 오실 때는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스마트폰으로 티켓을 구입했단다. 물리적인 승차권이 없이 스마트폰만 달랑 들고 기차를 이용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어른들은 그게 가능하냐는 표정이었다. 스마트폰이 없거나, 있어도 다루기 힘들어하시는 분들은 먼 나라 얘기다. 스마트 티켓으로 확인되는 구별짓기다. 여기가 산골이라 대부분 나이 많은 분들이 KTX를 타야 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친척 어른은 새로운 모빌리티 정체성을 획득했다. 이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닐까? 친척 어른은 이제 앱을 통해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해보니 별거 아니라는 걸 아신 거다. 나머지 어른들은 여전히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말이다. 새로운 정체성 탄생의 순간이다. 소비자본주의의 충실한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말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확장성과 폐쇄성을 동시에 지닌다. 난 할 수 있는데 저들은 못하는 것. 선긋기가 가능해지는 순간은 새롭게 부여되는 정체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확장성이 중요한지 폐쇄성이 중요한지 나는 모른다. 시시각각 무이식이든 의식이든 우린 정체성을 강요받는다. 국가와 지역, 언어와 문화에 의해서 말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정체성은 절대적으로 돈에 의해 결정된다. 모빌리티 정체성은 자본주의가 만든 작은 부분일 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의 정체성은 푼돈이면 접속할 수 있는 미디어 영상에 갇혀 있다. 통신과 영상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 평등한 정체성을 말하던 시민의 입은 유튜브와 SNS에 의해 닫혀 버렸다. 시대의 정체성은 이미 소비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노예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구별짓기, 공항, 역, 모빌리티

전근대 사회의 통치 시스템이 소수 권력층의 독단과 독선(독재)에서 비롯되었다면 근대 국가는 토의와 토론을 통한 의견 수렴으로 한 사회의 정치, 경제, 외교, 문화가 작동되는 시스템을 지녀야 한다. 즉 토의를 통한 통치가 가능하냐 아니냐가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글쓴이의 주장이다. 그가 인용한 영국의 정치철학자 ‘바지호트’는 자유국가란 관용을 전제로 한 다양한 계층의 토의와 토론 시스템이 정비되어야 하고 이것이 근대국가의 시작이라 말한다. 글쓴이 또한 바지호트의 주장을 바탕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지호트의 자유국가이론은 객관적 과학지식에서 도출된 합리적인 지배를 강조한다.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 토론과 토의라는 방식으로 사회 각 계층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저자의 시선이 신선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토의와 토론이니 말이다.

 

일본 근대는 “기능주의적 등가물”이라 표현된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거칠게 표현하면 서양 근대는 계몽주의에 더해 폭발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과 식민지 수탈을 통한 자본이 첨가되며 혁명적으로 발전했다. 반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새로 유입되는 서양의 모든 것을 기존 일본 전통과 짝지어 변형, 융합하는 방식이었다. 서양의 근대화가 자생적이었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수동적이었다. 물론 이웃 조선이나 청나라와 달리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 구조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장치로 해석한다면 앞의 두 나라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상업에 냉대했던 조선과 비교해 에도 시대 일본 상인의 장사 마인드는 수월하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됐다. 막부 시대 권력층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통치시스템은 서구의 정당정치를 상대적으로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근대는 이미 존재하던 사회 시스템을 서양의 그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기독교 정신은 천황제로, 자본주의는 상업주의로 등가치환 되는 과정이 일본 근대화 과정이다. 무엇보다 사상적 토대가 되는 토의와 토론 중심의 의사결정과정은 수입된 서양 시스템이 아니라 막부시절 철저히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마련한 전통적인 일본 정치가 바탕이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기능주의적 등가물은 메이지 유신 이전 이미 일본이 가진 전통적인 여러 장치들에 의해 기초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다. 단순히 근대 일본을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아니지만 단순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치우친 역사해석은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문제와 갈등을 불러온다. 일본 근대를 객관적으로 봐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저자는 일본의 근대가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막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즉 메이지 유신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은 근대화 중이었다는 말이다. 지금 일본이 어디로 향하고 있지. 가까운 미래 일본과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또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졌다. 저자는 두루뭉술하게 국제 협력을 위해 세계 각국은 군비감축과 세계평화로 향해야 한다며 글을 마친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라 힘이 빠졌다. 뭐랄까 눈에 확 띄며, 이것이 핵심이라고 부를 만한 내용을 찾기 어려웠다.

 

근대의 시작을 토의와 토론에 의한 통치로 본 독특한 이 책에서 오랜 시간 역사를 연구한 글쓴이의 깊은 성찰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애매한 부분도 꽤 있다. 그건 지식이 짧은 내 탓이다. 몇몇 이해되는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들과 통찰을 얻었다는 측면에서 책은 매우 유용했다. 물론 기능주의적 등가물 부분이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은 역시 토의 토론이다. 다양한 의견 수렴이다. 미완의 국가, 미완의 문명이라는 표현은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어울리는 현재를 우리는 살고 있다. 글쓴이가 강조한 토의와 토론이라는 근대국가의 필요조건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건 지금 우리가 전근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정당정치, 자본주의, 천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