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란 과연 다른 생명체에 비해 우세종일까? 자연생태계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세종임이 확실하지만 개인적으론 그저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난 유기체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 우연이다. 인류가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생태계의 절대 강자가 된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인류 문명의 미래 또한 우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류 문명을 필멸할 것이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현재의 야만적인 경제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지구생태계에 대한 약탈을 멈추지 않는 한 말이다. 인류가 우연히 이성과 과학을 손에 넣어 지구 생명계의 강자가 된 것이 진화의 끄트머리라면 인류의 필멸은 분명 인간들의 행위에 그 원인이 있다.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인간은 그 잘난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인류 문명의 필멸을 예상하기에 끊임없이 불멸을 추구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
존 그레이의 글은 놀라웠다. 책은 과학지상주의에 빠진 어리석은 인간들이 펼치는 불멸을 향한 집념과 그 허무함을 간결하고, 집요하게 분석했다. 글에 언급되는 많은 사람들(상당히 유명한 사람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체의 글이 완성되는 이런 유의 글은 읽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다. 심령술과 유령과의 대화 그리고 죽은 자들과의 교차 통신과 관련된 부분이 생소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었다면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불멸화 정책은 매우 신선하고 새로웠다. 유령의 존재가 영혼 불멸로 연결되고, 영혼 불멸이 바로 인간의 영원한 생명력을 의미 한다는 것보다 더 흥미롭던 건 그 영혼 불멸의 해답을 얻기 위해 매우 과학적인 방법들이 동원됐다는 사실이다. 심령회에 참가하여 교차통신을 시도했던 많은 사람들 또한 당대의 유명한 과학자들과 석학들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과거 종교에서 믿음의 대상이었던 불멸은 20세기 초 과학의 대상으로 치환됐던 것이다. 진화의 마지막이 인류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체는 사라지더라도 영혼만은 영원하리라는 간절한 염원을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이뤄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과학의 이름아래 수행되던 이러한 인류의 영원한 생존 프로제트는 이후 러시아 혁명을 통해 불사의 인간형 즉, 공산주의가 찬양하는 불멸의 인간 탄생이라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수렴된다.
레닌 사후 레닌의 장례위원회 이름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불멸화 위원회였다. 실제로 러시아의 과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 레닌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그들이 이룩한 혁명이 과학적인 진화의 결과로 믿었고 그래서 그들은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시킬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이 수행한 작업은 영원불멸의 신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학살이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간상에 부합되지 않는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은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장에서, 처형장에서 개처럼 죽었다. 볼셰비키들이 원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반하는 인간은 그들에게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었다. 그렇게 과학과 혁명이 만나 살육의 괴물을 잉태했던 것이다. 불멸을 위한 학살이라는 흥미로운 역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시라.
심령연구자들은 모두가 식역하 로맨스의 등장인물이었다. 과학은 보편적 소멸에 대한 공포를 불러냈다. 개인도 무로 돌아가고 종도 소멸하여 우주도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붕괴한다는 전망을 불러온 것이다. 이런 전망에 뒤이어 영혼 지속의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이 나왔는데, 이는 불멸의 추구가 과학이라는 시대정신에 맞게 수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 123쪽
20세기 초 심령연구자들에 의해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의미의 불멸이 과학의 이름으로 수정된 것과 비교하면 과학과 진보의 이미지로 포장된 자본주의가 종교요, 주술이 된 21세기 초 현재가 묘하게 겹쳐진다. 죽음이 인간 삶의 완성임을 깨닫지 못하고 과학의 맹신으로 불멸의 망상에 빠진 책 속의 사람들과, 파국으로 향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발버둥을 희망삼아 소비와 풍요가 영원히 불멸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허우적대는 현실의 사람들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불멸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계기를 책에서 찾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