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글을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살아가라 어쩌라 훈계했는데 돌아온 답변이 나더러 글은 쓰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별 감흥 없이 쓰고 있지 않다고 말한 뒤 그날 밤 “글을 쓰고 있어요?”라는 소리가 울려 잠을 설쳤다. 다음 날부터 글을 쓰고 있는데 이건 글이 아니라 그저 감정의 오물이다. 단어는 딱딱하게 굳어 있고 문장은 하늘을 날아다닐 정도로 가벼웠다. 전날 글을 다음날 퇴고하면 낯이 뜨거워진다. 퇴고한 글을 그 다음날 고쳐보지만 뜨거워지는 건 마찬가지다. 글이란 것이 이렇게 어렵다. 하물며 시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많지 않지만 내가 읽어본 정호승 시인의 시는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절망속의 희망이라고 할까. 그런 상투적인 소재를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시로 뽑아내는 시인의 능력이 감탄스러웠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시. 그래서 사람들에게 편안한 감동을 주는 시인. 하지만 이번 시집은 달랐다.

 

아름답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인은 절망과 부조리 또한 참혹한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희망을 거절한다는 단호함이 제목인 이번 시집은 불편함 그 자체다. 아름다울 수 없는 인간의 생(生), 다른 존재의 희생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 부조리와 부조리가 만나 거대한 절망의 시대를 만들어 내는 이 참혹한 현실. 시인은 이 시대의 절망을 노래한다. 그 절망에 대한 노래 덕분에 다시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난 절망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절망이 의미 있는 건 희망의 필요조건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상은 희망과 절망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곳이다. 밝음이 있으면 그만큼의 어두움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소금이 있으면 설탕이 있다.(시인 이승원의 시집 『어둠과 설탕』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왜곡된 이미지를 팔고 소비하는 미디어자본주의는 희망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절망은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그래서 마땅히 우린 행복해질 수 있다는 교묘한 서사. 우리는 절망하면 안 된다는 강요를 받으며 산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현대를 사는 인간 존재라면 어떻게 희망만을 이야기 하며 살 수 있겠는가?

 

오늘도 내가 걸어온 길가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나와 함께 걸어온

핏물이 고인 발자국 하나

-본문 106쪽 「발자국」 중에서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때 아닌 5월의 대선이 다가온다. 항모가 한반도 주변에 떠다닌다. 도대체 어디에 희망이 있다는 건가. 절망할 때 절망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삶이다. 생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고 희망만 이야기하는 삶은 위험하다. 내가 다른 존재의 희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부조리를 고민하지 않는 한 우린 희망을 쉽게 말해선 안 된다. 절망의 할 일을 희망으로 덮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바닥을 쳐야 올라갈 곳이 어딘 보이니 말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아직 덜 고민하고, 아직 덜 절망했기 때문이다. 바닥이 아니라는 증거다. 아니 감히 희망을 함부로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시인의 표현대로 희망을 거절한다

정호승, 희망, 절망

그림(회화)을 본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갖는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일이 잦은 현대인의 눈에 그림의 일차적인 시각자극은 잠시 머물다 가버린다. 작품의 2차, 3차 자극이라 할 수 있는 회화의 본질 혹은 심연의 모습은 연습이 없다면 간과하여 지나가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 부단히 노력했다. ‘부단히’라는 단어가 조금 멋쩍지만 없는 살림에 허영이며, 사치처럼 보이는 일들을 감행했던 적이 종종 있다. 촌놈이 서울이며 도쿄며 보고 싶은 그림이 있으면 보험을 깨서라도 다녀왔다. 그래봤자 한 두 번이지만. 순간순간을 고려하면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몇 년 동안의 사치는 감히 말하건대 회화의 심연을 잠깐 볼 수 있는 수준이라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 심연과 본질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라고 하면 못한다. 자화자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핵심은 그런 내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황색 얼굴의 서양인이었다.

 

예술이니 회화니 내가 논하는 이론이나 관념은 지극히 서양에 기울어져 있다. 이 책을 읽고 심각성을 크게 깨달았다. 모네와 마네를 이야기하며 인상과 낭만을 내뱉는 내 모습은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 마냥 고매한 귀족인척 하며 살아가는 하인일 뿐이다. 오랜 전통이나 우리의 것이라면 무조건 멀리하려는 거짓 진보의 관성 탓에 나는 이 땅이 품어낸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다.

 

책 속의 풍부한 우리의 그림, 우리의 회화 가운데 나는 태백을 이야기 하고 싶다. 다른 화가와 다른 작품의 고향을 읽고 싶다면 사서 읽으시라. 아주 좋은 책이니까. 여하튼 태백은 내 유년의 고향이다. 검은 세상, 그 검은 세상이 내 인식을 지배했었다. 두 번째 고향이 청정자연의 강원도 정선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검은 선탄장과 검은 길, 검은 사택촌의 기억은 심연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검은 형체와 검은 관념들이 회화로 그려지고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태백을 고향으로 둔 책 속의 작품들(황재형작가의 작품들)은 내게 충격이었다.

 

석탄은 검지만 석탄과 함께 채굴되는 황 성분은 노란 빛이다. 작품 “화전삼거리”는 내 유년의 태백이었다. 그곳은 검지만 노란 빛이 도는 신비와 매혹의 도시이기도 했다. 완전한 노동의 표본인 광부와 산업화의 상징 검은 석탄. 인간은 그 검은 도시와 지독한 노동 속에서 희망과 행복을 꿈꿨다. 민중의 삶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태백 그곳은 검은 절망과 노란 희망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내다니. 서양화가를 찾아다닌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탄광이 사라진 그곳은 가진 것 없는 자가 노동을 통해 미래를 꿈꾸는 대신 탐욕스런 자들이 행운에 기대어 대박을 꿈꾸는 곳이 돼버렸다. 사람이 바뀌고 장소가 바뀌어도 태백은 여전히 절망과 희망의 공간이다. 그 절망과 희망이 검정과 노랑으로 겹겹이 표현된 “화전삼거리”는 그래서 깊은 울림으로 다가 왔다. 회화가 주는 2차, 3차의 자극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보고 읽고 느끼는 일에 더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한쪽에 치우친 꼴값도 여기까지다. 책을 쓴 글쓴이의 다식함과 변화무쌍한 표현이 배 아프다.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다. 아직 멀었다. 보는 것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더 연습해야겠다. 뭔가 부족하고 어색하지만 더 쓰려고 해도 능력 밖이다. 좋은 책 그냥 읽어보시라.

 

인공지능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책의 효용을 고민하기 시작한 계기가 떠올랐습니다. 스마트폰이 필수인 시대에 책이란 어떤 의미인가로 시작된 최초의 고민이었죠. 책을 읽는다는 것이 중요하긴 한데 어떻게 그 중요함을 명쾌하게 설명할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상투적으로 이야기 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지식이 아닌 성찰을 얻기 위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책이 도움이 될까 펼쳐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책이란 개인의 지적 성숙이라는 도구적 측면이 아닌 인류 생존과 직결됨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 한 인공지능 책에서 말입니다.

 

지나친 비약일 수 있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린 멸망할겁니다. 가까운 미래,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기술이 사회 각 분야에 적용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실업자가 됩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통해 만들어지는 부를 독점하겠지요. 아마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겁니다. 다음단계에서 많은 부를 독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놀고먹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이든 폭동이든 사회가 혼란해질 테니 말입니다. 자 그럼 먹고 살만큼 소득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제가 읽은 책에서는 자극적인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제공될 것이라 예측하더군요. 무척 일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쾌락에 물들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통찰 따위는 완전히 사라진 껍데기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망하겠죠. 과거 로마의 멸망에서 역사적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으면 망합니다. 인공지능을 지배하려면 인공지능보다 우수한 인간 본연의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그 능력은 책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쓸데없이 딴소리가 길었습니다. 이 책은 소중한 책입니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제 멋대로 책을 읽지 못합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죠. 그저 인터넷 서점의 정보나, 미디어가 쏟아내는 베스트셀러 목록 혹은 사은품을 보고 책을 구입합니다. 물론 그런 과정이 쌓이면 자신만의 안목이 만들어지겠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책을 위한 책은 개인의 독창적인 책읽기를 위한 좋은 선생님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등진 최성일님이 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이란 좋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나란 인간의 책읽기 지도가 된 책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자신만의 취향이 생깁니다. 바로 그 취향이 자리 잡기 위해 선생님 같은 책이 필요하겠지요. 이 책은 그 선생님 같은 책입니다. 게다가 소설을 잘 읽어내지 못하는 제겐 새로운 선생님이 생긴 셈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책입니다.

 

단순히 좋은 책을 소개하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서평을 모아놓은 책이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 책 속의 글에는 글쓴이가 녹아있습니다. 의미 있는 글을 쓰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글쓴이의 모든 것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글을 써야 하는 철학적 고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삶의 자세, 좋은 작가들에게 배울 수 있었던 깊은 경험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게다가 책 후반부는 죽음과 삶, 사랑과 연애, 고독과 방황 그리고 여성과 사회 등 사회전반을 관통하는 글쓴이의 깊은 지적 체험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책 한 권으로 좋은 책에 대한 이야기와 좋은 작가, 현대사회의 통찰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좋은 선생님 같은 책입니다.

 

어렵지 않고 쉬운 문체로 결코 진부하지 않은 신선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글쓴이의 노력에 존경을 표합니다. 모쪼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좋은 독서를 위한 선생님으로 삶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멸망을 피할 수 있습니다. 책은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에세이, 독서, 책, 작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