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켕｣에서,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작가 에밀 졸라는 이 책 서문을 통해 그렇게 밝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성격은 바뀔 수 있지만 기질이 바뀐다는 말은 잘 들어보지 못한 듯 하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성격은 그 스스로의 동물적 기질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가면일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는 말의 존재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더욱 더 그렇다.
고로 에밀 졸라도 나와 같은 시각에서 이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라 설명하고 있는 그를 보면.

그런데 문제는 우리라는 동물에게 있어 인간의 탈은 도저히 벗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어차피 신이 인간에게 쥐어준 것이 본능이라면, 세상의 누구든 본능적으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하건만, 인간의 탈은 하나의 가리개와 같은 표피로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 모든 신경과 뼛속까지 덮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정신세계까지도.

작가는 책 속에서 그러한 탈속의 인간이 숨긴 동물적 형상들을 치정에 얽힌 살인을 범하는 두 주인공을 통해 해부한다.
영혼이 부재 된 본능이 그들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한 그림자들을 드리우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사랑과 욕정이라는 이름의 본능이 욕심과 살인으로, 미움이라는 이름이 불신과 광기로, 죄의식이라는 이름이 끝없는 공포의 환영과 고통의 나락으로 책 속의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기르던 애완 고양이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도록 만들지 않던가.

또한 본능은 자연스러운 것 이전에 이기적인 것일 수도 있다.
본능에 관한 조절능력을 상실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의 본능적 호기심조차도.
“시체공시장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부자거나 누구든, 행인들이 무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포석이 꽉 차서 인간의 살덩이를 제대로 진열하고 있으면, 구경꾼들은 급히 달려와 값싼 감동을 느꼈다. 마치 극장에서 하듯이 농담하고 갈채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고는 오늘 시체공시장은 괜찮았다고 하면서 만족하며 물러갔다.”
“가끔가다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가량의 소년들이 무리를 지어 와서는 공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여자들 시체 앞에서만 멈추었다.......서로 팔꿈치로 툭툭 치며 야비한 관찰에 몰두했다. 그들은 죽음의 학교에서 악을 배우고 있었다. 어린 건달들은 최초의 정부(情婦)를 시체공시장에서 사귀는 셈이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내가 느낀 등장인물 모두는 그저 이기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양 착각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자만이었고, 그것의 발로는 그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하는 착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소설 속의 테레즈가 말한 하나의 별거 아닌 말 한마디가 여전히 나로 하여금 울렁증을 유발시킨다.
“알겠어요? 테레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우린 여기선 아무것도 겁낼 게 없어요.......저자들은 모두 장님이에요. 그들은 사랑을 몰라요.”

그러나 친절한 세상은 어리석은 그들에게조차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얻는다 하는, 바로 그 영원한 안식을 통해.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을 읽던 나도 안식을 찾을 수 있었으니, 역시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는가 보다.

‘왠지 4차원적으로 생겼네. 이런 사람 재미있을 수도, 아니면 친해지기 꺼려지거나, 최악엔 친해지기조차 싫거나 그렇지들.’
저것은 왠지 넋이 나간 사람 같은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책 앞표지 뒤 쪽을 장식하고 있던 젊은 작가의 얼굴 사진을 보고 내가 느꼈던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 첫 소설집은 저러한 나의 느낌을 고스란히, 정말이지 묘하리만치 완벽하게 담았다고 할 만큼의 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책 속에 실린 작가의 말조차도.

솔직히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꾼으로 느껴지는 작가들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내용보다는 문체라던가 하는 문장의 표현력에서 묻어나오는 스타일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작가들이 있다.
고로 전자는 글을 읽는 감동의 재미를 선사하지만 후자는 글을 읽는 감각의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작가 황 정은은 이 소설집으로 보건데 단연 후자 쪽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전자 쪽에 관한 기대감도 갖게 하는 듯하다.

내가 저러한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책에 함께 실린 등단 초창기 작품에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모습이 더욱 더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이건 사실 신인은 신인으로서의 갖춰야 할 새로움을 보여줘야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새롭다, 뭐다 하는 식의 멋에 치우쳐 힘을 너무 주고 쓰는 우를 범하는 작가들도 분명 많다.
그런데 그녀를 보면 초기의 작품들에서 후기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감각적인 문장들을 살짝만 보여주고는 스토리를 가지고 저공에서 고공으로 서서히 올라가다가 마지막에 쿵! 하고 내리찍어 대는 내용으로 큰 인상을 남긴다.
그러면서 1년, 1년의 세월을 보내며 잔인한 현실을 뒤로 옮겨 놓으며 환상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소설 선두에 내세우고는 그 안에서 앞서 살짝 보여준 팝콘 튀듯 내뱉는 문장력을 확장해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전한다.

그러한 표현들로는 간결하고도 절제된 대화체, 반복 사용하는 의성어들(어떤 의성어는 한 페이지 모두를 점령하고 있기도 하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는 기묘한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이 그 주를 이루는데, 가장 큰 힘은 읽을 땐 심각하지 않았던 가벼웠던 유머조차 읽고 나서 뒤돌아서면 기괴하고도 진중한 느낌을 선사하는 일종의 감각으로 탈바꿈해 있다는 것이다.
“두리안. 응.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건 나쁜 걸까. 그렇지 않아. 두리안이 말했다. 그대로도 좋아.”
“사람이 많아서, 포장용기에 든 찰떡처럼 모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고 둘은 기다려. 뭘. 나도 몰라. 실은 그 두 사람도 모르는 것 같아. 쓸쓸한데.......쓸쓸하다, 라는 언어적 정서를 K에게서 처음 발견한 순간이라고 P는 생각했다.”
“파씨가 지퍼를 당겨서 가방을 열었어. “특산품이래.”.......G는 과자상자와 고양이를 번갈아 바라보았어. (그런데 어느 쪽이 특산품이라는 거야.)”
“어떡하지. 뭘. 아무리 물장구를 크게 쳐서 파문을 만들어도, 그것은 내가 열심히 팔과 다리를 저을 때뿐이잖아. 뭔가, 물살을 엄청 저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언제까지고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팔과 다리를 멈춰버리면 곧장 가라앉기 시작해서, 일단 가라앉은 뒤로는 파문도 없이 그저 엄청남 양의 물만 있을 뿐이라면. 꿈이잖아”
“사춘기 때 저 프로그램의 주소로 엽서를 보낸 적이 있었다.......그 여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몇 번이나 문장을 고쳐가며 정중하게 써서 보냈는데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가 답해주지 못할 문제를 안고 있다, 오는 노래를 부르듯 중얼거린다.”

상상력이란 분명 비현실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펼치는 상상력은 난해하지만은 않다. 충분히 이해 될 수 있는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 될 수 있다면 그건 현실적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을 통합 해 낼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저자의 장점이 아닐까.
거기에 저렇게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나 같은 범자는 전문가가 쓴 작품의 해설을 읽고 나서야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그것을 읽은 후에 내가 나름 미리 느꼈던 감상들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감이란 어떠한 결과론적인 확실함을 말하지는 않는다.
특히나 이 책을 통해 내가 그녀에게서 기대하게 된 장편에선.
그녀에게 있어 단편에서 유용하게 먹혔던 글들이 장편을 통해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더불어 대중성이란 선택적인 문제이기도 하려니와 그녀에게서 뭔가 정제되어야 할 그 어떤 요소들도 분명 있다는 생각 또한 감지되어지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그녀의 그 긴 호흡소리를 듣게 될 날을 기다리게 됐다.

만물이 하는 모든 동작 그대로를 따라하며 살아가기 바쁜 것이 그림자이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자신의 주인이 행하는 동작 하나하나를 스스로에게 각인해 가며 모든 것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서우리만치 편안함을 가장한 그런 방관자적 시선을 보낸다.
‘너 하고 싶은 데로 해, 그건 네 자유야, 그러니 상관하지 않겠어, 사실 그건 내 알 바도 아니고, 난 그저 너를 대신해서 기록하고 기억만 할 뿐이야.’

그러나 동시에 조용한 협박을 가하기도 한다.
‘난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의 전부를 아는 존재야, 그러니 나까지 속이겠다하는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마, 그리고 잊지 마, 내 어둠의 몸뚱이는 늘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을, 나의 친구인 태양과 달을 세상이 없앤다면 모를까, 이쯤 되면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알겠지, 너에게 쥐어진 유일한 선택은 날 너를 위한 친구로 만들 것인지 혹은 괴롭히는 스토커로 만들 것인지, 그에 관한 결정권만 있을 뿐이야.’

그렇다.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래서 쉴 틈이 없다. 아니, 인간이 쉴 틈을 안 주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만물이 아닌 우리들의 그림자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늘에선 태양과 달이, 땅에선 그림자가 행하는 그 상호협력.
바로 하늘이 알고 땅도 안다는 말은 그렇게 세상의 진리가 된다.
그러므로 달빛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이 상실 된 그림자는 신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한 악마적인 유혹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고는 하늘과 땅도 모든 걸 눈 감아 주겠다는 달콤한 저주의 손길로서 말이다.

반면에 백야는 밝음을 가장 한 체, 어둠을 품고 있는 밤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비취진 그림자는 그래서 더욱 더 진해진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인간은 백야에도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길이만큼 무의미한 악행들을 연장해 간다. 그런 때일수록 그림자 또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소설 ‘백야행’은 바로 그런 인간 군상들의 그림자를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일본의 오사카에서 벌어 진 어느 전당포 주인의 죽음이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주인공들 자신의 그림자에 얼마나 길고도 진한 어둠의 자국들을 남기는지에 대하여 마치 자신이 그들의 그림자라도 되는 양, 그 악마적 기운이 넘치는 기록들을 서슴없이 서술한다.

그의 서술에 의하면, 주인공들의 그림자는 남에게 밟혀도, 때론 남들의 그림자를 밟아도 마음 아파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발걸음만을 옮겨 그것의 위치만을 바꾼다.
더불어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스스로 가진 어둠의 크기와 농도를 더욱 크고 진하게 확대해 나아갈 뿐이다.

소설은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 악에 중독 되어가는 인간들을 그려나가는 듯 하다.
그리고 애써 그 악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악취의 향까지 없애진 못한다.
마치 어두운 그림자가 주위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오히려 강한 빛을 발해 우리 눈이 그것을 피해 갈 수 없게 만드는 것처럼.

그러나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 어둠이 발하는 눈부심 또한 우리의 눈을 감게 만든다는 것을.
이 소설은 그러한 눈부심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눈부심은 당신 자신의 눈을 스스로 감게 하고 싶을 정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