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의 문화는 미디어가 주인공이다. 급격하게 증가한 티비와 인터넷의 보급은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월드와이드웹이 상용화되면서 문화는 창조만큼 빈번한 복제를 통해 거대하게 팽창했다. 새롭고, 다양하고, 복잡하고, 파편화된 신개념의 문화가 탄생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지만 그렇다고 인터넷이나 미디어가 만들어낸 문화에 밀려 과거의 문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음악회와 연극 등 아날로그에 바탕을 둔 문화 상품들도 여전히 건재하다.
문화야말로 최초의 월드와이드웹이다. 모든 운반자가 문화라는 연못에 각자의 씨를 던지는 거대한 통신망인 것이다. 웹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통신기술이나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인간의 두 다리, 말, 배, 철도가 믿음, 소리, 이야기, 유행, 사상을 전달했다. 지금은 빠르고 순간적인 전자 충격파들이 그 일을 한다.-본문 361~362쪽.
다시 말하면 현재 문화의 생산과 유통에 인터넷이 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본질적으로 인터넷은 생산과 소비의 물리적 시간을 단축시켰을 뿐이다. 그 단축된 시간이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는 바탕이 된다. 물론 맥루언의 주장처럼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인간의 지각을 확장시키고, 인류 문명의 기반 시설까지 변화시켰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화는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생산라인이 다양해지고, 소비자가 확대됐고, 유행의 순환이 짧아졌을 뿐 18세기 문화와 현재 문화의 본질은 동일하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벽히 대신할 수 없듯이 영화는 연극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다. 우수한 전자기기를 통해 들리는 클래식 연주음이 공연장의 오케스트라의 아우라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어느 시대에는 고급문화라고 칭송받던 문화가 다른 시대에는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지 말란 법은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문화제국주의의 우려는 과거 유럽 중심 문화의 세계적 현상처럼 영원할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지엽적인 문화의 소멸과 탄생이 사람에 따라 유감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런 일들은 문화사를 뒤져보면 흔한 일이다. 어쨌든 세상은 그래도 계속 돌아갔으니 말이다.
문화 상품만큼이나 많은 문화 평론들이 때로는 걱정과 우려로, 때로는 칭찬과 격려로 문화적 현상을 진단하지만 어쨌든 문화는 다양성과 변화라는 두 축으로 지금까지 진화해왔다.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문화에 대한 평가는 모든 인간이 결정할 일이며 이는 전문가들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몫이 아닌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 된다.
학창시절 선정적인 잡지들(책에서 언급된 FHM잡지와 유사한) 돌려 읽고, 친구들과 선정적인 비디오를 함께 보며, 오락실에서 격투 게임을 즐겼다. 학교와 사회에서 당연히 금하는 당시의 시각으로 본다면 저질 문화 상품에 열광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경험했던 문화들 또한 내게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문화란 그런 것이니까. 결국 문화를 소비하는 개개인의 판단이니까.
내가 아는 것이라곤 고급문화든 저급문화든, 톨스토이든 <그랜드 세프트 오토>, 문화가 없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보다 훨씬 야만적인 세상이라는 것. 이뿐이다.
-본문 376쪽. (그랜드 세프트 오토는 폭력성 등으로 논란이 많았던 GTA라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