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 출신인 영국의 존 그레이는 지독한 독설가다. 그가 쓴 글은 사람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인간 존재가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동물과 비교해도 못하면 못하지 더 나은 구석이라곤 별로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요즘 내게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는 관점이 사라진 건 존 그레이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나이듦이 육체적 각성으로 다가오는 연배에 이르니 거꾸로 생각의 깊이가 조금 깊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축해본다. 뭐 자뻑이다. 여튼 내 결론은 이렇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헐겁다. 단지 과대 포장된 휴머니즘으로 경계가 굳건해 보일 뿐 실제는 모호하다 못해 흔적으로만 약간 존재할 뿐이다.

 

지구 생태계에 인간이 하는 짓거리를 가만 지켜보면 이성과 존엄의 동물이라는 인간이 하찮게 느껴진다. 거창한 문명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은 문명과 문화의 향유자로서 스스로를 치켜세우지만 파국의 순간 단순히 먹을거리만 모자라도 짐승으로 돌변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거대한 위험 앞에서 인간 이성은 본능 앞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끝없는 욕망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지구라는 숙주에 기생하며 양분을 빨아먹는 인간에 비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생충들은 그리 탐욕적이지 않다는 서민 교수의 의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인다. 어쩌면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는 기생의 대명사인 그들은 그래도 좀 낫다. 기생충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숙주에 죽이거나 숙주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진 않으니 말이다. 물론 메디나충 같은 질 나쁜 놈들도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부분 탐욕에 물들어 숙주인 지구를 작살내는 인간들에 비하면 그 파급력은 작아보인다.

 

서민교수가 참 좋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었고, 책에서 기생충을 알게 되고 결국 기생충에 관심이 많아졌다. “기생”이라는 책이 출판된 사실을 알고 냉큼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는 사실은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뭐 그랬다.

 

책은 무지 재밌다. 그래서 금방 읽었다. 그냥 기생충들이 경이로웠다. 끔찍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기생충은 그리 끔찍하지 않았다. 기생을 읽으며 내내 생각했던 한 단어는 바로 공존이었다. 그리고 진화. 공존을 통한 진화. 기생충과 숙주 간의 끝없는 진화 전쟁. 유익했다.

 

기생충의 역사는 인류 진화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기생충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변화하는 숙주들에게 더욱 효율적으로 기생하며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진화해왔다. 이에 인류 또한 기생충을 막기 위해 진화해왔다. 내용은 책에 잘 나와 있으니 읽어보시면 된다.

 

그렇다면 19세기 이후 탄생한 자본주의적 인간들의 진화는 어떠한가. 막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인류 진화의 막장을 연출하고 있다. 이 막장으로 치닫는 인류에게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생충들의 진화를 바란다. 뭐랄까? 돈, 돈, 돈 하는 인간만을 숙주로 삼는 기생충이 탄생하거나, 혹은 몰지각하고 비상식적인 정치인들에게만 기생하는 기생충이 발생하면 좋겠다. 전쟁광들, 테러리스트, 독재자, 야비한 국제금융전문가에게만 기생하는 기생충도 좋겠다. 헛소리지만 진심이다.

기억이 맞는다면 단출한 카페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 서넛 정도였는데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교수님은 분명히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카페에는 음악 대신 낭랑한 목소리의 시 낭송 테이프가 돌고 있었고, 낭송되는 시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였다. 조용히 낭송되는 시를 따라 ‘사평역에서’를 읊조리던 교수님의 모습이 아직 선명하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개인적으로 난 글쓴이와 친분이 있다. 오랜 시간동안 만나거나 연락을 하지는 못했지만 오래전 시에 흠뻑 취한 저자의 모습은 내게 생생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생각하는 지은이는 시와 시조, 아니 우리 가락과 한 몸이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노래 그 자체이다.

 

고전문학에 대한 학창시절의 기억이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또한 고전이라면 고답적이고 어렵다는 선입관이 가득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통의 노래들을 현대의 감각으로 쉽게 해석해 놓은 지은이의 책들은 다르다. 글쓴이의 능력은 이미 전작『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시조가 재밌다는 사실과 더불어 언어를 통해 자유자재로 풍성한 유희를 즐겼던 우리 조상들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을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옛 노래의 숲을 거닐다』는 전작에 이어 우리 전통의 노래들이 얼마나 재밌을 수 있는지 재차 확인해 주는 고마운 책이다.

 

시조에 국한되었던 전작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번 책은 향가에서 시작해 고려가요와 가사 그리고 시조로 이어져 조선 후기 문학의 꽃인 사설시조까지 두루 아우른다. 때로는 삶의 애환을 때론 사랑을 그리고 자연과 충절을 읊은 우리의 노래를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 놓았다. 특히 나를 포함해 고전문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분(?)들을 위한 친절한 전문적인 보충 설명들이 책 곳곳에 포진돼 있다. 무엇보다 저자의 맛깔스럽고 군더더기 없는 글 솜씨는 전작에 이어 더욱 진일보한 듯 느껴진다.

 

시대가 뒤숭숭해서 그런지 온 사방에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이 천지에 깔려 있다. 상처를 주는 존재의 확실성은 부재한 가운데 열에 아홉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상처를 치유한다는 책들이 넘쳐흐른다. 타인의 조언이나 격려로 마음의 상처가 쉽게 치유된다면 참 편한 일일 테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 완벽한 위로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달렸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내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하며 치유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노래가 아닐까 싶다. 글쓴이가 강조하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마음속에 쌓인 시름을 풀기위해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기보다는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이 치유의 최선책이라는 사실. 우리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쉽게 살아낼 인생은 없다. 누구의 삶이든 그 삶은 고통과 슬픔이 씨줄과 날줄로 켜켜이 짜여 있는 법이다. 그래도 살아야 할 삶이라면 그 깊은 시름을 털고 위안을 얻기 위해 노래를 불러봄은 어떠한가?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낸 조상들의 노래를 읊조리는 건 또 어떨까? 만약 그러고 싶다면 어서 옛 노래의 숲을 거닐어 보자. 책을 펼치는 순간 시름이 반으로 줄어들 테니 말이다.

짜디 짠 장아찌의 맛이 혀끝에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때는 몰랐다. 그 깊은 맛을.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다. 깊은 맛이 무엇인지, 아니 오래 남는 맛이 무엇인지 말이다. 깊은 맛은 자연 그대로의 맛이다. 지금도 조미료 맛에 길들여진 나는 맛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할 말이 별로 없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서 그냥 덩달아 맛있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다. 미각에 대한 나의 감각은 나의 지적 무지와 맞먹는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안다. 고향의 진한 맛.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맛과 사람의 정성이 들어간 맛. 그래봐야 산에서 나는 산나물과 푸성귀에 한 해서지만 말이다.

 

 10년 정도 바닷가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과거 산골에선 구경도 못한 해산물과 음식들을 많이 접한다. 바다 냄새 맡으며 사는 바람에 조금 나아진 거라곤 입에 대지도 못했던 회를 이젠 곧잘 먹는 다는 것 정도? 아직 젓갈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하지 못하니 바다 맛을 온전히 알려면 아직 멀었다. 가까운 시장이나 바닷가에 갈 일이 있어도 먹을거리엔 별 관심이 없으니 천상 맛을 통한 극한의 즐거움을 얻기는 글렀다. 뭐 어쩌겠는가. 사람마다 생긴 것이 다르듯 입맛 또한 천태만상인걸 말이다. 하지만 회 맛을 조금 알게 된지라 신선한 자연의 맛이 뭔지 약간은 안다. 된장에 묵힌 장아찌든 갓 잡은 물고기의 싱싱한 회든 그 맛의 깊은 곳에는 자연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 뭐 이 정도면 많이 아는 게 아닌가(?)싶기도 하다.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6년 자란 숭어를 ‘눈부럽떼기’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숭어는 7년 이상 자라야 숭어라 부른다. 10년 정도 자란 숭어의 맛이 그렇게 기가막히단다. 그러니 7년 아래는 숭어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충분히 다 자란 숭어는 ‘출세어’라 불린다. 누군가(아마 어부겠지만) 숭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 6년 자란 숭어를 보고 "너는 숭어도 아니다."라고 했단다. 화가 난 숭어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다나.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눈부럽떼기'. 책을 읽다가 한 참을 웃었다. 우리네 선조들의 작명 센스가 탁월하다.

 

 한 가지 더. 산란기의 쭈꾸미는 빈 소라껍데기에 들어가 알을 낳는다. 껍데기 속에서 자리를 잡은 후 쭈꾸미는 입구를 막는 습성이 있다고. 그래서 쭈꾸미를 잡을 때 빈 소라를 사용하는데 언젠가 어부에게 잡힌 쭈꾸미가 고려청자를 붙들고 올라온 적이 있다고 한다.(물론 고려청자는 입구를 막는 데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청자를 달고 올라온 쭈꾸미 사진을 책에서 볼 수 있다) 덕분에 바다 속에 침몰한 보물선을 발견했다고 한다.

 

간만에 유쾌한 책읽기였다. 바다가 만들어 낸 우리 먹을거리에 대한 맛과 멋. 그리고 이름의 유래와 이름만큼 유익한 맛있게 먹는 방법. 개발과 오염으로 점점 줄어드는 우리 바다 맛에 대한 반성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개운하고 신선한 그리고 살아 있는 맛을 전하기 위해 발품을 판 저자의 열정도 대단하다. 바다 맛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책을 통해 맛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깊은 자연의 맛, 바다의 맛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맛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기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책에 적힌 맛들이 몇 년 후 완전히 사라져 문자로만 맛봐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결국 먹고 사는 것만큼 고민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자연을 그대로 잘 가꾸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일일게다. 자연산 바닷물고기가 거의 사라지고 우리가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해조류뿐일 것이라는 신문기사가 책을 읽고 난 후 더 불편해졌다. 먹는 즐거움과 함께 자연을 생각하는 진지함을 책을 통해 얻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