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책은 라디오 방송을 위한 글이라는 점을 일러둔다. 책 두께에 연연하지 말고 목차에서 마음에 드는 한시를 찾아 읽으면 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연결되는 내용이 아니니 부담은 가질 필요가 없다. 한시라면 한자가 떠오르고 어렵다는 단어가 떠오른다면 지워버리시라. 책은 재밌으니까.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잔잔히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주는 책이다. 편한 마음과 커피 한잔과 조용한 음악이 있으면 더 좋겠다. 중국 유명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를 즐겨보실 수 있다. 한자는 잊어도 된다.

 

한시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아마 김용찬 교수님의 책 때문일게다. 시조와 가사에 관한 교수님 책 덕분에 고전시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책을 뒤적이는 내내 황진이의 시조가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황진이의 시조 중 “동짓달......”로 시작되는 작품은 언제 읽어도 절창이다. 동짓달 긴 밤을 서리서리 넣었다가 굽이굽이 펼친다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 분위기와 배경까지도 물건을 다루듯 한다. 그냥 물리적인 고체가 아니다. 시공간을 감각적으로 이불마냥 접었다 편다. 만고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서리서리, 굽이굽이라는 의태어도 독창적이고 참신하다. 절제미가 돋보이는 임을 향한 그리움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은 아름다움의 본질이 절제 있다고 본다. 중국 한시, 일본의 단카, 우리의 시조는 문자의 정교한 분할과 겸손과 배려 그리고 그 단아함이 핵심이다. 이 모든 요소를 포함하는 틀이 바로 절제다. 감정적인 흥분이 배제되고 화려함을 버린 동양의 아름다움이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동양미의 절정은 절제라는 닫혀있음으로 더 거대한 울림을 만드는 힘에 있다. 여기서 닫힘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모든 열림은 사람의 시야를 팍팍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라. 시력이 지금보다 몇 십 배 좋아진다고 우리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셀 수 없이 많은 세균과 먼지의 공포에 그만 질려버릴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적당히 닫힌 상태라야 살아갈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절제는 그 자체로 인간을 편안하게 해준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사실. 그게 핵심이다.

 

서양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몹시 그리웠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임을 찾아갔을 것이다. 물리적인 행동이 먼저인 서양의 정서는 긴 밤을 이불에 넣어 놓고 기다리는 동양과 다르다. 황진이의 시조에서 보듯 기다리는 사람의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는 임에 대한 동양의 정서는 절제를 바탕으로 한 기다림이다. 닫힘이 절제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면 닫힘의 정서가 지닌 은은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본문112쪽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산행의 일부다. 책 제목인 이 구절은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중국 장쩌민 주석이 읊조린 것으로 유명하단다. 서리 맞은 단풍은 황혼녘에 이른 인간에 대한 은유다. 늙음은 젊음 보다 생생함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 60세 청춘이니, 노년의 청춘이니 하는 수사보다 훨씬 깊고 잔잔한 울림을 준다. 한시 혹은 시조의 맛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인간사의 희노애락을 자연에 빗댄 동양의 시는 마음을 무겁게도 한다.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의 섭리에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는지. 슬프다. 지금 세상이 만들어 내는 숱한 문제들이 많아짐의 정도가 인간들이 자연의 이치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지. 가을이면 낙엽이 되어 내년 봄 새순으로 자랄 다음 세대의 거름이 되는 감잎(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에서)처럼 우린 죽음과 자연에 대한 패러다임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순환되는 죽음과 탄생, 절제와 닫힘의 상징성. 그 상징성은 닫힌계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성질과 일치한다. 생뚱맞지만 황진이의 동짓날 긴 밤, 두목의 붉은 단풍.

오늘 유난히 애처롭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브뤼헐의 작품은 대부분 유쾌하고 재밌다. 드로잉과 판화로 남아있는 작품 중에는 많은 괴물(?)이 등장하는 데 기괴하지만 귀엽다. 인간 다리가 달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물고 걸어가는 캐리커처는 앙증맞기까지 하다. 생뚱맞게 브뤼헐 이야기로 시작한 건 바로 이 괴물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물고기 몸통에 달린 인간의 다리, 게처럼 꺾인 네 발과 사람 머리의 결합, 곤충 인간. 브뤼헐의 작품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짐승과 곤충 그리고 인간 신체의 접합 혹은 신체의 뒤틀림과 기형을 통해 탄생했다. 바벨탑을 통해 인간세상의 파국을 고민했을 것이라는 내 추측이 맞는다면 브뤼헐의 괴물들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기괴한 내면을 표현한 것이라 믿는다.

 

작가도 낯설고 출판사도 낯설다. 하지만 세상이 점점 낯설어지는 내게 이 책은 큰 위안이 됐다. 요즘 난 브뤼헐의 그림마냥 내 몸이 물고기가 되거나, 내 머리가 곤충의 대가리로 바뀌는 상상을 곧잘 한다. 위선과 허영으로, 적당한 타협으로 인간 아닌 괴물로 변하고 있는 나는 카프가의 그레고리 잠자다. 그런데 책의 작가 또한 삶의 의미를 찾는 지독한 고독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젊은 날 누구보다 뜨거웠던 글쓴이의 삶을 놓고 보면 그가 우리보다 더 절망적으로 자신을 삶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우리는 끝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치열한 자기반성과 성찰로 거대한 삶의 무게를 가늠하는 그는 나를 무척 부끄럽게 만들었다. 괴물로 변해 간다는 망상(?)과 살아야하는 이유를 찾기 힘들어하는 내가 위로 받는 건 당연했다. 글은 수려했고 무엇보다 진실했다. 나 홀로 세상의 모든 고민을 메고 끙끙거린다는 자만(?)을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문장은 솔직했다. 좋은 글이고 좋은 작가다.

 

자기연민에 빠져 지옥이 돼버린 세상을 저주했다. 생각 없음의 연옥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이렇게 인간으로 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삶이 그렇게 떳떳한지 독설을 퍼부었다. 내가 괴물로 변하고 있는 중이라면 당신들은 이미 괴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막상 내가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은 없었고, 내면을 가다듬는 시간은 사라졌다. 타인의 향한 관음증만 커지고 정작 나는 사라졌다. 책은 괴물이 되지 않고 살기 위한 한 인간의 성찰 그 자체였고 나는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죽음 외에 다른 선택이 너무나 많고,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비겁하다거나 무책임하다고 하지 않는데도 뚜벅뚜벅 죽음의 길을 선택한, 그리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영원한 부끄러움의 연옥 속에 가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숨이 막혀온다. 본문 37쪽

 

미안하다 영근아, 정말 미안하다. 네가 스스로 목숨을 죽여 가며 이 끔찍한 시대와 맞서는 동안 나 역시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너의 삶을 대책 없는 삶이라고 몰아세웠구나. 본문 129쪽

 

 

이 타락한 세상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고 지옥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괴물이 아닐까? 작가가 온몸으로 고민하는 삶의 의미를 조금은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왜 사는지를 말이다.

 

바벨탑은 신의 전능에 도전하려 했던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한다. 우리가 생각 없음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환경과 생태 그리고 거대한 지구라는 신에 의해 우리 문명은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파국의 전조가 생각 없음의 몬스터, 물고기 인간, 끝없이 작은 물고기를 삼키고 삼키는 대구(생선)를 그린 브뤼헐의 그림에서 보인다.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꼭 읽어보시라.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심리학자들이 각자의 전문경력에서 일군 혁신적이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본문 97쪽.

 

종이책을 펼쳐 놓고 읽는 사람을 구경하려면 도서관에 가야한다. 아동 열람실 분위기와 달리 성인 열람실은 책 읽은 어른이 절반이라면 학습서로 공부하는 청소년이 절반이다. 책을 읽는 학생은 가뭄의 콩이다. 하지만 빈번히 스마트 폰으로 뭔가를 보는 쪽은 대부분 청소년이다.

 

한 고등학교 신입생에게 책을 읽고 감상을 적어오랬다. 시간은 넉넉히 주고, 형식은 자유롭게. 책은 중고등생이면 충분히 재미와 흥미를 느낄만한 과학책. 한 달이 지난 후 받아 든 녀석의 감상문은 충격과 공포였다. 정말 열심히 써왔다. B4용지 앞뒤를 가득 채웠으니. 그런데 내용은 처참했다. 기본적인 문법오류, 장황하고 긴 문장, 맥락은 들쑥날쑥. 첨삭을 하다가 멈췄다. 책을 읽은 적도, 글을 쓴 적도 거의 없으니 당연했다.

 

학원 아이들과 독서 수업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그 녀석 때문이다. 나름 괜찮다는 책을 골라 아이들과 함께 읽고 쓰는 수업을 몇 번 해봤는데 꽤 힘든 모양이다. 쉬운 인문서를 아이들은 어려운 고전 대하듯 한다. 당연히 쓰기는 더 어려워한다. 첫 번째 책이 마무리되고 두 번째 책을 고를 때 방향을 틀었다. 재밌고 흥미로운 책으로. 내용의 깊이는 나중이고 독특하고 신기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책으로 말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자극적인 텍스트와 영상을 접한 아이들은 딱딱한 인문서에 대한 거부가 크다. 텍스트만 줄줄이 나열된 책에서 해석과 사유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아이들의 기초체력이 너무 부족했다.

 

재미와 흥미는 책읽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이게 꽤 중요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립 밴 윙클”같은 신나는 이야기책과 전쟁영웅이 잔득 등장하는 위인전 따위가 본격적인 독서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재밌다. 상식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을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한판 뒤집기를 벌이다. 알코올은 어떤 부분에서 긍정적인가? 욕설은 정신건강에 얼마나 좋은가? 등 기발한 내용이 가득한 책이다. 평소 읽기에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딱이다.

 

책은 위험을 알면서 위험을 즐기고 중독되는 이유에 대한 상당히 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담배라는 주제가 있었으면 했는데 워낙 악의 화신으로 자리매김 한지라 담배는 없다. 대신 욕설과 술, 섹스와 사랑, 스트레스와 시간낭비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와 고찰로 구성돼 있다. 즐거움을 위한 책읽기 리스트에 추가될 내용으로 가득하다. 책에 언급한 주제에 중독됐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은 한번 꼭 읽어보시라. 상당한 논리적 근거와 재밌는 과학적 결과로 무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합리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자극적이 않으면서 할 얘기를 아주 잘 풀어놓았다. 나는 책상을 어지럽히고, 정리정돈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부분을 읽으며 나직하게 쾌재를 불렸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책과 점점 멀어지는 세상이다. 일차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문제겠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흥미와 재미 위주의 책이냐 아님 빛나는 지성과 통찰이 가득한 책이냐. 물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저 짧은 생각에는 흥미를 자극한 후 깊이 있는 독서로 향하는 것이 알맞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그노벨상에 빛나는 이런 종류의 책이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는 초석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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