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나는 이 책을 집으면서 기대하기를, 학문적으로든지 인격적으로든지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기를 바랐다. 굳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퇴계를 깊이 앎으로써 얻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성찰이랄까, 깊이 있는 깨달음 같은 것을 맛보고 싶었다.

 

결론은, 퇴계라는 제목을 단 이 책은 퇴계가 쓴 책이 아니다. 작가 백금남이 쓴 책이다. 퇴계와 율곡을 중앙에 놓고 그야말로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작가는 상도 많이 받았고, 최근에 ‘관상’이 영화화되면서 주목받은 바있다.

 

광고든 영화든 책이든 그 어떤 대중예술에서건 ‘도입부’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한 작품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은 전반에 달려있다. 이 책 또한 시작이 좋았다. 퇴계가 나와 말구종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거기 어떤 대목들이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어마어마하게 높여 놨다.

 

잡기와 기예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려내는 자를 환쟁이라 한다. 천박한 그림쟁이라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읽고 쓰는 놈을 서생이라고 한다. 천박한 쥐새끼라는 말이다. 이왕 시작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그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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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살인사건이 발발하고, 홍문관 부교리 율곡은 용의자로 지목된 퇴계의 행적을 쫓는 전개다. 임꺽정은 주조연급 카메오랄까. 전작 관상이 영화로 성공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의 구성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만큼 정신이 없다. 추리소설도 아니고, 퇴계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전개도 아니고 퇴계의 일생을 다루는 일대기도 아니다. 줄거리의 중심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저것 다루다보니 맥은 없고, 패대기친 장어가 팔딱대는 것처럼 인물들만 모로 튀고 있다.

 

이것은 작가에 의한 책이되, 그가 택한 소재가 퇴계와 율곡일 뿐이라고 본다. 인정하는 것은, 작가의 넓은 식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내내 퇴계라는 인물보다는 써내려갈 게 많은 작가만 보인다. 기대에 반해 건질 게 없다는 것이, 모로가듯 퍼지다가 빤해지는 결론부가, 늘어진 퇴계에 대한 이미지가 아쉬웠다. 

이 책을 보는 내내 돌덩어리를 얹고 있는 듯 한숨만 흘렀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상기하며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에 부침이 있음을 어쩌지 못한다. 얼마나 무지함으로 즐거웠던 교인이었는가. 분별력 없이 이끌리면서도 의심할 지식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던 나는, 이 책이 내놓은 조국교회 현실의 심각성을 보면서야 겨우 조금 깨달았고, 그것만으로도 뜻 없는 한숨만 흘렸다.

 

저자는 박순용 목사다. 총신대 대학원을 거쳐 영국에서 영적 대각성과 청교도에 대해 연구하였고, 현재 하늘영광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목사는 ‘열 살 때 목사로 서원하였다’는 문구를 교회안팎으로 자기소개에 넣고 있다. 보통 그런 것까지 써넣지는 않는데, 굳이 그 이야기를 자신을 드러내는 첫 구절로 사용하는 의미가 뭘까.

 

이 책은 저자가 담임한 교회에서 설교했던 배교설교 시리즈를 책으로 옮겨놓았다. 저자가 설명하는 배교란 무엇인가. 교회 안에 세상정신이 들어옴으로써 진리가 왜곡되었고,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무분별하게 행해짐으로 반하나님적인 문화와 가치관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심각한 현상을 따르면서 참된 성경적 진리를 거스르는 행위를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배교’라 칭한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뒷문을 열어준 세상풍조의 흐름과 실체를 세세하게 꼬집고 있다.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발판은 계몽주의의 태동이고, 그 안에서 범람한 진리왜곡이다. 그것을 받아먹은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에 자기중심적·신비주의적 색채를 가져다준다. 저자는 고대 플라톤이 주장한 ‘이원론’과 ‘상승 사상’이 신비주의의 여러 형태를 낳은 세상정신의 싹이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신비주의가 뿌리내린 여러 이단적 행태를 설명한다.

 

이 책이 좋은 것은, 진리왜곡이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함으로 분별의 지식을 길러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각 장마다 그 주제에 적합한 성경적 가르침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성도의 신앙을 바른길로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의 강단에서 흔히 들을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 믿는 자가 세상정신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으로 온전히 돌이킬 수 있는 방향성을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것들로 쌓아가고 있는 교회’들이 만연해 버린 지금에서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스스로 말씀 안에서 분별하지 못하고 행했던, 믿었던 내 신앙에 대한 돌이킴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으로 벅찼다. 세상 정신이 깊숙이 박혀서 성경의 진리에서 얼마만큼 멀어져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향하는 교회 안에서 내가 얼마나 자각하지 못한, 깨어있지 못한 신앙을 그런 예배를 드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보고 있을 때 어떤 이가 나에게 와서 그런 책을 보기보다는 먼저 ’존 오웬‘이나 ’김남준(저자의 친구이기도 하다)‘의 신학적 가르침이 담긴 책을 보라고 권했다. 이 책을 인해 생기는 그 ’분별력‘이라는 것이 단지 개인의 신앙과 교회생활에 있어 긍정적인 영향만을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만약 이 책을 읽은 교인이 저자가 말한 ’문제 있는 교회‘의 교인이라면, 사실 이 책을 읽은 이후 받게 되는 신앙적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교회자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며 세상정신에 물든 교리를 배우면서도 순수하게 생명의 꼴로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는 큰 혼란을 줄 수 있다.

 

더구나 지금 이 시대에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선‘ 교회를 찾기가, 그런 목회자를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도 말하듯 이미 세상 정신이 교회에 깊이 박혀버린 시대이고, 그런 유혹을 물리치면서 목회하는 것은 한참 뒤떨어지는 것처럼, 능력이 없는 교회인 것처럼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도 자신이 목사나 교회를 분별하여 섬기려면, 그 분별이라는 것에는 일종의 신학적 지식과 성경적 판단이 필요한데, 교리의 방향이 담긴 설교를 분별이란 명분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웬만한 교인이야 시험 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때문에 교인이라면 알아야 하는 내용이지만, 또 교인이기에 쉽게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 교회들은 너무 심각하게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있고, 그것을 자랑삼아 양적으로는 굉장히 성장하고 있다. 교회가 성공해서 세상에 보여주려는 목회들이 넘치고 있고, 그런 곳에 교인이 많이 모이는데 과연 내가 이 책을 그 교인 중 하나에게 건넬 수 있을까. 나도 이렇게 아픈데 말이다. 회개하며 다시금 정신차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각심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진정한 각성제였다.

권력이 대중을 압도하는 역사적 줄기에서도 별종은 늘 존재해 왔다. 죽은 듯 숨어 지내면 그럭저럭 살다 묻혔겠지만, 사실 역사는 대중이 아닌 별종에 의해서 더 크게 움직였다. 별종은 태어날 때부터 이마에 ‘별’을 박고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이상한 놈’이란 별종을 뜻하고, 별종은 결국 각각의 개인을 지칭한다. 과거와 지금의 차이는 그런 별종들에 대한 ‘이해적 시선과 인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

 

과거 지식과 기술의 발전은 대중정치, 대량생산, 대량교육을 양산했고 그것은 통제할 수 있는 인구범위를 확대시켰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공급을 통해 ‘대중’이라는 두릅으로 돌돌 말려진 피지배층은 각각의 기호를 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대중은 존재하지 않는 세태가 되었다. 트렌드는 별종이다.

 

별종들이 급물살을 탄 계기는 여유증대에 따른 선택권의 향유이라고나 할까. 물질적·시간적 여력이 많이 생긴 개인은 자신을 더욱 특별한 개체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다양한 선택을 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진보하는 정보와 기술의 발전 또한 ‘대량과 대중’이 아닌 ‘개개인의 다양성’에 맞춰지게 된다. 혁신적인 생산증가로 물질적 여유가 생긴 이들에게 ‘선택을 위한 선택’은 그들을 더욱 더 돋보이는 별종이게 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로 예술은, 가난한 자들이 배고픔을 잊어가면서 하는 창조활동으로 비쳐졌고, 장래성 없는 폐인직종으로 인식된 적도 있었다. 현재 ‘대중문화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대중의 사랑과 후원을 받기 때문에 부유한 삶을 산다. 그러나 여유와 선택이 빚어낸 그들의 활동은 대중을 향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애초에 대중과 예술이란 결합될 수 없는 영역 아닌가.

 

대중예술이라 말하는 것은 많은 대중을 끌어 모아야 하고, 모인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대량생산된 문화인들이 주를 이루는 시장인 것 같다. 일례로, 음악시장을 든다면 비슷한 컨셉을 잡고 비스무리한 의상을 걸치고 나와 다들 비슷한 춤을 추며 엇비슷한 사운드에서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비슷한 가창력과 비슷한 춤실력들을 뽐내는데, 이런 상업시장바닥을 예술이란 단어로 포장한다는 것이 참 어폐가 많다. 오히려 예술이란 절대적인 별종의 영역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예술은 정상(normal)이 되었다.’(p. 39) 이 한 마디는 참으로 여러 생각들을 낳는다.

 

저자는 별종들을 위한 교육으로 '아이들의 독특한 재능을 찾아내어 그것을 적극 권장하라. 그러고는 뒤로 물러서라.'고 조언한다. 아이의 재능만을 고려한 조언이기에 조금 빈약하다. 안그래도 무너져가는 공교육안에서 아이들의 인격이나 사교성, 가치관, 공동체의식 등이 제대로 교육되기 힘든 실정인데, 어찌 별종이 되라고 권위존중이나 사회성을 배제한 재능위주의 교육을 권한단 말인가. 사실 그런 교육은 권하지 않아도 이미 학원방치교육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타고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만 설치해 주면, 버티고 인내하면서 학습되어야 할, 길러주어야 할 인성교육은 치워도 되는 것일까. 저자의 교육관이 조금 의심스러운 대목이었다. 그리고 권위라는 것도 '별종'의 영역에서는 무시해도 될만한 것으로 인식하는 저자의 의식이 머리를 긁적이게 했다.

 

사실, 별종들이 자신의 특이성향에 따라 온·오프라인을 통해 모이고 활동하는 것들을 보면서, 맞춤형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살기에 저자의 주장에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된다. 시대흐름을 잘 간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벤처나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마케터나 광고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그리고 별종이 되기를 망설이며 대중속에 편승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이를 위한 제품을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대안은 몇몇 사람들에게 중요한 특별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알아둘 사항이 있다. 별 상관없는 일반대중을 실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당신 없이 살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p.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