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땅두더지로 땅만 파고 살았던 종필엄마와 재규씨.
하찮은 속옷 다툼으로 번진 부부싸움이 재규씨의 심각한 걱정으로까지 비약된다. 별일도 아닌데 재규씨는 종필엄마가 농약을 마시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결국 헤프닝으로 끝나지만 말이다.

작년이었던 것 같다. 오랜 만에 고향에 내려갔었는데 아시는 분 두 분이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두 분 중 한 분은 항상 밝은 얼굴로 맞아 주시던 이웃 어른이셨다. 심지가 곧으셨고 생각도 깊은 분이셨는데 막상 어머니를 통해 자살을 하셨다는 말을 들으니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큰 일이 생겨 그러신 것도 아니고 단순한 부부사이의 말다툼이 원인이었단다.

이시백의 소설 “누가 말을 죽였을까”는 농촌소설이다. 농민들이 주인공인 연작소설이다. 맛깔스런 충청도 사투리가 면면히 녹아 있는 정말이지 담백하고 고소한 재미난 소설이다. 주제도 인물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런데도 소설의 밑바탕을 흐르는 극한의 절망감은 숨길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처절한 농민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종필씨, 개 값과 사람값을 무던히도 치러야 했던 충국씨, 포크레인으로 파놓은 구덩이를 삽 한 자루로 메워나가는 우칠씨,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던 말석씨 이야기…… 농사를 짓는 다는 이유로 단지 농민이라는 이유로 가늠하기 힘든 절망속에서 생을 이어가는 이네들은 분명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농민들이다.

사람이 정말 힘들게 살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걸까? 고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분 또한 농사를 짓는 분이셨다. 평소 자신의 고된 삶을 웃음으로 말하시고, 고통과 절망을 쓴 소주 한잔으로 달래던 분들이 그토록 쉽게 생사의 기로에서 쉽게 죽음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던 건 그네들이 느끼는 삶의 절망감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작가의 말마따나 저 죽은 줄은 알지 못한 채, 무덤 속에서 웃고 있는 농민들.
그들을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누가 말을 죽였길래 그들을 무덤으로 내모는가? 정말이지 이제는 심각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들 앞에서 우린 모두 죄인이다. 말없는 방관자 일뿐인 것이다.

“맞어, 다 웂는 게 죄여, 없을 무, 암 것도 암, 암 것도 웂는 무암리 사람들 다 겪은 일이여.”
무암리가 아니라 우리 나라의 모든 농민들의 죄는, 없는 게  죄 아닌 죄인 것이다.

 

개념이 없다는 말이 있다.

어른들보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뭐 자기들끼리도 개념 없다고 서로를 싸잡아 비난하기도하고 때론 어른들에게도 조심스럽게(?) 개념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어른이 보기에는 어린 녀석들이 정말 개념이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개념 없는 아이들보다 개념 없는 어른이 더 많아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학원에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관계로 종종 어른이면서 아이가 될 때가 있다. 중고생들과 대화를 나눌 때보면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사고력을 지니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아이들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또 나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편견에 휩싸여 아이들을 몰아 부칠 때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의식의 저편에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져 아이들보다 세상을 오래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도 안 되는 편견에 허우적대는 것인데 말이다. 결론은 어른들 아니 내 머릿속 생각의 스위치가 자주 꺼져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깨닫게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 『14살 철학 소년』은 책을 읽는 도중에 『35살 철학 어른』으로 성장했고, 책은 내가 가진 수많은 편견과 오류들을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아이들을 위한 철학 에세이가 어른을 위한 에세이로 바뀌는 순간 35살 어른의 머릿속 생각의 스위치는 ON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섹션별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짧은 글들이 수많은 생각꺼리들을 던져준다. 저자의 풍부한 지적 성과물들이 쉬운 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녹아있음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게다가 무척 재미있다. 아이들이 아닌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한 수준의 교양이 흘러넘치고,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의 편견과 싸우는(?) 모험을 즐길 수 있다.

책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 동일할 수 없다는 사고의 다양성과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 부분 편견이라는 더께를 뒤집어쓰고 있는지, 엉뚱함을 배경으로 한 남과의 초석이 되었는지, 인권에 대해, 세계화에 대해, 지금을 사는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들이 가득한 보물창고와도 같다.

개념이 없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항상 시끄럽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개념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가까운 다음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개념을 탑재(?)시키는 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래저래 생각 없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이 책이 개념 없는 어른들과 자라나는 미래의 어른들에게 개념을 심어주는 그래서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모두 생각의 스위치를 켜자. 개념탑재를 위해……

먼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책에 관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단편들이 제각각 독창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뭔가 아쉽다는 느낌의 결말이 모든 단편들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독자자신의 상상 속에서 이야기들이 다시 구성되어야 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리라. 때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럴 때는 단편마다 곁들여진 일러스트를 보는 재미를 찾으면 된다. 각기 다른 아티스트들의 일러스트는 책의 또 다른 매력이며 또 다른 이야기꺼리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소함과 일상의 뒤흔드는 비현실적인 사건은 결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죠 메노의 단편집 『유령비행기』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것이리라. 작은 나비의 연약한 날개 짓이 거대한 태풍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처럼 책 속의 단편들은 소소함이 묻어나는 작은 일들, 타인과의 일상적인 관계와 다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복되는 인간사들이 기괴하고 황당하며 게다가 비현적인 사건들과 맞물린 독특한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세상의 종말 전에 들리는 소리”에서는 무엇이든 집어 삼키는 거대한 블랙홀의 출현과 맞물린 주인공의 가족이야기-주인공 론은 아내와 별거중이며 이를 고통스러워한다-,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탈출하는 황당한 사건에서 엄마의 부재를 꼬집는 아이, 달이 사라진 도시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상적인 대화와 몽환적인 결말, 비행기의 연착으로 인한 짜증으로 갈 때까지 간 연인이 폭죽과 원숭이 흉내로 다시금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되는 “유령비행기”……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비현실을 지향하고 그 비현실성은 다시 우리의 일상을 향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현대인들은 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비현실의 몽상이나 환상을 갈망할런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고통의 중심에는 결핍의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일상에서 느끼는 본질적인 결핍, 또는 외로움이 인간이 지고 살아야 할 숙명 같은 거라면 비현실적인 사건들 또한 인간의 상실감이 투영되는 인간이 만든 또 다른 세상일 것이다. 

“달의 건축양식”에서 달이 사라진 밤거리를 헤매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진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토머스의 아버지는 또 어디로 간 걸까?

“모르겠다. 토머스. 모든 것이 아주 파랗단다. 무슨 꿈을 꾸는 것 같구나. 아주 예쁘다. 오, 나무가 있네. 나무가 아주 하얗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걷고 있어. 숲 전체가 아름다운 나무로 꽉 차 있다.” 

“아무래도 나는 달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