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나이로 마흔 한 살이면 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받는다. 마흔 이후엔 2년 걸러 한 번씩 암 검진도 받아야한다. 작년 12월에 미루기만 했던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양성 위궤양이란 결과는 예견했던 터라 별 감흥이 없었지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결과는 조금 의아했다. 겨울이라 좀 높은 거 아닌가 싶은데 경계치에서 조금 높은 수치라며 검진결과지에 위험이라고 빨간 표식을 해 놓은 건 좀 지나쳐보였다. 또 혈관성 치매 위험이 매우 높다는 예측은 왠지 좀 믿음이 안 간다. 혈압도 조금 높게 나왔는데 그게 그리 위험할까? 꽤 오래전 읽은 『질병판매학』(알마)에서 정상 혈압의 범위를 점점 좁히는 전략으로 혈압약 판매를 높인다는 제약업체 이야기를 접한 후 의료계에 대한 의심이 확실히 커지긴 했다.

 

혈압약과 당뇨약는 어머니를 포함해 내가 아는 대부분 어르신들께서 꼬박꼬박 챙겨 드신다. 어머니께선 자신이 먹는 모든 것에 예민하시다. 당뇨에 좋다 나쁘다가 그 판단 기준인데 간혹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 쓰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당뇨에 안 좋은 음식이라도 적당히 먹어도 상관없을 테니 먹고 싶은 만큼 많이는 먹지 말고 조금씩은 먹으라 한다. 사람이 늙고 병에 걸리고 아픈 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 병들은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다양한 진화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아프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어머니께 이야기 했다가 그게 뭔 소리냐며 되레 한소리 듣기도 했다.

 

기생충 교수로 유명한 서민 교수의 책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됐다. 유전과 질병을 통해 진화 의학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기존의 상식을 흔드는 흥미로는 내용이 가득하다. 혈색증은 생명을 단축시킴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흑사병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진화의 아이러니다. 빙하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전자에 각인된 당뇨병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노화와 죽음까지도 다음 세대에 훌륭한 유전자 풀을 전해주기 위한 진화의 신비로운 작용이다. 건강하게 잘 하는 것과 질병에 아파하며 죽는 것은 등가의 가치를 지니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다른 종과 비교해 생존과 자손번식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를 비롯한 각종 병원균과 기생생물들은 인간과 경쟁하며 끊인 없이 생존의 우위를 지켜내기 위해 진화한다. 인간은 질병을 매개로 그들과 끝나지 않을 진화 경쟁이라는 장거리 경주를 쉼 없이 진행한다. 매트 리들리가 『붉은 여왕』(김영사)에서 밝혔듯 정신없이 달려야만 뒤처지지 않고 겨우 제자리를 유지한다던 붉은 여왕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우수한 종으로 진화가 아닌 지금의 상태를 단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린 달리고 또 달려야한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생명 현상의 이면에는 상상하기 힘든 경쟁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기생충은 단순히 인간에게 해로운 생물이 아니듯 질병 또한 인간에게 해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치사율이 높은 병원균은 인간의 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고통 속에서 제대로 된 삶이 완성되듯 아파야만 몸이 더 건강해진다. 역설이지만 진화의 원리가 그렇다. 모든 건 과유불급이다. 과하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좋은 것도 과하면 독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건강에 대한 염려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건강을 생각하는 건 추하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지나치게 갈망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세상의 모든 건 개개인의 판단에 따른 적당한 균형이 중요하다. 아픈 것에 대한, 질병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흥미로운 질병과 진화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되돌아보기 딱 좋은 책이다.  

죽은 사람도 과학이 발전하면 살려낼 수 있다. 국가는 모든 국민을 과학적으로 새로운 인간형으로 개조할 수 있다. 과학의 진보는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수백만 명을 운하공사에 동원해 죽이고, 온갖 누명으로 유능했던 많은 사람들을 고문으로 죽이고,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더 많은 사람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스탈린 치하의 구소련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멸화 위원회』(이레)에서 존 그레이는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인간의 어리석음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제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들 종교와 과학도 분간하지 못하는, 생각 없는 인간들에게 진보란 덜컹거리며 타인과 사회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열차일 뿐이다.

 

상상화 그리기는 내 주 종목이었다. 해저 도시, 지하 도시, 공중에 떠 있는 도시. 내가 그렸던 과학 상상화는 지구 공간을 가로지르며 불가능의 영역이 없다는 과학만능주의의 대표적 표상이었다. 80년대 국민학교에선 종종 애니메이션을 상영했는데 예를 들자면 내용이 이랬다. 투명 돔이 선명한 미래 도시는 해저에서 작물을 직접 생산하는 고도의 농업기술과 넓은 생활공간, 무한정에 가까운 어족 자원, 얼굴을 보며 통화가 가능한 화상전화, 자기부력 자동차가 등장하는 첨단의 해저 메트로폴리탄였다. 주인공 남녀 아이는 과학기술 발전의 열매를 감동에 겨워 맛보며 미래 과학자를 꿈꾼다. 학교 강당에 모여 단체로 관람한 애니였다. 아마 전국 대부분 국민학교에서 상영했을 것이다. 난 과학의 힘과 과학의 유용함 그리고 과학의 매력에 한 치 의심이 없었다. 당연히 당시 내 꿈도 과학자였다. 과학 만세!

 

난 과학자와는 거리가 한참 먼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난 과학의 유용성이나 과학적 진보가 두렵다. 그렇지만 현실에선 과학의 단물을 쪽쪽거린다. 그러고도 변태마냥 과학기술의 발전에 회의적이다. 뭔가 균형이 필요한데 능력이 모자라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좋은 길잡이 책이다.

 

황우석 사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강양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모든 관심과 격려가 피디수첩을 향해 있을 때 홀로 독야청청 자신의 자리에서 저널리즘의 정의를 세운 기자가 강양구다. 줄기세포 사건를 제쳐두고 생각해도 그는 매우 유능하고 뛰어난 과학전문기자다. 그가 쓴 글들을 읽어보시라. 과학에 대해 세상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시선이 열린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그는 좋은 길잡이가 되는 글을 쓸 줄 안다. 야누스의 속성을 지닌 과학에 대한 적당한 균형점을 찾기에도 그의 글이 참 좋다.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과학 관련 책이 별로 없다. 분명 과학은 논쟁의 중심에 서야 한다. 선을 긋고 뭐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판단은 개개인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현재 과학이 어디까지 왔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근 미래에 과학은 무엇을 하게 될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는 게 그쳐선 안 된다. 과학의 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보인다면 그 결과가 우리 실생활과 지구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득과 실의 관점에서 장기전 안목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 과학적 결과물에 관해서 말이다. 책 중간 중간에 편지글 형식으로 수록된 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청소년이 아니라 어른도 읽어봐야 할 책이다. 균형을 위해서 말이다.   

엄마가 싸웠다. 수영장 목욕탕에서. 엄마가 몇 번을 들려줬지만 건성으로 ‘그러면 안 되는 데’라며 흘려보냈던 일 때문에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군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을 다니시는 엄마는 항상 수영장 목욕탕에서 씻고 오신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엄마의 연령대를 생각하면 할머니시다)가 뜨거운 물이 잘 나오는 꼭지를 혼자 독점하신다고 했다. 누군가 그 꼭지 앞에서 씻기라도 할 치라면 ‘그 자리는 내 자리니 냉큼 비키라’고 화를 내신단다. 언젠가 우리 엄마도 그 분께 당하신 듯 분을 참지 못하고 ‘다 같이 이용하는 건데 자기 자리가 어디 있냐’며 그 아주머니를 욕했다. 내 앞에서.

 

며칠 전 수영장 목욕탕에서 먼저 자리를 차지한 엄마가 문제의 수도꼭지 앞에서 씻고 있을 때 늦게 등장한 문제의 그 아주머니와 엄마는 크게 싸웠단다. 언젠가 큰 소리로 싸우면 싸움에서 지는 거란 나의 충고(?)를 충실하게 따른 엄마가 싸움에서 이긴 것 같았다. 함께 씻던 주위의 아주머니들 대부분 엄마를 지지했다는 걸 보면. 공공시설에 사적 소유를 주장하신 그 아주머니는 자신이 빈번하게 이용했다는 물리적 행동이 무의적으로 내 것이라는 심리적 소유권을 스스로 창조하신 듯 했다. 여하튼 엄마는 앞으로 그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그 수도꼭지 자리가 비었으면 당당히 그 자리를 이용할 것이다. 공짜로 얻어지는 열매는 없는 법이다. 말싸움이라는 약간의 폭력 사태를 겪긴 했지만 지켜보고 참기만 했다면 바뀌는 건 없었을 것이다.

 

유신시대 학생이었던 황현산 선생님은 원어로 된 원서를 손에 얻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단다. 워낙 검열이 심했던 시대라 외국에 원서를 신청하고 그 책이 국제 우편으로 서대문 우체국에 도착하면 검열을 담당했던 여직원이 쉽사리 책을 건네주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와 지식에 목말라 있던 청년 학생에게 눈에 뻔히 보이는 책을 손에 넣지 못한다는 건 고통 그 자체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시대가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던 시대였다는 것. 유신이 비상식이었다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또한 비상식적이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 부정의와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면 내면에서 비상식이 상식을 갉아 먹는다. 옳지 않음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내면에 웅크린 진실과 성찰의 인간다움을 지워버린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은 부드럽다. 그러면서 은근히 치명타를 날린다. 글자를 따라 흐뭇하게 읽어 가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 반성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 길지 않은 글에서 긴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그저 합당한 언어와 정직함으로 사유를 표현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소박함이 녹아있는 선생님의 글은 그냥 참 좋다. 살아가는 세상의 일들 중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무심하게 흘려버려 놓쳐버렸던 것들을 다른 시선과 방향으로 되새김 할 수 있어 좋다.

 

당연한 것을 뒤집어 생각해보자. 시대가 그걸 원한다. 당연한 것은 없다. 비상식이 상식을 누르고 부정의가 정의를 대신하는 거꾸로 된 시대. 자동차는 두 바퀴로 가고, 자전거가 네 바퀴고 달린다. 물속으로 비행기가 날고, 하늘에 돛단배가 난다. 복잡하고 아리송하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린 포수에게 잡혀온 잉어마냥 한 숨만 쉬게 될 것이다. 시작은 상식적인 사유에서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와 세상에 정직해야한다. 끊임없이 반성해야한다. 혼자서 어렵다면 선생을 만나면 된다. 밤을 벗 삼아 이 책을 한 번 읽으시라. 짧지만 오래가는 향기로 사람이라면 사람다운 삶을 고민하게 만들어줄테니 말이다. 그렇게 서서히 변하게 된다. 가만있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최소한 책이라도 읽고 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