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뜬구름이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확인하려 해도 곧 사라진다. 어렵다고 하긴 좀 그렇고 딱히 쉽지도 않은 뭐 그런 거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성찰과 반성을 하기 때문이라는 데 결국 그 성찰과 반성은 사랑에서 나온다. 자신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세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런 사랑은 절망에서 더욱 빛을 내고, 좌절에서 더욱 가치가 커진다.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안락함 속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갈등과 대립 그리고 지옥 같은 불행함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사랑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랑을 이야기 한다. 가슴이 아리도록 슬픈 결말이지만 그 본질을 꿰는 진짜 사랑. 먹먹하다 못해 절절히 가슴이 무너진다. 하지만 무너져야만 새로운 것을 쌓을 수 있는 법. 책은 진짜 사랑을 여운으로 남겨준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시가를 물고 코트를 입은 로맹 가리의 흑백사진. 로맹 가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의 소설만큼 그는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조종사로, 외교관으로, 작가로, 영화 제작자로. 사진 속 로맹 가리는 차갑고 쓸쓸해 보이지만 당당하고 고집스런 아우라가 느껴진다. 자살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표현한, 죽음을 통해 삶을 완성한 그가 바로 로맹 가리다. 붉은 색 잠옷을 입고 권총자살을 택한 그를 생각하면 그는 매우 섬세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에서 인간에 대한 섬세함을 느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은 쉽게 간파하기 힘든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글에 녹인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쓴 이 소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통찰을 담고 있다. 어린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사랑은 죽음을 관통하며 읽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아랍인 아이와 유대인 아줌마. 버려진 창녀의 아들과 아우슈비츠 생존자.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풀어나가는 로맹 가리의 언어들. 세상과 이별해 가는 한 여인의 모습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한 아이.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로자 아줌마의 깊은 곳에는 모모에 대한 사랑이 있다. 고통스런 삶을 살았기에 그녀의 마지막을 자신의 힘으로 준비한 모모. 죽은 로자 아줌마 곁에서 3주를 함께 보낸 모모. 썩어가는 육체에 화장을 하고 죽은 로자 곁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한 모모. 돌려 생각해 보면 죽은 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 어떻게 살아가든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개개의 삶이 아무리 쓰레기가 돼 가더라도 인간은 사랑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사람이다. 인간 종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둘러보라. 얼마나 처참하고 참혹한 세상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타협을 일삼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증오하며 살아가는지. 그래도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를 찾는 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 파국을 향하는 이 땅의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

 

죽음을 삶과 등가이다. 죽어가는 자에 대한 예의가 무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좋은 소설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평등하다. 하지만 죽어가는 자들에게 그 과정은 공평하지 않다. 죽음에 대한 평등함, 죽음에 대한 존중이야 말로 사랑의 마지막이다. 각자 자신 앞에 놓인 생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죽음이라는 카테고리를 포함시키자.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고찰 말이다. 모모처럼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자. 그게 바로 사랑이니까.

사내란 모름지기 한 때는 웅크리며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말하자면 풍뎅이…… 알간? 그게 필요할 때가 있는게 인생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살다보믄 거저 맹탕으로 걷어치우는 것보담 낫단다. 버러지가 돼도 좋다는 데까지 가봐야 한다이.

 

김소진의 단편 「원색생물학습도감」에 나온 구절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라 페이지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인용정보는 모른다. 2년 전 사는 게 왜 그렇게 팍팍했는지 김소진의 책에서 저 부분을 발견했을 때 꼭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한 아들에게 힘없고 능력 없이 단지 생명을 연장하듯 살아가던 아버지가 들려주는 충고였다. 아마 2년 전 내 삶이 버러지의 삶이었으리라. 하긴 언제는 버리지가 아닌 적이 있었을까마는.

 

경제적으로 궁핍하면 꼭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 희한하지만 꼭 그렇다. 그럴 때면 능력 없음을 한탄하기보다 살아야 할 이유에 경제적 측면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 나는 싫다. 물론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차피 일은 해야 하지만 내 의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경제적 문제들이 생기면 그 때부터 버러지가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도 그렇고 2년 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랬다.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고, 삶이 돈에 찌들면 항상 먼저 세상을 등진 사람들을 떠올린다. 뭐 그네들을 따라 어찌할 건 아니지만 요절한 작가들의 면면을 살피며 자기위안을 삼는 거다. 변태짓인줄 잘 알지만 편안해지는 걸 어쩌랴. 내 나름 사람의 지혜라면 지혜인걸. 여튼 그래서 자주 떠올리는 인물이 둘 있다. 기형도와 김소진. 어쩌다 김수영까지. 그 중 기형도를 가장 많이 추억하는데 2년 전 우연히 알게 된 김소진도 기형도와 막상막하다. 정말 오래오래 살아 좋은 글 많이 써야 할 사람인데 하늘도 참 무심하다.

 

어느 칼럼에서 김소진에 관한 짤막한 글을 읽은 후 그의 장편 “장석조네 사람들”과 단편집 “자전거 도둑”을 읽고 나자 김소진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동료 작가들이 추억하는 김소진은 참 아까운 사람이었다. 이름처럼 이른 죽음을 예견했듯이 그는 글을 쓰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미래를 고민하기 보다는 오늘 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을 그의 글에서 종종 만날 수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던가? 두 가지 인생을 사는 사람은 두 번 죽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의 삶은 작가이면서 빈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을 아우른 두 개의 길을 걸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가 남긴 글의 생생함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인생을 소진하고 떠나버린 그를 떠올리면 내 삶이 초라해진다. 살아있기에 초라하다는 다른 작가들의 글 마냥.

 

문학에서 김소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고 서둘러 생의 여행을 마쳤다. 그가 죽은 나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난 정체성이 뭔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난 서둘러 생을 마친 그를 추억하며 삶에 대한 세속적인 애착을 끊어 내려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다만 그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좀 더 나은 삶,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고민한다. 버러지처럼 살아도 살아 있는 게 과연 의미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난 버러지가 덜 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해 봐야 그 버러지 같은 것이 뭔지 맛이라도 볼 텐데 아직 난 버러지도 아니다. 그저 버러지이고 싶은 속물일 뿐이다. 그래서 때때로 김소진이 필요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을 정리할 때 눈에 들어온 책자가 있다. 만세력이다. 살아 계실 때 매년 정월이면 올 한 해는 뭘 조심해라 마라 하는 식으로 직접 연락을 주셨다. 믿든 안 믿든 내게 대한 관심의 표현이니 ‘네네 알겠습니다’ 라며 건성으로 대답한 기억이 있다. 이젠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지만 만세력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정이 가끔 느껴질 때가 있다.

 

고등학생 때 사주를 풀이한 책을 구입해 친구들과 후배들 사주 풀이를 해줬다. 수학공식마냥 태어난 연월일시를 대입하면 답이 딱 나오는 그런 책이라 누구든 책을 뒤적이면 사주 풀이가 가능했다. 미래를 알 수 있다는 묘한 매력 때문인지 주변 친구들도 관심이 꽤 있었다. 관상에 관한 책, 주역 책, 점성학 책을 섭렵(?)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제대로 뜻을 이해하며 읽는 것은 절대 아니다. 빨리 결과를 얻기 위해 점을 보는 방법만 읽고 넘어갔다. 그러니 심오한 사주의 원리와 음양오행의 진리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점을 본다는 것에 즐거웠으니. 특히 관상 책은 천여 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꺼움을 자랑했는데 정작 20여 페이지를 본 게 전부였다. 몸 안 기운의 순환과 동양 의학 기초도 모른 채 겉만 핥고 대충 넘어갔다. 그러니 사주명리에 대한 나의 인식은 점이나 보는 비과학적(?)인 것이었다.

 

『열하일기』(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린비)를 통해 고미숙을 처음 접했다. 해박한 지식과 엄청난 독서량과 공부량을 자랑하는 사람답게 책은 매우 뛰어났다. 흥겹고 즐겁게 박지원을 길잡이 삼아 청나라를 여행한 좋은 책이다. 이후 고미숙은 많은 공부를 즐겁게 하는 사람, 동양과 서양의 가로지는 노마드 지식인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세월호와 관련된 책을 읽던 중 고미숙의 글을 발견했는데 그 글 속에서 사주명리를 발견한 건 한 달 남짓이다. 사주명리로 세상을 풀어 놓은 그녀의 글에서 순간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고 지체 없이 책을 주문했다. 물론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 사주명리의 원리를 알고 싶기에 말이다.

 

책은 한자 가득한 음양오행과 천간지지 내용이 아니다. 글쓴이의 해박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다양한 텍스트가 포함돼 있다. 문학, 인문, 예술에 관한 글과 이슈가 되는 사회 현상,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현재 우리나라의 수많은 병폐들이 전통의 음양론과 어우러져 읽기에 흥미로움을 자극한다. 현대 개개인의 사회구조적 문제와 내부의 정체성이 겪는 혼란을 전통의 음양오행의 원리에 입각해 진단하고 처방하는 부분이 특히 재밌고 유익하다. 단순히 나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 나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서양식 이분법은 쉽고 간단하지만 빈약하다. 복잡다단한 인간들의 삶과 세상의 이치는 칼로 베어내듯 단순 명료하지 않다. 천지의 기운과 시간과 장소의 복합적인 의미를 해석해야만 본질이 선명해진다. 책은 동양의 음양오행설의 작동원리가 비과학이라는 서양식 사고방식이 만든 편견을 버리라한다. 하긴 맞는 말이다. 근대 서구의 사상적 도구들이 현대에 얼마나 쪼그라들었는가? 그에 비하면 천 년 이상을 이어온 동양의 음양오행은 급하게 변하는 현실을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돼 준다.

 

책을 읽으며 한자 공부의 유혹에 빠졌다. 그래서 『갑자서당』(북드라망)을 찾아냈다. 뭐 어차피 책 속에 여러 번 언급되어 굳이 마음먹고 찾진 않았지만 말이다. 창공의 별이 길을 밝혀주던 시대를 논하던 서양의 한 평론가가 생각난다. 내 창공의 별을 찾기 위해 난 한자공부와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기 마음먹었다. 의지가 닿는 한 나와 세상을 음양오행의 원리로 이해할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