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雪景).

 반가웠다. 10년을 훌쩍 넘기고 돌아온 고향. 눈 내린 산은 예전 그대로다. 5층짜리 건물이 최고층의 위세를 떨쳤던 시절은 가고 고향에도 10층 이상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래도 읍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자랑하는 설경은 그대로다. 변치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변치 않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제설차량이 도로의 눈을 순식간에 치워버리다 해도 산을 덮은 눈은 그러지 못하리라. 제아무리 인간이 주인이라는 세상이라지만 고작 인간이기에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듯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고작 인간이기에 몽매한 인간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서슬 퍼랬던 군부독재 시절을 온몸으로 대항했던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설경이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 곱씹어도 변하지 않는 그들의 삶은 그래서 고맙다. 습관처럼 들락거리는 도서관에서 발견한 만화책 한 권이 고맙고 반가웠다. 아니 괴롭기도 했다. “아트 슈필겔만”과 “케테 콜피츠”를 동시에 만난 듯 작가 박건웅의 그림은 어둡고, 무거웠으며 눈이 아닌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함을 지녔다. 분량이 상당했지만 오랜 걸리지 않았다. 편하게 살아왔고, 나름 짐승이 아닌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내게 지독한 고문의 이미지들은 환상처럼 다가왔다.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기까지 한 고문의 프로세스는 그저 현실과 거리가 먼 영화의 한 장면 장면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이렇게 난 인간에서 멀어지는 것인가?

 

 짐승의 시대에는 인간임에도 인간 아닌 짐승의 삶을 강요당한 사람들에겐 현실이 비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짐승의 시대에는 짐승 아닌 인간으로 산 사람들에게도 현실은 비현실이었음이 틀림없다. 도처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부조리를 애써 부정해야 했고, 비참의 광경 앞에서 애써 눈감아야 했으므로. 그렇게 스스로 비현실이란 최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발버둥 쳤으리라. 다만 그 시대가 만든 고통의 바다에 몸을 내던진 소수의 참인간들만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물론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그들의 흔적이 쉬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 그들이 세상에 남긴 건 아름다운 설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 둘러보아도 고맙고 또 고맙다.

 

 표면적으로 우린 눈에 보이는 폭력, 피부로 느끼는 압제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차별과 폭력은 수면 아래서 조용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열사나 투사, 고문으로 죽어가는 인간이 필요 없는 시대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그의 존재가 반갑고 고마운 것일까? 내가 짐승으로 살기 때문이다. 시대가 달라도 난 지금 짐승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떨 칠 수 없다. 자기최면과 비현실감을 잔뜩 품은 채 난 참인간에서 점점 멀어진다.

 

 어쩌면 고향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설경이 나를 잠깐 인간으로 되돌렸는지도 모른다. 책을 보며 잠시 짐승의 시간에서 벗어났듯이 말이다. 삶은 참 고되다. 사람으로 살기 참 힘이 든다. 그대로 고마워할 존재가 고마워할 사람이 있어 조금 위안이 된다. 그 뿐이다. 서글프게도.

 

 관청에서 발행하는 관보, 회사의 이모저모를 실은 사보 혹은 흔한 광고책자. 이런 곳에 실려 있는 글을 읽고 독후감을 쓸 수 있을까?

꽤 오랜 시간 서평을 끼적였던 나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서평이나 독후감은 소위 괜찮은 책을 읽고 쓰는 글쯤으로 생각했는데 내 사고의 편협함에 실망하기 보다는 그런 글에서 좋은 독후감을 뽑아내는 글쓴이의 능력이 부러웠다. 정희진은 좋은 칼럼을 쓰는 사람이다. 신문과 월간지에서 그의 글을 읽을 때 놀라웠다. 뭐랄까? 진한 맛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주제가 아무리 가벼워도 그녀의 손을 타면 무겁고 진지해진다. 진솔함과 솔직함 그리고 사랑이 느껴진다. 왜일까?

 

 세상에 대해 아파하려면 먼저 자신의 아픔을 탐구하고 이해해야한다. 시대는 어딜 보아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이 시대는 아프고 또 아프다. 그 아픔이 무엇인지, 그 아픔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다. 내 속의 나를 찾아 깊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심연에 닿아보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이들에겐 시대의 고통 또한 절대 느낄 수 없다. 그래서 그럴꺼다. 많이 아프고 고통 받아 본 사람들이야 말로 시대의 절박함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아픔을 말로 글로 표현 할 수 있다. 정희진은 아마도 많이 아픈 사람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정희진의 글은 자신의 아픔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 많다. 그래서 다른 글들과 달리 울림이 깊다. 시선이 타인을 향해서만 쏠려 있는 건조함이 없는 글이 있다. 하지만 건조한 글임에도 그녀의 글에서 진한 감정이 녹아있다. 그 감정선은 결코 일시적이지 않다. 오랜 시간 숙성시킨 자신의 아픔과 고통이 글의 대상과 함께 녹아 있다. 글이 감정적으로 치우치면 넋두리가 되거나 졸렬해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자신의 감정을 글 속에 녹인다. 그러니 그녀에게 독후감이나 칼럼의 대상이 되는 글이나 현상들은 가치의 유무가 중요치 않게 된다.

 

 즐겁고 행복한 사건이 극히 드문 시대에는 고통과 아픔에 대한 솔직한 글이 더없이 반갑다. 암울한 시대엔 극도의 외로움과 삶의 공포에 찌든 사람들에게 선생질을 일삼는 글이 넘쳐나기에 더욱 그렇다. 읽은 내용 한 줌을 근거로 이래라 저래라,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어설픈 가르침으로 서평이나 독후감을 쓰면 쉽다. 타인의 공감을 얻기 힘든 글이겠지만 글쓴이의 자기만족은 충분히 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한참 부족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내가 그러하다. 내 존재와 내가 가진 아픔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이토록 부족한데 어떻게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저 상투적인 글귀와 어설픈 수사로 자기만족에 빠진 글을 쓰기가 일쑤다.

 

 더 많이 아파야겠다. 그리고 더 크고 거대한 슬픔을 느껴야겠다. 서평이란 독후감이란 성찰의 결과물임을 정희진을 통해 배운다.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이성만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주관이 배제된 철저한 객관성.

마치 사회과학논문을 읽고 있는 묘한 기분.

  

 차갑고 건조한 영상이나 글은 사물이나 사건을 날 것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깔끔하다. 감정의 격변으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는 일회적인데 반해 이성의 무미건조함은 생각보다 꽤 오래간다. 감정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일상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객관화된 이성의 시선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사건들의 진면목을 차근차근 제대로 들여다 볼 기회를 준다. 일회적인 감정의 불꽃은 쉬 사라져도 객관적 이성의 힘은 오래간다.

 

 <블랙호크다운>이라는 영화는 볼 것이 많은 전쟁영화다. 생사를 넘나들며 겨우 기지로 돌아온 주인공. 그가 본 기지모습은 바깥세상을 처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료들은 평소처럼 운동하며, 뭔가를 먹고 마시며 즐겁게 웃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부분 할리우드 전쟁영화는 영웅이 탄생하고, 그 영웅은 이름에 걸맞게 영웅으로 죽고, 그 영웅의 활약으로 전선의 교착 상태가 해결되고, 적 대공세의 예봉은 꺾인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별 생각 없이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블랙호크다운>은 마지막 부분이 꽤 인상적이다. 감정을 자극하는 전투장면에서 긴장과 흥분의 카타르시스만 느꼈다면 영화는 비슷비슷한 동류의 영화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극한 긴장감은 기지 안의 평화로운 모습에서 충격으로 바뀐다. 그래서 전쟁의 본질이 선명해진다. 내가 겪지 않았다면 모를 진짜 전쟁의 본 모습이 보인다.

 

안전한 기지에서 편하게 생활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우리가 전쟁터를 바라보는 시선과 묘하게 겹친다. 뉴스와 영상으로 소개되는 수많은 분쟁지역과 전투장면은 실제 우리 일이 아니다. 그저 매일 반복되는 세계뉴스의 일부분 일뿐. 통신기기의 발달로 우린 참혹한 영상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어쩌다 전쟁터에서 피어난 휴머니즘에 잠깐 반응하지만 그 지속시간은 매우 짧다. 어쩌다 접하는 대량 학살 또한 사상자의 숫자만 대충 기억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실제 전쟁과 우리 생활과의 객관적 거리를 느끼는 순간 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장이 펼쳐진다.

 

 책은 시종일관 주인공의 덤덤한 시선으로 1차세계대전 참호전투를 그려낸다. 이건 뭐 그냥 객관적인 보고서라고해도 무방할 정도다. 애국심으로 군에 지원하고, 훈련받고 전선으로 향하고, 포격으로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자신도 부상당하고, 전차와 항공기 독가스등 신무기의 대량학살을 경험하고……. 피가 튀는 전쟁터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도 느끼고(그닥 자세하게 서술하지도 않는다), 신무기와 신기술에 대한 찬사도 보낸다.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새로운 기술로 전쟁의 개념이 바뀌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글쓴이의 기대도 보인다. 그렇다. 인간중심의 휴머니티는 거의 없다. 전쟁을 그저 전쟁으로 기술한다. 그래서 지루한 소모전이었던 참호전을 확실히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물자와 사람만 소모되는 건조한 전쟁. 전쟁에 대한 건조한 글. 감정의 동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문장.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전쟁이 무서운 건 인간의 감정을 냉혹할 정도로 이성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다른 인간의 고통에 대해 측은함을 느낀다. 현대전은 상대의 찢겨나가는 육체와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을 눈으로 확인할 필요 없이 버튼만 누르면 된다. 실제 온몸이 갈기갈기 분해되는 타인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더 많이 보는 세상이다.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감정의 자극 때문인지 우린 전쟁의 객관적인 광경에 대해 무지하다. 언론이 중대한 사건을 호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영상은 장점도 있지만 분명 단점도 존재한다. 이미지를 단편적이고, 자극적이며 매우 감정적이다. 반복되면 자극의 강도에 둔감해진다. 그래서 이성적 판단을 그르게 만든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텍스트다. 글은 감정적인 영역을 자극하는 부분에서 영상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배양할 경우 영상보다 한 수 위에 있다. 객관적 서술로 전쟁의 맨얼굴을 볼 수 있었던 흔치 않았던 독서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