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란 세월에 강산도 변한다.

그리고 그 강산에 의지해 더불어 사는 우리도 변한다.

그 모든 것은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된다. 사람마다 저장 되어 진 분량은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10년분의 녹화 테이프를 돌려 보게 된다면, 보는 것 또한  그런 방식으로 플레이해서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원인과 결과보다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뭔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를 이어줬던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변한 것이니 고로 의미를 둬야 하는 부분도 그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 변화를 겪게 되는 장소가 다르다. 마치 쓰임새가 다르다는 듯, 누울 자리를 보고 누우라는 듯, 심지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와 눈조차도 자신들에게 부여 된 내려앉을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다는 듯. 그런데 만약 그 장소가 감옥이라면 어떨까.

제한 된 공간과 사람들만을 봐야 하는 그 공간에서 우리가 꿈 꿀 수 있는 변화란 무엇일까.

나는 야생초 편지를 읽으며 거기에 걸 맞는 답으로 수양(修養)이라고 하는 단어를 내 놓을까 한다. 물론 그저 듣기 좋은 소리라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사자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저자도 그런 피해자 중 한사람이다. 그것도 10년이나 넘게 감방살이를 한 사람, 그리고 서울농대를 나왔고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인간으로서 깨달아가는 모습은 여지없는 구도자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우리가 잡초라 생각하고 업신여기던 풀들 따위에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봤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았으니 그것이 구도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도 좁디좁은 감옥 안에서 말이다.

그 밀폐된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자연의 세계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통해 그는 아무렇게나 뿌리내리고 사는 듯한 잡초들도 자신의 위치를 알고 뿌린 내린다는 것을 깨우쳤으며, 자신들만의 법칙을 이루며 살고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됐다.

나에겐 그러한 모습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린 그에게 세상이 선사한 마음의 눈과도 같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 가야할 길은 이 길입니다, 라고 하는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감옥은 그렇게 그가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야 하는 위치와 방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결국 자연의 이야기와 어우러진 그의 감옥 속 개인사는 한계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고,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되새기도록 해주었다.

 

‘나는 허름한 배낭에 MP3와 소설책 한 권을 넣고 집을 떠났다. 와조와 함께.’

소설 속 길 위의 주인공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는 영화의 Scene #처럼 각각의 짧은 단락마다 번호가 붙게 된다. 1, 2, 3, ……, 사람에게 따라다니는 주민등록 번호처럼 그렇게. 어쩌면 우리가 이 소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다면, 몇 페이지에 있던 그 내용이라 말하기보다, 몇 번에 써져 있는 내용, 혹은 그 번호에 나왔던 인물이나 편지라고 말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리라. 숫자는 이 소설에서 그만큼 많은 의미를 갖는다. 소설 속에서 숫자는 아날로그적이면서도 디지털과 같은 느낌으로 사용된다. 작가는 자연과 인공의 묘미를 숫자를 통해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3년 동안 여행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순서대로 숫자를 매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숫자를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그가 세운 원칙이 있다. 그리고 그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튼 그 과정을 상상해 보자면 누구나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상상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편지해도 될까요?”

“편지요? 좋아요. 왠지 컵라면처럼 뜨거운 느낌인데요.”

번호를 부여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그, 그러나 사람들은 이메일 주소를 먼저 떠올린다. 컴퓨터는 속도와 사생활 보장이라는 최대의 이점을 우리에게 선사했지만 인간적인 거리는 더욱 멀게 만들었다. 연필로 써서 우표를 붙인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조차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그러나 우리는 곧 느끼게 된다. 컵라면처럼 뜨거운 느낌을 우리도 그리워 한다는 것을.

이 소설은 저러한 감성 이외에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여행이라는 선상 위에 선 주인공을 앞에 내세운 글답게, 사람과 장소, 편지로 연결되는 추억과 관계에 얽힌 사색, 그것들이 마치 여행의 에피소드인 양 거의 매 장면마다 바뀌고 그 흐름이 소설의 마지막에 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러한 느낌은 작가의 수상소감에까지 이어진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다. 한 편으론 보는 사람에 따라 그러한 내용들에 대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그러한 결론으로 끝맺기가 정말이지 힘들었다.

그 힘은 만든다는 작업을 통해 최후엔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 소설일지언정, 결국 글 속에 자기 경험이 녹아 있지 않으면 독자에게 전해지기가 힘들다. 그런 관점에서 자신의 소설책을 서점이 아닌 거리에서 팔며 동시에 이동 중 틈틈이 글을 쓰는, 아집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여류 소설가가 아조와 주인공을 만나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과 말을 더듬는 남자 주인공이 그 버릇을 고쳐나가는 모습을 봤을 때, 소설가로서 성장해 가고자 하는 저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내 나름의 상상을 펴 보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내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하루가 존재했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보내지 않은 편지나 도착하지 못한 편지는 씌어지지 않은 편지나 마찬가지겠지? 그처럼 답장이 없는 편지도 씌어지지 않은 편지라고 봐도 되겠지?”

라고 하는 저 문장 속에서 편지를 소설로 바꿔본다. 그리고

‘......마지막 날, 첫날 만난 길동무 1에게 쓰는 편지. 마치 시작과 끝이 맞물린 느낌이다. 그래서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 순환할 것 같은 기분이다. 결코 이게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그게 시작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소설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저러한 기분일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런데 자유의지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직업이 소설가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의 어떠한 직업도, 삶도 그것 없이는 불가능 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주인공의 형이 그에게 말한 저 문장은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하고픈 가장 큰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나를 이끌었다. 작가는 분명 소설가의 길을 걸으면서 자유의지란, 사실 말은 쉽지만 거기엔 용기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치 여행지에서 타인에게 말을 걸 때 필요한 그것과도 같은 것으로서.

내가 이처럼 리뷰를 통해 책 내용뿐만 아니라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언급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편지를 소재로 하는 책의 내용이 나로 하여금 ‘쓰기’라는 행동작용에 대해 생각토록 했기 때문이다. 전화로 대표 되는 말하고 듣는 소통과 편지로 대표 되는 쓰고 읽는 소통엔 미묘한 여운의 후자는 교감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과 동물과의 교류를 다룬 이 책의 내용은 마침내 나에게 인간으로서의 성숙과 성장은 자신과 타인이 이룬 교감을 통해 쌓여진 이야기들의 높이만큼 비례하여 커간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저마다의 문장들이 뿜어내는 감성적인 묘미와 이야기의 재미가 잘 어우러진 책이다. 무엇보다도 벌어진 사건들을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다시 연결해 내는 디테일들이 잘 살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애잔함과 행복으로 소설 속 마지막에까지 교묘히 교차되어 나타난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내용의 재미 때문에 작가가 조금 과욕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분들도 몇 군데 눈에 띄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커가는 젊은 작가로서 만들고 싶은 이야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그랬겠지, 그래서 수상작가 인터뷰를 쓴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환하게 번지는 확실한 행복감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랬겠지 라고 하는 이해의 미소를 보내고픈 심정을 나로부터 이끌어낸 소설이었다.

내가 책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를 보며 가장 크게 깨달았던 점은 사진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지긋이 최소한 몇 분 동안은 바라봐야 한다는 그의 말은 그 후로도 나에게 무엇을 보든 암묵적인 관찰을 지향토록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다가가기 위함이다. 즉, 사물이나 타인을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느끼는 것으로서 나를 관찰하기 위함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동은 사진을 찍을 때, 혹은 다른 창작적인 일을 할 때도 영향을 미쳤다. 시각적인 겉멋에 치우치기 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다른 무언가가 없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왜 이런 느낌을 받는지, 왜 그런 모습으로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나로 하여금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의 행위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듯한 느낌을 생성해 냈다.

그런 와중에 작년 요맘때, 서울에서 열린 필립 퍼키스의 개인전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느꼈던 점은 그의 사진들이 영적이기도 하면서 문학적이다,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영적이라든가 문학적이라든가 하는 말은 단순히 종류를 구분 짓기 위한 것이 아닌 지극히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일단 그의 사진에서 영적이라고 하는 점은 단순히 근엄하리만치 우주를 초월한 사상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거나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사색이 담긴 사진 속의 기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다른 이들의 사색적인 감정을 건드린다는 점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그렇게 보는 이로 하여금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가능하기만한 내적인 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하는 것이고, 그것을 나는 지금 영적인 것이라 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통해 우리가 보는 그의 사진들은 똑같은 것이지만 각자에게 전해지는 암시적 요소는 저마다 다르다는 뜻을 담으면서도 그의 사진은 우리가 똑같이 볼 수 있는 풍경과 순간을 담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그의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평범함 속에 매 순간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을 돌이켜 볼 때, 그의 사진에서 문학적인 측면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에세이, 시, 그리고 소설로 대표되는 문학도 결국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묵직한 현실과 은유의 맛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니까. 결국 그의 사진들은 예의 현실과 은유 모두가 담겨져 있다 말 할 수 있겠다. 그의 사진집 제목도 ‘인간의 슬픔’이라고 하니 지금 돌이켜 보건데, 그가 바라보며 사진에 담은 세상사의 맛이 더욱 더 진하게 우러나오는 듯 하다.

이 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는 그러한 그의 사진과 거기에서 나의 받은 느낌, 그리고 서두에 밝힌 예의 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할 만큼 꾸밈없고 담백하다. 깔끔하고 명료하게 꾸며진 책의 표지처럼 말이다. 그의 사진집에 실린 글들의 번역본이면서 이 책을 낸 한국인 제자와의 대화가 첨부되어 만들어진 이 책은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노트‘와 연장선상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그의 전작을 만족스럽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짧은 분량의 이 책에서도 뭔가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이 분명 있을 거라 자신한다. 또한 사진 분야와 상관없이 어떤 창작 쪽 일을 하시는 분들께도 사진과 함께 생을 살아 온 노령의 사진가가 전하는 일과 삶의 방식에 관한 뜻 깊은 충고들이 글 여러 곳에서 묻어 나오는 바, 그러한 분들께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