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말 해외 원정도박으로 구설수에 오른 신정환씨가 올해 초 귀국 했을 때 미디어에선 온통 신정환씨가 입은 명품 패딩과 명품 청바지에 관한 기사 일색이었다. 뭐 외국에서 도박을 하던 명품을 입던 그거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고, 법을 어겼다면 위법한 내용에 관해 처벌받으면 그만일 텐데 공인이라는 이유로 대역죄인 취급을 받은 신정환은 명품 때문에 또 한 번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도대체 그놈의 명품이 뭐 길래 네티즌과 미디어의 관심이 패딩과 청바지에 집중된 것일까?
럭셔리를 구매하는 건 개인의 선택이다.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끼기에 살 것이다. 신의 영역에 있던 럭셔리가 대중의 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비난받을 필요는 없다. 대중들이 귀하고 값진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야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낼 때는 내가 원래 갖는 권리도 당연히 알아야 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줄 알아야 한다. 내 돈을 주면서도 내 권리를 모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성인의 삶을 무사히 살아가기 어렵다.……중략…… 환상을 구입하고 만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돈이 빠져나간 내 계좌는 환상으로 채워 넣을 수 없다. 돈은 없으면 없는 것이고 있는 셈 판타지를 가질 수 없다. 내 계좌는 비루할지언정 지독한 현실 자체니까- 본문 121쪽
누군가 명품을 입고 있다면 그 사람의 재력이 그만하다는 얘기일터 하지만 그만한 재력이 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탐하는 현상에는 다른 사회적 심리적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현상인가? 환상에 돈을 지불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명품을 생산하기 위한 희생, 명품을 구입하기 위한 희생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는 다면 명품 선호 현상에는 분명 꽤 복잡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유를 찾으려면 먼저 명품이 대체 뭔지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책은 명품에 대한 다양한 이야깃거리로 풍부함을 자랑한다. 명품을 선호하는 현상에 대한 단초가 곳곳에 숨어있다. 레디앙에서 출판된 『명품 판타지』는 명품의 대명사 샤넬을 중심으로 명품에 대한 거의 대부분 역사가 다양한 에피소드와 흥미로운 읽을거리들로 엮여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 그리고 미국 드라마를 위시한 다양한 분야에서 명품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높은 수준의 삽화(?)도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건 꽤 재밌는 책이라는 사실이다.
20세기 초 본격적인 사회 참여를 시작한 커리어 우먼들에게 기존 빅토리아풍의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이 아닌 새로운 옷이 필요했다. 샤넬의 옷이 세계적인 명품이 된 건 바로 이런 시대적 변화 때문이었다. 지독히 실용적인 디자인과 시대의 조류였던 모더니즘을 결합한 샤넬의 순발력과 장인 정신은 그래서 명품의 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명품의 기본조건이 편리함과 내구성이라는 사실은 명품에 대한 선입견이 다분했던 나에게 조금 충격이었다. 명품은 화려함과 희소성을 갖춘 비싼 물건이라는 인식에 균열이 시작됐고, 고가의 명품 브랜드가 출현하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증은 더해갔다. 책에선 명품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어 내는 메커니즘이 현대의 유통구조와 고가의 환상을 만들어 파는 브랜드, 그리고 새로운 유행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미디어에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인간이 명품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뭘까?
합리적인 사람이 보기에, 유행이란 종종 그 깊이를 측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역사상의 여러―아마도 대부분의―시기에 유행의 전반적인 목표는 뭔가 어마어마하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울러 불편해 보일 수 있다면, 그 위업은 더 커졌다. 실용적이지 못한 복장은 곧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육체노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그 어느 시대에나, 그 어느 문화에서나, 이런 과시욕은 편안함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본문 459쪽「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은 16세기 옷에 풀을 먹여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는 바람에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사례와 17세기 유럽 상류층 남자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가발을 착용한 것을 불편한 유행의 예로 제시한다. 얼굴에 애교점을 찍고 다닌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유행은 명품과 직결된다. 과거 유행이란 신분의 높음을 알리는 수단이었고, 그 유행에 따라 소수의 명품들이 귀족과 상류층을 위해 소비되었을 것이다. 명품이란 높은 신분을 자랑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주장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과거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좋은 옷 명품 옷은 이제 부를 자랑하고픈 사람들의 전유물이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 일반 평민들이 과거에 높으신 양반들의 옷이나 장신구를 언간생심 욕심이나 낼 수 있었는가?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득에 비해 값비싼 명품을 종종 구입한다. 또 명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명품 구두 한 켤레쯤, 명품 시계 하나쯤, 명품 슈트 한 벌쯤은 대단한 과소비라 생각하지 않는다. 명품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이유는 물론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패턴 인식과 적응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사회적 원자들을 직접 이용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사회적 원자)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모방(본능적, 또는 의식적인 모방)을 하면서 우리는 안전을 확보하고, 타인들을 도구 내지 우리 자신의 결정을 돕는 힌트로 이용한다. 이것은 언제나 좋은 이용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게 놓아두면, 그들은 대개 서로를 흉내 낸다. …… 개인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사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획일화되는 일이 많다.” (중략) 약한 상호 작용이 우리를 새로운 핸드폰이나 루이뷔통 패션에 열광하는 집단으로 묶는다면, 사회 물리학의 강한 상호 작용은 협력, 경쟁 등을 통해 가족과 친구 같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낸다. 이런 것들을 인간 사회의 강한 상호 작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약한 상호 작용과 강한 상호 작용은 둘 다 사람들을 개인으로 두지 않고 집단적인 패턴에 따르게끔 몰아댄다.―분문 145~146쪽「사회적 원자」마크 뷰캐넌
마크 뷰캐넌에 따르면 모방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본능이다. 그 모방이 발전하면 사람들이 패턴을 이루게 되고 사람들은 패턴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쉽게 획일화된다. 명품에 대한 환타지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모방과 패턴화를 동시에 진행시킨다. 그럼으로써 명품을 통해 약한 상호 작용으로 묶이게 되는데 이는 명품을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명품에 대한 정보와 교류만을 통해 하나의 패턴으로 묶이는 것이다. 즉, 현대의 명품 판타지는 인간의 모방 본능과 패턴을 쫒아가는 본능이 발달된 미디어와 정보통신망과 결합하여 더 빠르고 방대하게 패턴화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명품의 시작은 과거 신분을 과시하던 소수 귀족층의 패턴화를 편리함과 실용성을 추구하던 20세기를 지나면서 미디어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패턴화 되었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는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에 영혼까지 팔아버린다는 사실. 신정환씨의 명품에 그토록 관심이 집중된 것도 우리가 명품이라는 사치재에 패턴화 되어 있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명품 선호 현상이 만들어내는 어두운 측면 -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한 아프리카의 눈물, 명품 가죽 때문에 희생되는 동물들, 선진국 고객들을 위해고가의 명품을 만들기 위해 저임금에 시달리는 개도국의 노동자들-을 일소하기 위한 패턴을 만들어 내면 사치재가 아닌 진정한 명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환경과 인권을 고려한 에코 명품이 부각되는 현실을 보면 이미 명품에 관한 패턴이 변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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