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멀어가는 남자, 말을 잃어가고 있는 여자.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간다. 천천히 진행되는 병 때문에 눈이 멀어가는 남자. 빛을 잃어가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눈멂이 아니다. 하지만 말을 잃어가는 여자는 스스로 말을 잃어간다. 눈으로 보지 못하기에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각들이 있다고 한다. 혹은 말을 못하기에 발달되는 다른 감각기관이 있다고 한다. 남자에게 그 새로운 감각은 관념적인 과거의 재구성이며 이는 그가 전공한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많은 관념들을 머릿속에서 새롭게 탄생시킨다. 과거라는 재료를 통해. 여자는 말의 공포와 언어의 잔인함에 스스로 말문을 닫아간다. 언어에 대한 예민함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캐릭터다. 언어를 말하고, 언어로 뭔가를 쓰는 사람들을-지금의 나를 포함해-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말에 대한 깊은 사유가 그녀의 심연에 새겨져 있다. 말과 언어에 대한 적당한 그리고 쉬운 접근이 무색할 정도다.

 

희랍어는 알파벳을 띄어쓰기 없이 쓴 것처럼, 문장으로 보이지 않고 길고 긴 한 단어처럼 보이는 글자들의 조합이다. 많지 않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희랍어는 마치 암호 같다. 그 암호 같은 문장에 희랍어 문법을 적용하면 의문문도 되고, 평서문도 된다. 또 같은 문장이 다른 의미를 지닐 때가 많다. 그만큼 희랍어는 어렵지만 다채로운 변화를 내포한다. 과거 희랍 사람들은 언어만큼 절대적인 규칙 아래 다양한 사고와 은유를 만끽했으리라. 획일화와 효율성의 기반으로 물질적 풍요를 연 자본주의 사회는 쉽고 편리해야 한다는 편안함에 물들어 있다. 희랍어가 복잡한 이유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고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현대 언어가 과거에 비해 문법이나 어법이 쉬워진 이유는 그만큼 사고의 폭이 좁고, 깊이가 얕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눈이 멀어가는 남자가 선택한 희랍어는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희랍어를 통해 복잡한 관념을 두뇌로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언어. 그것이 남자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싶다.

 

여자는 언어와 말에서 도피했다. 이혼에 이은 양육권의 박탈은 가득이나 위태롭던 그녀의 삶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는 점점 더 말을 잃어가고 삶은 극단의 단조로움으로 흘러간다. 타인의 언어와 말이 그녀에게는 고통이다. 그녀가 희랍어를 배우는 이유는 무얼까? 가장 단순한 자음모음만으로 문장이 구성되는 언어, 즉 희랍어의 단순성에서 폭넓은 의미의 사유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를 극단으로 내몰았던 것이 언어라면 그녀의 탈출구 또한 언어였을 것이다. 암호 같은 언어, 비유가 풍성한 언어, 남들은 이해조차 불가능한 그녀만의 언어세계와 희랍어는 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래서 그녀는 침묵 아래 희랍어 수업을 듣고, 나름의 방식으로 희랍어를 이해하고, 희랍어와 우리 언어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자신의 새로운 말을 익히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절제된 언어와 표현이 눈이 부시다. 소설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어느 문장에서는 한참을 멍하니 나를 생각하게 하고, 어느 문장에서는 삶과 죽음의 은유를 느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강사와 수강생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각각의 독백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우연한 사건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는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어둠의 공간에서 눈이 먼 남자의 끊임없는 대사와 여자의 침묵. 손바닥에 쓰는 짧은 손 글씨. 절제된 문장과 선명한 단어가 들려주는 침묵속의 완전한 이해. 짧지만 강렬한 느낌을 주는 문장으로 수사와 꾸밈이 전혀 없는 두 남녀 아니 두 인간의 만남을 그려낸다.

 

꼭 읽어보길 권한다. 쉽게 읽히지만 결코 여운이 짧지 않다. 글이라는 것이 문장이라는 것이 단어라는 것이 신비롭다. 작가가 경이롭다..

자아(自我)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자의식(自意識)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현대인은 왜 이토록 자아로 인해 고통 받는 삶을 살아가게 된 건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가 그 시작인가? 아니면 18세기 유럽을 풍미한 계몽주의가 그 시작인가? 유구한 세계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시공간으로 좁혀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자의식과 자아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아마 일제강점기 때 시작된 것이라는 접근이 타당하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을 테지만 일본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무시할 없는 수준이다. 일본이 없었다면 동아시아의 현재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임도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은 세계사에서 유래 없는 서구화 모델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비서구 국가이다. 소란한 혁명의 시기도 거치지 않고 산업 발달과 입헌 군주제를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다. 그 과정에서 서양의 다양한 학문과 기술을 한자문화권에 접목시킨 대단한 나라다. 우리의 학문구조와 그 깊이는 일본의 덕을 본 부분이 많다. 이야기가 많이 다른 곳으로 벗어났다.

 

메이지 유신이 지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은 일본은 사회적으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일본 지식인에게 파종된 서구 사상은 마침내 제대로 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받아들인 서구 사상은 대부분 초기 일본을 거쳐 유입됐다는 사실에서 당시 일본 지식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에서 우리나라 지식인의 자아의 성립과 그 전개 과정을 유비추리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만화 이상의 수준 높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은 그 답을 찾기 무척 힘들고 어렵다. 어쩌면 답을 찾는 과정이 인생일는지 모른다. 고대와 중세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계급에 의해 삶이 결정되고, 대부분 당시 사람들의 일생은 정해진 루틴의 반복이었다. 결코 나에 대해 자아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소수 지식인들이 자아에 대한 탐구를 부지런히 이어갔지만 사회전반과 비교한다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가동은 인간에 대한 기존 상식과 통념을 뿌리 채 흔드는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 인간 개개인의 삶의 소중함, 또는 개인주의적 성향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행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아래 그 가치가 폄하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제 막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고민해야 하는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세상을 전쟁과 폭력으로 물들이는 국가주의 권력에 무참히 희생당하며 개인이라는 삶의 최소단위가 얼마나 허약한지 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순수한 이성과 낭만을 꿈꾸는 자아의 로맨스는 당장 먹고 입고 살아야할 현실의 경제적인 문제들로 붕괴되었다. 인간 고유의 자아와 자의식이 잠식당하는 삶에서 그들은 머지않은 인간문명의 파국을 예견했다.

 

모두 다섯 권으로 출판된 이 책은 나스메 소세키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메이지 시대 지식인의 삶을 조명한다. 픽션과 논픽션을 적당히 버무려 읽는 사람의 흥미를 꾸준히 유지시키는 스토리텔링의 힘과 정밀한 당시 일본 풍경을 묘사한 작가와 만화가의 장인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작품에서 과거의 유산으로 표현되는 언표가 도련님이다. 당시 지식인, 더 자세히 말하면 낭만적인 계몽주의에 빠져 도탄에 잠긴 인민대중을 위해 목숨을 던져야 했던 도련님들은 자의식과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혹독한 내적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 무언가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으로 사람으로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개인의 영달을 포기하고 대의를 위해 죽어간 의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내 속의 자아와 나 자신과의 쉼 없는 싸움의 이유를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진 도련님들을 통해 내 삶의 초라함도 느꼈다. 눈물겹도록 아프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반목하며 참인간의 길을 닦으려 노력했던 메이지 시대의 도련님들은 내 삶의 방향성을 일러준 스승이 되었다. 용기가 없어 목숨을 던져 세상을 구하진 못해도 삶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성찰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야 말로 그네들이 내게 알려준 참 인간의 길이다. 이웃 조선의 합병을 진심으로 슬퍼한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단카를 읽으며 지식인의 길이 어느 방향인지 찾을 수 있었다.

밥벌이가 밥벌이인 만큼 “대학이 무슨 소용일까?” 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 편이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는 말이 입에 붙어 버린 지 오래지만 여전히 대학에 대한 효용을 이야기 하라면 말문이 막힌다. 구조적인 문제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사회 시스템의 일부다. 결국은 신자유주의 경제제도가 만든 암울한 현실이다. 뭐 이런 식으로 관념적인 이야기로 썰을 풀기는 쉽다. 사회가 혁명수준의 변화를 겪지 않는 한 대학중심의 고등교육과정은 앞으로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고, 입시는 모든 청소년들의 가장 큰 화두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관념이 아닌 현실을 꿰뚫어 보면 머리로 생각만 하는 것 보다 훨씬 문제는 복잡해진다.

 

우연히 읽게 된 책이다. 솔직한 자기 고백이라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이다. 신문이나 보도 자료를 통해 느꼈던 지방대 강사의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이었다. 대학사회란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거세되어야만 버틸 수 있는 폐쇄적인 구조임을 확인했다. 인문학의 위기는 다른 무엇보다 지식의 탐구라는 본연에서 벗어난 대학이 기업보다 더 심하게 기업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짐을 알았다. 점점 늘어나는 박사급 인재들의 공급 과잉은 결국 착취의 기저를 이루고, 매년 과잉으로 인한 시간 강사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경제적 논리로 어쩌면 당연하다. 일할 사람은 많고, 자리는 적고.

 

고등학생들이 질문하는 대학의 효용성은 결국 그들의 안락한 미래와 연결된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안정적인 직장으로 연착륙이 가능할까란 질문에 난 아니요 라고 말하다. 대학 진학은 선택의 문제라고. 하지만 대학은 가고 못 가고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데 상당히 중요한 필요조건이라고 덧붙인다. 효용을 떠나 대학졸업장이라는 종잇조각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나이가 들면 알게 된다고. 문제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대학교육이 유지되고, 극소수의 졸업생만이 안정적인 사회진출이 보장되는 사회 시스템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사회 시스템이 쉽게 바뀔 낌새는 전혀 없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공고해진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난 허망하게 대답한다. 책 많이 읽고 생각을 깊게 하면서 세상을 읽는 능력을 키운 후 사회변혁에 참여하라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대답이지만 내가 내린 최선의 결론이다.

 

시간 강사의 에세이에서 난 대학을 고민하는 고등학생들이 겹쳐졌다. 능력이 뛰어난 시간 강사도 결국에 수많은 잡무로 좋은 강의를 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후 대학의 효용성은 점점 작아졌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야 하고, 대학원 졸업은 대출 없이 불가능한 가난한 시간 강사의 이야기는 대학에 가봐야 별 볼일 없을 아이들의 미래 이야기와 맥락이 비슷할 것 같다. 열정과 의지만으로 쉽게 적응할 수 없는 이 시대는 목표도 없는 열정과 의지를 강요한다. 그 결과는 기성세대가 만든 개미지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글쓴이의 강사로써의 삶이 안쓰럽고 안타깝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살아가야하니까. 그럼에도 연구와 강의는 해야 하니까. 글쓴이는 아직 행복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니까. 그래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이다.

 

나는 결코 쉽게 나아지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희망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무책임함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책이 지방대 시간 강사에 관한 이야기라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정교한 계급이 존재하는 대학 구성원의 구조와 다르지 않은 시스템으로 작동된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기 보다는 안정을 위해 꿈을 접어야 하고, 개인의 재능을 키우기 보다는 인내심으로 학업과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도처에 불평등이 산재하고 이를 알면서 눈감아야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다. 누구든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심하게 불편하고 부끄러운 일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을 생각은 없다. 어쩌면 그 의미 없는 희망, 불가능한 꿈이 있어 인간 존재가 의미를 지닐 수도 있으니까. 당당하게 지방대 시간 강사임을 밝히고, 마치 내부고발자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글쓴이의 용기에서 희망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