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추악하든 향기롭든, ‘인정의 힘’은 매우 큽니다. 나의 몸과 마음을 바로 보는 것, 그것이 행복한 사랑을 이끄는 시작인 것입니다.
-프롤로그 중.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연.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 끈이 끊어지지 않는 한 누군가는 그 연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얼레를 계속해서 조정해 줘야 한다. 그러고 보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연결 되어 있다고 우리 인생의 한 부분도 충분히 그 연에 투영될 수 있을 듯 하다.
혼자 잘 날다가 이웃 연들과 함께 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본의든 본의 아니든 서로의 실이 엉켜 자연스레 연싸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하니 말이다. 또한 그럴 경우 어느 연 하나의 줄은 끊겨 허공의 바람이 부는 대로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그렇다 해서 평생 연날리기를 다시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쩌면 흥미는 없어질지도.
사사로운 놀이 하나에 이런 표현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상처, 혹은 트라우마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진데 고로 사람이 얽힌 연(緣)놀이는 오죽하겠는가.

상담전문가라고 하는 선업 스님이 쓴 이 책은 그 연놀이를 하다가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많은 치유의 언어들을 담아내고 있다.
사실 종교와 연관 된 책들이 그 속의 사상이나 철학의 범주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기에 이 책도 그러한 범주를 생각 해 본다면 기대이상의 파격적인 내용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가 삶의 위안의 도구로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았음에는 부정 할 수 없는 바, 그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의 몫은 충분히 하고 있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특히나 이 책은 사랑, 그리고 그에 따르는 연애 감정에 대한 마음가짐을 중점에 두고 있기에 스님 개인의 상담가적 관점과 불교의 관점 모두를 들여다 볼 수 있어 기존의 불교서적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제일 강하게 느낀 것은 이 책이 마음의 평화만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그 느끼는 부분이 모두 다르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많이 찔리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어떤 내용에선 정말이지 강한 부정을 해대는 나의 모습이 발견되어 마음이 불편했다.
돌이켜 보건데, 그것은 어린아이가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야 하는 것은 아나, 그 치료 과정에 겁이나 병원 앞에서 치료 안 받겠다며 생떼를 쓰는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난 그것이 받아들여야 할 것을 못 받아들이겠다는,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과거 기억에 대한 내 에고의 파장임을 실감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분명 과거 속에서 난 인정하고 넘어갔다 믿고 있던 그것이 사실은 무의식 골속 깊숙이 남아 있었구나 하며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우리가 그런 상황 속에서 파생되는 흔히들 말하는 나쁜 생각이나 감정들을 바랄 볼 때, 나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가혹하리만치 그 마음들을 떨쳐버리고자 무리하게 애썼던 결과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들도 충분한 치유의 시간이 필요함에도 상처 난 그대로 애써 외면하려고 한 결과이지 않냐하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포인트도 그것이었다. 즉, 그가 말하는 인정의 힘은 상황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감정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치료란 절대  없다! 라는 듯. 오히려 인식하여 그 감정들을 감싸 안으라는 식으로. 마치 ‘내가 왜 네 그러한 마음을 이해 못 하겠냐. 자, 받아 줄께. 단 증오의 단계까지는 넘어가지 말거라.’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가 ‘참아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아냄은 마음의 원치 않는 바를 몸이 담아내야 하는 것, 즉 억누르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내 마음을 바꾸어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아냄은 억누름이고 받아들임은 변화입니다. - p. 57~58

그는 몸과 마음을 두루 살피라는 의미에서 몸과 마음의 합성어인 ‘뫔’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는 삶을 이야기 한다. 사람이라는 단어가 한 글자 안에 그대로 박혀 있는 단어라면서.
저 글을 보면서 난 또다시 균형을 떠 올렸다. 그 속에선 착한 사람이 되겠다! 독한 사람이 되겠다!  작정하고 사는 것 또한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었기에. 그러기 위해선 남과 내가 좋아하는 것, 남과 내가 싫어하는 그 각각의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리적이라는 것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아야 하지요. 그런 기준 아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쿨한 사람입니다. -p.75

앞으론 최대한 쿨하게 연(緣)을 날리자.

거품이 가라앉고 불황에 빠져든 현재, 나는 그때의 낭비벽을 과연 그만두었을까? 아니다. 아직도 나는 전과 같은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돈은, 써버리면, 거품 따위 일어날 수가 없다. 더 벌자, 더 저축하자, 라는 서글픈 농경민적 가치관이 거품경제와 디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렵민은 낭비밖에 모른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낭비는 미덕인 것이다.
- 책 저자의 서문 중에서

저 서문의 이야기가 충분히 납득될 만큼 상당히 소비지향적인 소설집이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속물로 보여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아니, 지저분하다, 한심하다, 잘났다, 미쳤다 식의 손가락질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부럽다는 느낌의 여지를 주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미화하려는 의도도 안 보인다.
그는 어떤 과시적인 요소도 보이지 않으니까.

이쯤 되면 뭔가 어중간한 느낌의 소설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보는 관점으론 하나의 일관성이었다. 그리고 그 일관성이란 추억에 대해 그가 보이는 감정적 자세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부자라 말 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배경을 보이지 않는다. 문득 문득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 나왔던 류가 이렇게 성장한 건가 싶은 느낌만 줄 뿐. 그렇지 않다면 그저 뭔가 계속 소비하고 있는 듯한 주인공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눈으로 보여주는 소비란 바로 여자와 음식이었다. 왠지 작가의 성향으로 봐서 꽤나 하드보일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가겠지만 그런 구체적이고도 끈적끈적한 성적 묘사를 이 곳에선 하진 않는다. 비유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그것들이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는 것은 여자(모두가 여자와 관련 된 에피소드들은 아니다.)와 음식에 얽혀 보낸 시간과 감정의 소비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 해 볼 것이 시간이야 그렇다 치고 감정이라면 꽤나 복잡해 질 수 있는 문제다. 돈을 주고 산 여자든, 가벼운 만남으로 만난 여자든, 우연히 만난 여자든, 또 자연스러운 인연으로 알게 된 친구나 남자들이든 여하간 그렇게 만난 사람들에 대해 느끼게 되는 감정들 말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한 것들조차 복잡하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마치 ‘나 이번에 여행가서 이런 걸 샀어, 볼래?’ 라고 말하는 듯, 그저 모든 것이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늘 그렇듯이, 절대로 허락될 수 없는 것을 입에 넣는 기분이다. 죄 그 자체를 먹고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죄를 먹고 우리는 원기를 되찾는다.’ -p. 39
“매력적인 것에 본능적으로 접근하는 재능이 없는 사람은 창작할 자격이 없어요.”라고도 말했다. -p. 167
‘여자는 감상적인 동물이 아니다. 문제는 남자이다.......연락처도 알고 있었지만.......만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결국 전화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만나도 모나코에서와 같은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 260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전화라도 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다시 만나자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정말로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했을 것이므로 사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상에 빠졌을 뿐일 게다.’ -p. 262
‘그녀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제 다시 만나지 말자고 했기 때문이다. 공백이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가 감상을 낳는다.’ -p. 262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깨닫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이리라.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그 무언가를 느끼는 것. 이 책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듯 했다.
경험은 만드는 것이라고. 거기엔 깊은 감상도 필요 없다고.
그게 이런 거구나 라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번 한 소비는 그걸로 끝이리라.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고, 물건은 소유하되 새로운 것에 대한 소유욕엔 끝이 없고, 사람은 시간이 흐르듯 스쳐가며, 그 속에서 사랑은 그저 감정의 에너지로 소비 될 뿐.
우리는 그래서 음식을 먹는다. 그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고로 먹기 위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지금 무언가 한 입 꿀떡 넘기고 싶다. 그러면서 후회를 하나 하고 있다.
‘여행가기 전 이 책을 읽을 것을.’ 하는 후회.

‘노동자 계급 집안에서 태어난 젊은 시절 여러 가지 가혹한 육체노동을 경험하였지만, 그 후 인생의 대부분을 그는 도시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그는 천연덕스런 ’문단‘에는 친숙해질 수 없는 무엇을 느꼈고 주변 노동자들의 생활에서는 공감과 동정을 품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는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냉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날의 육체노동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품이나 작품에는 그렇듯 앤비밸런트(Ambivalent)하고 떨쳐 버릴 수 없는 초라한 젊음 같은 것이 녹아 있다.’
- 책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우연히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하루키가 쓴 에세이집을 읽고 있었는데, 그 책 속 내용 중 한 부분에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하루키는 레이먼드 살아생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기억을 통해 그의 작품과 그의 인간성에서 어떤 일체감을 느꼈다고 저 책 속에서 말한다.
하루키는 그의 열렬한 팬인 듯한 느낌을 준다. 일본에서 레이먼드의 책들을 스스로 번역해서 출판한 것을 보면.

그런 측면에서 레이먼드는 마니아층이 강한 작가이지 싶다. 특히나 작가집단으로부터.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소설가를 봐도 그런 추측이 무리는 아니지 싶다.
그런데, 그것이 러시아 작가 체 호프와도 비슷하다. 레이먼드에게 미국의 체 호프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기에 바로 이 책을 끝내자마자 체 호프의 단편집을 읽었는데, 그 역시 많은 유명 작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한 작가로 써져 있었다.(아, 그러고 보니, 하루키는 체 호프의 책을 여행 갈 때마다 가지고 다니며 반복해서 읽는다고도 했다.)

일단, 나에게 비평가적 수준의 전문성이 없어 두 작가의 글쓰기에 대해 유창히 표현하지는 못하겠으나, 거추장스런 문장 표현을 배제하고, 그 속에 심오한 것이라고는 일체 없어 보이는 듯 툭툭 상황 설명만 해 나가는 묘사가 많다는 공통점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접해 보지 않아 이런 언급 또한 좀 그렇기는 하지만 레이먼드 카버가 그런 면에서는 더욱 능숙하게 보인다.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 좀 더 할 이야기가 많고, 거기에서 유추될 수 있는 사건들이 많아 보임에도 그는 현재 묘사에만 집중한다. 극 중에서조차 그들을 상대하는 등장인물들도 그저 상대방의 과거를 인간적인 호기심 차원에서의 단순 추측정도만을 한 채 끝낸다. 문장 또한 인물들이 펼치는 동작 하나하나마다의 묘사를 거의 그리고 있되, 단순하고 명료하게 써져 있다.
특히나 그러한 요소는 심지어 나에게 단편 소설이 아닌 희곡이나 시나리오의 지문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지도록 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러한 단순한 표현들이 내 마음에 만든 것은 묘하게도 ‘인간의 매 순간의 삶이 예술이기는 하구나.’라는 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의 펼치는 공허하고, 무덤덤하고, 건조하고, 어찌 보면 냉소적이기까지 한 매 순간의 행동들과 말들이 우리가 매일 하는 것들이라는, 그러니까 그러한 투영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감상하고 있는 듯한 관객의 입장으로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랄까. 마치 스크루지 영감이 유령과 함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듯.

작가는 그것을 소설이라는 쇼핑백 속에 있는 그대로 집어넣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그것도 하루키의 표현대로 포장지에 싸지도 않은 아주 초라한 형태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 초라함이 빛났던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때그때의 찰나에 행동하고 말하는 것들 속에는 누구의 말대로 즉흥적인 미, 혹은 예술이라고 말하여질 수 있는 그 어떠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작가는 이러한 단편들을 통해 우리의 삶 속 1초, 1초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속삭이는 듯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안다. 우리의 삶 1초, 1초가 드라마틱할 수 없다는 것을.
고로 그의 글들은 그 드라마틱하지 않은 순간들, 즉 우리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의 조각들조차 드라마틱한 것임을, 혹은 그렇게 될 수도 있음을 나에게 조용히 암시하고 있었다.
아니, 뭐, 그러한 의미심장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작가는 ‘우리가 대부분 행동하고, 생각하는 게 이런 것들이야, 어떻게 생각해?’ 라며 툭 하고 질문을 던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
그에 대한 내 개인적 대답.... 글쎄,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정도랄까,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