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은이) | 한승동 (옮긴이)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1-11-15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저자가 들려주는 서양음악의 세계

치열한 시대적 사유와 서양미술 기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는

미술과 미술 비평이 어떻게 시대의 문제와 맞닿을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미술기행 에쎄이로,

1992년 한국에 소개된 뒤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20여년 만에 나온 그 연작으로,

서경식의 주된 글쓰기 대상이었던 미술이 아닌 서양음악을 소재로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또다른 면모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음악이라는 예술이 지닌 고유한 성질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음악이 어떻게 인간?사회?시대와 뜨겁게 호흡해왔는지까지,

서경식만의 흡인력 강한 글쓰기로 말해주고 있다.

 

 

음악에 대한 사랑은 치명적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서경식이 가난한 어린 시절 음악에 품었던 동경과 열등감의 고백에서 출발한다.

문화적 교양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재일조선인 집안에서 자랐기에 그에게 음악이란 “신분이 다른 연인”과 같은 것이었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標識)고 교양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라는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내게 클래식음악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러운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케이스 속의 아름다운 악기를 잠시라도 만져보고 싶다, 무슨 소리가 날지 내 손으로 켜보고 싶다

 (…) 애타는 동경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신분이 다른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어릴 적」(본문 43~44면) 중에서

가난에 더해진 문화적 소외로 인해 가지게 된 열등감과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었던 음악을 향한 동경은 사실 소년 서경식의 것만은 아니다.

이는 클래식음악에, 더 넓게는 고급예술에 대해 우리 모두가 느끼는 당혹과 열망이라 할 수 있다.

고급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한다는 것은 풍족한 엘리뜨 집안에서 자라나 어릴 적부터 공기처럼 문화적 축적을 누려왔다는 의미이기 쉽다.

클래식음악은 오디오쎄트나, 값비싼 악기와 음악교육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을 알고 싶다는 열망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가 다른 클래식음악 에쎄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음악을 향한 자기고백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이와같이 서경식의 소년시절에서 청년시절,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음악에 품었던 복합적인 감정과 그에 얽힌, 때로는 한없이 서정적이고 때로는 긴장감 넘치는,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어 흡사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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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잡스는 나이와 더불어 경직되는 사고를 레코드판에 비유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서른만 넘어가면 완고한 사고방식에 빠지고 혁신적인 성향이 줄어드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사람들은 일정한 패턴 속에 갇히는 겁니다. 레코드판의 흠과 같은 그런 패턴 말입니다. 그들은 결코 거기서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호기심이 왕성해서 평생 어린아이 같은 사람도 있지만 결코 흔치 않아요.” 마흔다섯이 된 잡스는 바야흐로 자신의 홈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본문 600쪽.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디지털 허브의 신대륙을 발견한 잡스. 큰 리스크를 감수하고 새로운 비전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그는 모험가요 탐험가였다.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는 결코 혁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험이 없으면 발전 또한 없다. 잡스가 칭송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모험정신이다. 탐험가의 모험정신과 통하는 부분이다.

 

 시대를 앞서 간 탐험가들의 기록으로 가득한 『탐험가의 눈』. 그들의 기록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그저 과거의 기록쯤으로 생각했다.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활약한 몇몇 탐험가들도 책 속에 있었다. 볼만한 것도 많다. 다양한 기록사진과 정밀화는 탐험가들이 직접 남긴 기록과 어우러져 생생한 느낌이 든다. 책을 일기 시작하고 얼마간 그냥 덤덤하게 읽었다. 탐험가의 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책을 중간쯤 읽어 나갈 때 탐험가들의 정신이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탐험의 동기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책 속의 탐험가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틀을 깨며 신비한 발견, 위험한 도전,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넘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친근한 가족과 이웃들로 둘러싸인 안락함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것에 집착했다.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고독은 역겨움과 비교하면 축복이다.” 본문 146쪽(해외로 나선 영국의 여성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

 

 영원한 곳, 가장 가치가 있고 결코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한 곳, 이 경이로운 아래 세계에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유일한 곳은 물론 벌거벗은 우주 자체, 대기권을 넘어선 곳, 별들 사이, 햇빛이 먼지나 행성 공기의 쓰레기를 움켜쥐지 않을 곳일 것이다. 그곳의 공간의 어둠, 빛나는 행성, 혜성, 해, 별은 정말이지 넓은 대양 0.8킬로미터 아래 내려와 있는, 경외감에 사로잡힌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 생명의 세계와 아주 비슷해 보일 것이다.

-본문 275쪽(심해 탐험가 박물학자 “월리엄 비브”)

 

 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통해 탐험가들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들의 고귀한 정신에 감동을 느낀다는 단순한 의미를 벗어나고 싶다. 환경과 경제, 그리고 자원의 문제. 끝없이 늘어가는 국가 간, 사람들 간의 갈등으로 인류 문명이 파국으로 치닫는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의 탐험가들이 절실하지 않을까?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 잡힌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인류의 생존을 열어줄 탐험가 말이다. 현재 지구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19세기와 20세기의 탐험가 정신이 재조명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당위는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다. 소수의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온 정열을 다했듯이 이젠 인류 전체가 탐험가가 되어 다가올 미래의 지구를 변화시켜야 한다. 현재의 삶과 완전히 다른 삶, 소비를 줄이고 지구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향의 새로운 삶을 위한 탐험가 정신이 필요하다. 이렇듯 거창하게 탐험가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움직임에 필요한 열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공간의 느낌, 정적, 모래의 파삭파삭한 명료함에 환희를 느꼈다. 나는 사람들이 오래전 옛날부터 낙타의 인내와 그들 자신이 물려받은 기술에 의존하며 목숨을 걸고 여행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하면서 과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문 289쪽.(전통의 방식으로 아라비아를 여행한 탐험가 “윌프레드 세시저”)

 

 과거와의 조화, 전통적 방식과 인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탐험가, 열정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 작가 장 아메리. 그의 저서 「자유죽음」(산책자/2010)에는 장 아메리의 삶의 자세가 고스란히 담긴 문장이 있다. 확실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랬다. 삶이 탄생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당당하게 삶을 살면 길이 열린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삶을 살았던 그가 결국 자유 죽음(장 아메리는 자살을 자유죽음이라 표현했다. 자살을 보는 시각에서 죽음보다 자유에 더 큰 가치를 두고자 했다)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삶을 살았기 때문일 듯싶다. 즉,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는 자유가 전제돼야 하고, 그 자유는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당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가 남긴 교훈일 것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생각해 보았다. 얼핏 생각나는 것이 고난과 좌절이다. 어떤 인간이든 삶의 과정에서 수많은 벽 앞에서 자빠지고 넘어진다. 이런 고통의 시기에 인간은 자신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시작하는 극복의 경험을 쌓는다. 차이가 분명 존재하겠지만 인생에서 고난은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원한다면 말이다. 아무 열정도, 아무 의지도 없이 살아가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닌 사물의 삶이다. 존재의 확장을 위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인생의 쓴 맛, 그리고 처절한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성찰의 계기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가수다”의 제작자로 유명한 김영희PD의 책『소금사막』은 좌절과 실패를 통해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가려는 한 인간의 소중한 기록이다.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순간의 추락은 누구에게든 쉽다. 계기가 어떻게 됐든 인간 김영희는 한 순간의 추락을 경험했다. 그리고 떠난다. 남미라는 거대한 대륙에서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결국 인간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희망과 꿈이 바로 삶의 목적이며 완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200만 명. 안데스 산맥 2,800m 고지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 함부로 살 것이 아니다.- 본문 93쪽.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본문 135쪽.

 

성실히 살 일입니다.

열심히 살 일입니다.

인생 허투루 살 일이 아닙니다.-본문 147쪽.

 

 술술 읽히는 쉬운 책이지만 짧고 강한 메시지가 꽤 오래 머릿속에 남는 그런 책이다. 남미의 이국적인 사진들도 그렇지만 좌절의 고통을 씻어내는 글쓴이의 마음이 잘 드러나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가 기획하여 히트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인간다움을 바탕으로 한 사람 중심의 프로그램이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인간 김영희는 꽤나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그의 생각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니 그가 성공한 인생을 사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진지하게 삶을 성찰할 줄 아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다. 또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가 바로 사람을 향한 그의 사랑과 희망이다. 남미여행에서 그가 본 것의 대부분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느낀 것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의 지표로 다시 결정한 것도 사람이었다. 결국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남미 여행의 끝은 결국 그가 좋은 프로그램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서는 것이다. 삶에 대한 당당함이 죽음을 초월해야 가능하다는 장 아메리의 말처럼 좌절을 초월한 그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 자유롭고 당당하고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프로그램 말이다.

김영희, 나는가수다, 소금사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