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철학자 존 그레이의 글을 접하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몰려온다. 지독한 그의 독설을 떠올리면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부여받는 천부인권 숭고함 따위도 인간 스스로 북 치고 장구 치는 자가당착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나도 인간이다 보니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고대 중국은 지푸라기 개를 만들어 종교 의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사용했다. 지푸라기 개는 종교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는 최고의 숭배 대상이지만, 의식이 끝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짓밟히고 팽개쳐진다. “천지는 어질지 않으며 만물을 추구(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인간이 지구의 균형을 흔들어 댄다면 짓밟히고 팽개쳐질 것이다. 가이아 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이론이 비과학적이라서 거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이아 이론이 인간은 지푸라기 개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론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 본문 55~56쪽 /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발전과 진보의 가면을 쓴 인간의 탐욕은 지구 생태계의 파국을 부르고 있다. 70억이 넘는 인간종에 의해 지구는 쉼 없이 병들고 있다.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는 지구에서 과연 인권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팔팔했던 20대엔 나도 보편적 인권과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외치며 인권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이라크 전쟁의 폭격에서 스러져간 아이들을 보며 분노했고, 파키스탄의 아동 노동에 분개했다. 하지만 솔직히 40대 초입에 들어선 지금 난 인류 보편적 인권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에 빠져 있다.

 

 인간에 대한 모든 폭력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하며, 인간이면 누려야 할 당연한 사회적 권리에 대한 완벽한 보장이 가능한 사회는 유토피아다. 그런 세상이 올는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중요한 부분의 간과해선 안 된다. 앞서 보편적 인권에 대한 나의 회의감에는 순서가 있다. 난 인권에 대한 공부를 나름 충실하게 했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그렇다. 인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어느 정도 가능해야만 현재 인간 문명이 향하는 종말의 시나리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인권문제는 세계화의 결과물이다. 책에서 언급된 르완다의 홀로코스트, 일본의 위안부 문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 어린이 노동으로 고통 받는 파키스탄 아이들 등이 그 예이다. 자본과 경제의 세계화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갈등과 대립을 양산했다. 물론 그 세계화의 막장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파국의 전조다.

 

 최초 철이 들어갈 무렵 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부조리한 사회 경제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제도와 원리는 인간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고 그 탐욕의 자양분은 인간 사이의 불평등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작금의 자본주의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가 고통을 받아야 누군가는 배부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인간이 바뀌는 건 더더욱 어려워보인다. 비겁한 타협이라 불러도 좋다. 인간종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현재 내 상태다. 결론은 이렇다. 인권을 위해 세상을 바꿔야하고 그러기에는 인간의 탐욕이 너무 강하고 결국 인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문명의 파국을 먼저 생각하는 씁쓸한 상태가 지금의 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근 1년 동안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도는 화두다. 파국으로 향하는 세상을 향해 아무리 쓴 소리를 내뱉는다 해도 별로 바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일말의 책임감일지 모르겠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파국을 향한 거대한 쓰나미에 생채기라도 조금 내야하는 게 사람 사는 길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막장으로 치닫더라도 인간답게 막장을 맞이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역설이지만 그렇기에 인권에 대한 기본 상식쯤은 알아야 한다는 것 또한 내 생각이다.

 

 인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잘 담아낸 책이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이야기들, 친절한 설명과 충분한 사례들. 아이도 어른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세상을 걱정하는 나 같은 사람도 읽어야 하고, 세상이 그런대로 잘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읽어야 할 책이다. 왜냐면 파국이든 종말이든 파라다이스든 인간이 인간이려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그 무언가를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지구 환경에 대한 사랑이 자기반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권에서 출발하니 말이다.

 

안토니오 알타리바라는 스페인 소설가가 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란 작품을 작년 이맘때 읽었다. 만화로 표현된 한 아나키스트의 일생은 한마디로 꽤 강렬했다. 상투적인 영웅의 이야기도 아니었고 정의와 신념을 위해 마지막까지 순교자의 모습으로 살아간 투사의 이미지도 아닌 삶. 역설적이지만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삶을 살아온 한 아나키스트의 인생이 그리 튀지 않는 그림체로 담담히 표현된 책이었다. 곳곳에 번뜩이는 표현력이 돋보이는 장면을 제외하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열정에 불탔던 젊은 시절이 전반기라면 적당한 타협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삶은 후반기다. 자살로 마감된 한 인간의 일대기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섞일 수 없는 두 관념이 한 판 대결과 다름 아니다. 스페인 내란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주인공의 신념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원초적 인간의 삶이라는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난다. 결혼과 육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낸 한 아나키스트의 일생은 고난의 역사였다. 물론 혹자는 그의 삶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대로 의미 있는 삶이라고. 하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쓸쓸함이었다. 폐허에 나뒹구는 빈 깡통을 바라보는 심정. 바로 그랬다.

 

가상의 아나키스트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등의 대화로 엮인 국가 없는 사회라는 제목의 이 책을 읽으면서도 쭉 그랬다. 공허함과 허무함. 융성했던 옛 성터에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고 읊은 “황성옛터”라는 노래가사 마냥 뭔가 쓸쓸함이 느껴졌다. 과연 국가 없는 무정부 사회가 가능 할까? 모든 인간이 자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노동을 즐기며 그들의 소유물을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세상이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치안판사 암부로조에게 소유의 몫을 분배하는 방법에 대해 조르주는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자는 혼자서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에요.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와 서비스를 계속 교환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죠. 그리고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권리와 자기의 권리를 조절해야만 해요. 더구나 기름진 토지, 생산도구의 질, 지리적인 이점, 사회 환경에서 오는 장단점의 차이가 커서 각 노동자나 노동자 집단의 각기 다른 생산성을 [미리]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노동자 개인이 투여한 정확한 노동력을 정하기 어렵고 생산방법이 근대화될수록 더 그렇지요. 따라서 해결책은 각 개인의 권리를 엄격하게 존중하는 것보다 우애적인 동의와 연대에서 찾아야 해요. ------ 본문 61쪽.

 

몇 번을 읽어봐도 해결책은 결국 우애적인 동의와 연대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작금의 인간들에게 우애적인 동의와 연대가 과연 가능할까? 이렇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만 떠올리는 내 자신이 저주스럽지만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꿈속의 이야기로 들린다. 아마 열정을 불태울 시기가 지난 내 나이 탓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에 빠진 작금의 내 머릿속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 누구도 각 개인에게 그 무엇도 강요할 수 없는 그런 사회. 정부 없는, 국가 없는 대중의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공동체의 우애와 연대. 책은 그런 유토피아를 그려내기 위해 절대 다수 민중의 연대를 그 조건으로 제시한다. 말라테스타가 살았던 1920년대 대중들은 그런 연대가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2014년 현대 대중들에게 연대는 책 속에나 존재하는 공허한 단어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도저한 이론으로 가득한 책이지만 능력이 부족하고, 현실에 심하게 타협하는 내 자신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책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 성찰을 통해 뭘 어떻게 행동으로 옮겨야 할지는 각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물론 방향을 잡아주고 이렇게 움직이라는 강령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 내가 책에서 뭔가를 많이 바랐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국가 없는 사회라는 거대한 담론이 일반 시민들에게 크게 와 닿으려면 분명 강렬한 뭔가가 필요하다. 짧은 글재주라 그게 뭔지 정확히 콕 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열정적인 행동가라 하더라도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주인공처럼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위해 프랑코 정권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과연 수학자들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뒤표지에 거창하게 써놓은 수학의 본질, 삶의 철학은 잘 모르겠다. 많은 에세이를 접해보지 못한 내 무식 때문일는지 몰라도 수학자답다는 말 밖에 이 책에 어울리는 총평은 없을 듯싶다. 쉰 네 명의 철학자가 쓴 에세이는 화려한 수사도 없고, 유창한 은유도 없으며, 치밀한 묘사도 극적인 전개도 없다. 수더분한 느낌의 글이다. 그래서 진솔함이 느껴진다. 절제된 언어의 미까지는 아니더라도 필요 없는 단어나 문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1997년 1월, 프랑스 릴의 대학도서관. 이브가 프린스턴에 막 도착한 ‘서스턴 노트’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수백 쪽에 이른 노트를 복하는 중이다. 내가 수학에서 하고 싶은 거은 바로 이거라고 생각한다. 충동적 결정.

 

1978년 6월, 릴 대학교. 한 시간 전에 나의 영웅인 데니스 설리번을 만나 내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데니스에게 들어와 샴페인을 마시라고 권한다. 그는 “고맙습니다만 사양합니다. 저는 수학을 음미하는 게 더 좋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더할 수 없는 기쁨.

 

1979년 4월, 릴 요새. 나는 제자리에서 맴돌고만 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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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6쪽에 실린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의 ‘에티엔 지스’라는 수학자가 쓴 에세이다. 저런 짤막한 글이 무려 스무 꼭지나 연결된다. 연도와 해당 날짜(대부분 월별로 기술)그리고 장소, 상황 설명 마지막으로 두 세 단어로 마무리되는 감정표현. 그중 압권이 이거다.

 

2006년 8월 24일, 마드리드. 1분 뒤에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자로 나선다. 걱정.

 

어떤가? 수학자의 에세이로 어울리지 않은가? 난 책을 읽는 내내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쨌든 문장을 꾸미고, 비틀고, 아름답게 표현한 글과는 다른 색다름이 느껴졌다. 수학 문제를 풀 때나 공식을 증명할 때 불필요한 내용이 수식에 남아 있으면 식이 너저분해진다. 그래서 수식을 언어라고 생각하면 수학으로 이뤄진 언어만큼 간결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도 많지 않다. 그래선지 수학자들의 에세이는 간결하다. 그 간결함에 단호한 열정과 아름다운 절제가 풍겨난다.

 

책 구성도 깔끔하다. 그리 길지 않은 글들과 해당 수학자들의 선명한 흑백사진(상당수 수학자들은 뭔가 낯선 기호들이 가득한 거대한 칠판 앞에서 사진에 찍혔다). 어쩌면 책의 편집 또한 수학자들을 닮았다. 책을 받아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들었던 의문이 있다. 누가 이런 책을 읽을까? 그런데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새롭고 신선한 에세이,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치 수식과 같은 에세이를 경험할 수 있다는 숨은 보물 같은 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쉰 네 명의 저명한 수학자의 아름다운 에세이를 즐기고 싶다면 얼른 책을 펼치기 바란다. 독서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는 이 가을 흥미로운 경험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