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안에서는 당연한 일.
드라마 안이니까 가능한 일.
드라마 안에서만 가능한 일.
사춘기 소녀 시절 순정만화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나에게도 때가 되면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겠지?”
그 생각이 터무니없는 어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드라마에서든, 어느 만화책이든.
인형처럼 예쁘지는 않아도, 슈퍼모델처럼 늘씬하지는 않아도, 판검사처럼 똑똑하지는 않아도, 무엇하나 빼어나게 잘 하는것 없는 보통의 여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백마 타고 나타난 왕자의 눈에 띄게 된다. 때론 엉뚱한 행동에서 나오는 귀여움으로, 때론 순수하고 착한 마음씨로, 왕자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평민들에게 까지도 사랑을 받아 그녀들에게 삼각관계는 그냥 커피 한 상자를 사면 딸려오는 반찬통 같은거랄까.
일주일쯤은 드라마같은 현실을 살수있다면.. 하고 꿈꾸는 어른아이는 여전히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데, 여주인공과 나 사이의 차이점은 비단 왕자님의 유무만은 아니다. 힘들어서 다 그만두고 싶을때 도망칠 쥐구멍이 그들에게는 있고, 눈물나게 억울한 상황이 생겼을때 어떻게든 누명이 벗겨질수 있는 실마리가 그들에게는 꼭 있다.
그런 허구의 세상속에 사는 소설 속 주인공들 중 유난히 나 같고, 내 친구 같은 주인공을 만났다. 달콤한 도시안에 살고있는 31살의 평범하디 평범한 직장인 오은수. 부당한 상황에서 큰 소리로 진실을 외치고 싶지만 눈앞의 현실과 맞서 싸울 용기가 없어 진실을 알리지 못하기도 하고, 옛 애인의 결혼식날 무엇을 해야 잘했다는 소릴 들을까 고민하며, 때론 귀엽고, 때론 도발적이고, 무작정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보자며 사직서 제출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극한 소심함 때문에 옹졸한 마음앓이를 하고, 눈앞의 하루하루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여자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 여성, 결혼 적령기를 맞아 가족과, 사회와, 친구들, 내면의 사랑, 일.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은 오은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많이도 공감하고, 웃고, 찡하고, 생각하고.
오은수의 삶에서의 몇개월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드라마보다 더 스펙터클한 사건들이 팡!팡! 터졌고, 누구나 인지할만한 “픽션 안에서는 있을수밖에없는” 실마리들은 생겨나지 않았다. 다만 우리네 삶처럼 물 흐르듯 오은수의 일상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을뿐.
평범함을 모토로 살아가는 삶은 판에 박힌 것 같아 별로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어쩔수 없이 그 평범한 사람들의 굴레안에 들어가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지극히 평범한 나 같은 사람군에 속한채로 이따금씩 소박한 반항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오은수.
나 또한 너무나도 평범하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잘 해서, 그녀의 일상에서 펼쳐진 상황에 “어머! 어떡해!!”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드라마틱한 실마리 없이도 그녀는 덤덤히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삶을 꾸려나간다.
오은수. 그녀가 살아가는 도시는 이리도 달콤하다.
누구에게는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부터 떠올라 지긋지긋한 서울일수도, 누구에게는 실연의 아픔이 떠올라 슬픈 서울일수도 있겠지만, 세상으로부터 치이면서 가끔은 소리도 지르면서 어떻게 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인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그녀의 서울은 달콤하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니까.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마시는 믹스커피가 꿀-꺽 넘어가면서 아릿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
오춘기를 겪고 있는 나의 도시도 달콤하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달콤하긴 커녕, 떫고 씁쓸한 시간들이 더 많은 요즘이지만, 그래도 달콤하다고 하기로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난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달콤한나의도시,
정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