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고백체로 쓰인 '죄와 벌'의 원고를 태워 버린 것을 제외하면, 좀처럼 자신의 작품을 반성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따라서 개작은 물론이고 퇴고조차도 잘 하지 않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스따브로긴 때문에 '악령'을 다시 썼다...'악령'의 모든 사건, 모든 인물들은 스따브로긴과 연관을 가지며 여러 주요 인물들이 스따브로긴에게 아주 강한 감정적, 관념적 끌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스따브로긴의 비밀을 푸는 작업, 그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은 여타 주요 인물들의 정체를 규명하는 작업이요, '악령'의 비극의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이며,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동안 천착해온 신과 인간의 문제를 밝히는 작업이다.

...스따브로긴은 외모와 행동양식으로 볼 때, 그리고 러시아 귀족의 자제라면 누구나 다 겪는 과정(가정교사로부터의 교육, 군복무, 외국 유학과 여행 등)을 거친 만큼, 조국의 토양과는 동떨어진 러시아 귀족 도련님의 전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런 생래적 기반을 지닌 스따브로긴의 성격 형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가정교사 스쩨빤이다. 희극적이며 사랑스러운 <영감> 스쩨빤이 스따브로긴에게 준 가장 큰 공헌은 <우수toska>에 대한 감각을 불러 일으켜 놓은 것이다...우수는 과거에 존재했거나 혹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존재해 주었으면 하는 것, 어쨌거나 현재 부재하는 것, 그때문에 끊임없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우울하게 만드는 정서적 운동이다. 그래서 우수를 간직한 사람은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을,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을 그 모호한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게 마련이다. 바로 이 우수가 스따브로긴을 끊임없이 방황하게 하고 온갖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고 한편에선 그 범죄에 대한 반성적 사고와 반작용적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내적 동인인 것이다...

...<악령>은 그 자체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마귀들>이라는 뜻을 지니면서 <뭔가에 홀린 자들>, 나아가 <악마에 홀린 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여기서 <뭔가>,<악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 동안 그 괴력을 두려워했던 허무주의, 무신론이다. 어쨌거나, <악령>은 작가가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한 서구적인 허무주의와, 그 관념에 먹혀버린 인간들을 의미한다. 이 마귀가 특정 인물에게서 빠져나가 버린다면 그 인물은 성서의 인물처럼 <멀쩡한 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악령'에서 귀신에 홀린 자들, 관념에 홀린 자들은 결단코 치유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을 먹어 치운, 혹은 자신이 집어삼킨 관념들과 함께 자살하거나 살해당한다. '악령'에서는 관념이라는 마귀를 쫒아 내줄 신이 결코 등장하지 않으며, 마귀와 한 몸이 된 인물들은 그들의 물리적 생이 중단되지 않는 한 <홀림> 혹은 <들림>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악령'은 불가피하게 비극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작업은 여러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반복되고 갱신되어 온, 귀신에 홀리고 귀신에 들린 자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물리학 일반 그리고 특히 아인슈타인은 추상적이고 난해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는 무관한 대표적인 예로 여겨졌다. 상대성이론, 특히 일반상대성이론은...이해할 수 없고 자나치게 수학적이며 세계의 힘과 물질과 동떨어진 것, 이런 것이 모두...너무나 자주 되풀이해서 언급했던 특징이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얽혀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도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별종이며 약간 미쳐 있으며 구름 위 세계에 사는 사색가로 여겨졌다. 그는 정치적으로 현실과는 맞닿아 있지 않고, 그의 시간과 공간의 이론은 보통의 땅에 매여 있는 물질과 힘 같은 '진짜 물리학'은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고 간주되었다.

...위대한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앙리 푸앵카레도 실질적으로 같은 정도로 올림퍼스 산상처럼 초연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는 과학 지식의 많은 부분이 단순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약속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과학 지식은 언제나 인간이 우리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할 필요성에 냉혹하게 매어 있다고 푸앵카레는 믿었다.

...이 책을 쓸 때 내가 가졌던 더 큰 야심은, 이 책이 시간과 공간에 대란 가장 엄청난 주장들이 물질 속에서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즉. 추상과 물질성은 각각 함께 맞물린다는 메시지에 가락을 맞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