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란 참 무서운 거다. 감정이 이성보다, 육체가 정신보다 강한다는 건 살면서 매순간 느낀다. 마찬가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일본어의 흔적과 한자어, 영어식 표현이 글이나 말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야신이라 불리는 김성근감독의 다큐를 보면 몸에 밴 나쁜 습관을 고치기란 무척 힘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재기에 성공하기 위해 야구계에서 낙오됐던 선수들의 악전고투는 습관의 무서움을 눈으로 잘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다. 말과 글의 습관도 이와 다르지 않다. 평소 사용하는 문장, 어휘, 단어들이 외래어에 오염된 것이라면 이를 한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뉴스나 신문, 칼럼에 표현되는 말과 글 또한 심각한 경우가 많다. 무분별한 한자어와 영어, 일본식 표현들이 넘치는 건 미디어 매체와 출판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모국어처럼 사용하던 외래어를 쉽게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문화와 마찬가지로 언어 또한 다른 언어군과 섞이고 교배되면서 풍성해진다는 것에 동의하는 한 사람으로서 무자비(?)한 우리말 사용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말 쓰기가 폭력이란 뜻은 아니다. 선생님의 주장은 충분히 깊이 생각해야할 가치가 있다. 특히 좋은 우리말로 대신할 수 있는 일본식 표현을 바꿔야 한다는 선생님의 의지는 실현돼야 한다.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말이다.

 

평소 글을 쓸 때 적당한 단어나 어휘를 고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어쩌다 이오덕 선생님이 떠오르면 고민의 강도는 두 배가 된다. 적당함에서 그치지 않고 딱 맞는 우리말에 대한 고민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뭐 항상 대충 끄적거리는 수준에서 끝나버리지만 그래도 조금은 글이 풍성해진다. 물론 한참 멀었다는 느낌을 떨칠 순 없지만.

 

이오덕 선생님의 책(『우리말 바로 쓰기』/한길사)은 생각날 때 펼쳐본다. 우리말 바로 쓰기 다섯 권을 정독한 적은 없다. 심심풀이로 꺼내 읽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냥 생각날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는다면 글을 쓰거나 읽을 때 반드시 떠오른다. ‘이렇게 쓰면 안 되는데’, ‘여기에 맞는 우리말 표현이 있는데’라는 생각. 모든 일상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다양성과 사회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풍성한 언어야 말로 사고와 관념의 성숙을 낳고 그런 지식과 성찰이 많아져야 짐승과 다른 인간만의 품격을 성장시킨다고 본다.

 

요즘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들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만화책(『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인데 무척 좋은 책이다. 서양의 다양한 문물, 특히 인문사회학의 개념을 한자어로 해석한 사람들은 메이지 시대 일본학자들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각종 학문분야의 수많은 한자어들은 일본에서 가공된 것들이다. 우린 그 단어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 한자어들을 대신할 우리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무작정, 무조건 모든 분야에서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100년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문화와 사회적 토양을 갈아엎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아름답고 뜻이 정확하게 통하는 우리말이 있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한자어와 외래어에 대한 시각을 넓히는 것이 좋다고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말은 다른 언어들과 많은 교배 과정을 겪을 것이고 좋은 우리말의 전통을 살리며 외래어의 장점을 받아들인다면 문화와 언어의 풍성함을 얻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아지는 것도 풍성함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아니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학교 사회시간에 들었던 빠르게 변하는 세계니 어쩌니 하는 말이 한낱 헛소리로 들렸다. 산골에서 나고 자란 탓일 수도 있지만 변화를 두려워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한 몫 했다. 집과 고향이 아닌 곳은 어디든 낯설고 무서웠으니 말이다. 뭐 그때는 그랬다. 그러다 삶의 길이 평탄치 않을 때, 순간 세상이 정신없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세상이 이런 곳이구나. 내가 평소 생각한 세상과 다르구나.

 

세상의 변화가 학교에서 배운 것 마냥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나이가 듦과 비례했다. 과학이든 경제든 발전과 혁신을 통해 내 몸이 편해지는 만큼 희생되는 뭔가가 존재하는 구나. 그리고 인간 문명의 변화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를 만드는구나. 그렇게 변화라는 현실이 지극히 부정적인 관념으로 다가왔을 때, 정확히 진보의 개념이 어쩌면 무서운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고민하는 힘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게 된다면 인간 사회는 아주 쉽게 야만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대부분 사람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한다. 신체가 정신보다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첨단기기는 혁명적으로 출시되지만 사용하는 사람들의 몸은 혁명적이지 못하다. 보수적인 몸 돌림과 정신 상태로 혁명적인 기기를 만지작거린다. 탈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세계경제의 거대한 변화, 다양성과 상대성의 가치가 재조명되는 인식의 혁명이 가열차게 진행되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우리 몸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정신은 각종 차별과 획일성으로 전 지구적 변화에 눈감고 있다. 책에서 언급한 ‘마음은 거북이’란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다. 물질적 풍요는 신체만 변화시켰다. 정신이 풍요하길 거부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따윈 안중에 없다. 그저 현실의 안락함만 지속될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돼있으니 말이다. 생각과 고민은 검색사이트가 대신하고, 소통과 이해는 스마트폰이 대신한다. 혁명적인 변화에 적응하는 길은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뿐이다. 함께의 의미는 이미 저 멀리 사라졌고, 그 자리엔 나만, 나 혼자만이 대신한다.

 

이해라는 단어가 요즘처럼 공허하게 느껴진 적은 없다. 이해를 바라는 사람은 천지에 깔렸지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회란 구성원들의 이해를 거름으로 삼아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이해가 사라진 시대다. 그러니 지금 사회는 큰 축에서 붕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학교 교육에서 사회나 윤리과목은 시험과목일 뿐 이해하는 법과 소통하는 법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법을 배우기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경제의 논리 접근하는 인문학은 얼마나 추한가. 마찬가지로 시험의 논리에 좌우되는 역사, 문화, 사회는 또 얼마나 천박한가 말이다. 그 천박함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파시킨다. 마음만 거북이인 레드메이드 인간을 양산할 뿐이다. 이것도 변화의 일부분이라면 나는 변화를 거부한다. 다양성의 말살은 결국은 파멸이다.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 다가올 미래의 파국을 지혜롭게 해결해야 할 능력. 이런 능력을 배우는 것이 사회과목의 가치이자 인문학의 목표라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변화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세상과 교감하며 발전과 진보의 그림자를 지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문학의 창으로 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아이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피와 눈물. 대형마트에 들어설 때 종종 떠오르는 단어다. 고통 속에서 도축됐을 붉은 색 고기들.가혹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으로 만든 값싼 가공품. 끝없이 진열된 일회용 기저귀에서 무참히 잘려 나간 나무들의 고통을 느끼며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해될 때 살아감의 역설이 내겐 큰 고통이 된다. 인간의 윤택한 삶이 회복불가능의 지구생태계와 등가관계를 이룬다는 주장에 여전히 공감한다. 공감의 크기가 커질수록 내 삶의 의미와 가치는 쪼그라든다. 행동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내 삶은 질척이는 현실의 가면 뒤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저 삶이 관성의 법칙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내 삶이 변태짓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나도 어찌할지 모르겠는 걸 말이다. 슬프지만 내가 그렇다.

 

“그저 슬픈 영화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의 마음에 조용히 노크를 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작가의 말에 큰 위안을 받으며 책을 읽었다. 그냥 책을 읽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잔혹한 행위가 정당화 되지 않겠지만 위로가 필요한 나에겐 정당화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사는 삶이 싫었기에, 행동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기에 우선 더 알아야한다는 속편한 타협에 일차적인 고민을 봉합해 버렸다. 슬프게도 말이다.

 

슬픈 영화를 보면 난 쉽게 울지 않는다. 난 죽음 같은 삶, 삶 같은 죽음을 살아내는 생명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 책을 보며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울컥함을 여러 번 느꼈다. 살아있는 너구리 가죽을 벗기며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자, 동족에게 총질을 하며 다이아몬드 같은 영원한 미래를 품은 자, 자국의 이익만 꿈꾸며 치킨 게임으로 전락한 저개발 국가 사이의 커피 농업. 나는 그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인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인간. 그게 슬펐다. 맞다. 내 모습과 그들의 모습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 슬펐다.

 

앞으로 공정무역을 통해 수입된 커피만 마시겠다. 절대 살아있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겠다(살면서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다). 다이아몬드 보기를 돌같이 하겠다(어차피 다이아몬드는 평생 구경하지 못할 팔자지만 말이다). 겉멋에 빠져 와인을 고르지 않겠다(이런적이 있었기에 매우 부끄러웠다). 아마 몇 년 전 이 책이 출판됐고 내가 서평을 썼으면 이런 내용들로 채웠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래본들 그다지 바뀌지 않는 것이 현실임을 깨닫게 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흔하디흔한 말이지만 경제체제 전반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밖에 없다. 말만 쉽지 결코 실현하기 쉽지 않는 과제지만 말이다. 책은 충분히 자극을 준다. 좋은 책이고 좋은 그림이 가득하다. 머리와 가슴에 박히는 이미지도 많다. 이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좋은 책을 읽고 지금 난 서평대신 넋두리를 쓰고 있다. 인정한다.넋두리라도 쓰게 만들었으니 이 책은 좋은 책임이 분명하다.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까? 난 뭘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으니 그게 또 난 슬프다.

 

결론은 타협이다. 조금 더 건조하고 가난하고 날씬한 삶으로 향해야겠다. 덜 쓰고, 덜 먹고, 덜 사용해야지. 삶의 매 순간을 더욱 감사해야지. 아프지 않고 오래 살기를 바라지 말고 명민한 정신으로 제대로 살기 바라야지. 변태 같은 삶이지만 그래서 슬프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고민하고 살아야지. 달콤한 제국의 달콤함 보단 불쾌한 진실의 불쾌함을 내꺼라 생각하고 살아야지.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내린 타협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